파혼하러 돌아왔다 48화
3층에서 난리가 나는 사이에 메리와 집사 콜린은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사용인답게 1층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토비만은 마구간에 들어가지 못하고 저택 문 앞에서 쩔쩔 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그런 토비에게 걸어가 말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을 3층 창문가에서 지켜보았다. 엉망이 된 침실에 메리가 들어와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물을 때까지.
“괜찮으세요,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의 엘리자베스를 본 메리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침실 바닥을 가득 채운 파편을 바라보며 메리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엉망이 됐네요.”
“아뇨. 아니에요, 그것보다 어제 많이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침대에서 벌써 일어나셔도 되는지…….”
“괜찮아요. 이제 멀쩡하니까.”
엘리자베스는 다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엉망진창이 된 제 얼굴을 어떻게든 수습하던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며 메리에게 말했다.
“치장을 좀 도와줄 수 있겠어요?”
메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져온 빗자루는 벽 한쪽에 세워두고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의자에 앉은 엘리자베스의 뒤쪽으로 간 메리가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사실은 저택에 처음 오신 날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가씨.”
“네? 뭘요?”
“그게…… 도련님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요…….”
메리는 눈물에 젖고 또 엉킨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빗으로 쓸어넘겼다. 메리는 그러면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도련님이 예전에 술에 많이 취하셨을 때 말이에요. 처음 공장장이 되어서 출퇴근하실 때요. 그때 제가 너무 도련님의 약혼자가 궁금해서 여쭤보니까…….”
엘리자베스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눈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아가씨는 자기가 꼭 갖고 싶었던 것을 닮았다고 하셨어요. 한 번 손에 넣으면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요. 그 말이 그때는 낭만적으로 들리지 않았죠, 저도. 하지만 아가씨도 나중이 되면 아시게 될 거예요. 그런 책임감 있는 남자가 신랑감으로는 최고라는 사실을요.”
새하얀 피부에 푸른 눈동자를 한 금발의 여자. 케이 하커 같은 노동자 아이가 대축일에 교회에 가야 볼 수 있는 성화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여자. 케이 하커가 부자 동네에 가면 꼭 사고 싶었다는 귀족 아가씨를 닮은 인형.
엘리자베스는 거울 속에서 그것을 보았다. 마침내 케이 하커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렇게 바라던 것처럼 케이 하커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죽고 싶어졌다.
“그러니 너무 싸우지 마세요. 저희 도련님이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아가씨? 아가씨…… 아이고…… 울지 마세요. 제가 괜히 참견을…….”
* * *
엘리자베스가 케이 하커가 에렌델 스트리트에서 사준 어마어마한 가격의 드레스를 입고 저택을 나섰을 때는 토비가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이 드레스를 입고 저택에 왔고, 이 드레스를 입고 저택을 나간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치미는 신물을 삼켰다.
속이 좋지 않았다. 이제는 몸의 이상이 서너 시간 단위로 왔다 갔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젯밤처럼 끔찍한 발작에 가까운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제의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는 그 소름끼치는 몰록이 말했던 것처럼 ‘동족’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동족’이라니…….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한 말 때문에 흔들리려던 마음을 손쉽게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에 오르려는 엘리자베스에게 케이가 손을 내밀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가볍게 쳐내지 못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케이가 눈앞에 칼이라도 들이민 듯이 구는 것을 보며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손에 독약이라도 묻혀놨을까 봐 그런가? 그냥 잡아. 손은 그냥 손이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노려보곤 케이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케이의 온도가 차가운 엘리자베스의 손에 전달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온도에 중독되지 않도록 얼른 손을 떼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우지 않고는 마차에 따라 타서 토비에게 말했다.
“가자.”
“어디로 모실까요?”
토비는 잔뜩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불쌍한 마부 소년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케이가 말했다.
“바실리 스트리트 끄트머리쯤에 내려줘. 우린 가볼 곳이 있다.”
케이가 돌려 말했지만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칼몽 여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칼몽에서 챙겨 나와야 할 것들이 있었고 케이 역시 그랬다. 특히 멜니아 중앙 은행 수표가 거기에 있었다. 하루를 꼬박 비우게 될 줄 알았더라면 거기에 수표를 두지 않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마부석을 향해 난 창을 닫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럼…… 그 멜니아에서 왔다는 테시톤이라는 작자도 혁명을 돕는 거야? 네가 혁명에 참여한 대가로 멜니아 사업가들과 사업을 할 수 있는 거고?”
엘리자베스는 아까 찍다시피 했던 말을 확인하듯 물었다.
혁명에는 돈이 든다. 하지만 성공한 혁명은 결국 돈을 벌어다준다.
왕 대신 대통령이 있다는 멜니아에서는 빚만 잔뜩 진 왕정이 버티고 있는 레본의 현 정치적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부패하고 빚만 잔뜩 진 왕정에게서 여러 사업권을 쉽게 뜯어낸 뒤, 혁명을 일으키고 진보적인 사업가들과 제대로 된 사업에 착수하는 것, 그것이 멜니아의 사업가와 정치가들이 노리는 가장 큰 혁명의 이점일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여겼다. 그리고 그 지점을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케이는 묘한 미소만 지으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테시톤은 레본 내의 혁명을 위하는 작자는 아니야. 윌리엄 경이 그런 건 말해주지 않던가 보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오묘한 말투가 거슬려 몸을 움츠렸다. 자신이 케이의 모든 것을 알아본 것은 아니라는 걸, 그저 미래에서 들은 몇 가지 정보를 짜깁기한 것이라는 걸 케이가 알아보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케이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마차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지폈을 뿐이었다. 그러곤 가라앉은 눈으로 창 밖의 도개교를, 도개교 이북의 컬로든 왕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썩어빠진 왕궁 따위 팔아먹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젠 헐값에 사가라고 해도 아무도 사가지 않겠지. 왕궁의 심장까지 전부 내다 건다면 모를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았다.
“건방진 자식.”
케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나는 건방지고 너는 바보야. 나 같은 개자식을 고르고, 취하고, 가장 나쁜 시기에 이렇게 날 버리겠다는 너는 바보지.”
케이의 오만한 표정을 본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케이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케이는 지금 엘리자베스의 말을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닥쳐, 케이 하커. 나는 널 가지는 것도 버리는 것도 전부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니 무척이나 공녀님 같군. 재작년 이맘때가 떠오르는 걸.”
엘리자베스는 약혼 직후에 지독하게도 자신에게 복종하는 척하며 자신의 소유욕을 자극해대던 케이 하커가 떠올랐다.
그래. 그때의 케이 하커는 마치 쉐필드에서 자신의 눈만 봐도 벌벌 떨던 농노들 중 하나처럼 굴었다.
엘리자베스는 하루 만에 얼굴을 바꿔 복종을 가장하여 자신을 놀려대는 케이를 열심히도 부려먹었다. 사냥터에 젊은 남자들과 모여 술을 먹고 케이를 부르고 케이가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케이의 자존심을 무참히 밟아도 보았다. 케이가 다시 건방지고 야단스러우며 대단한…… 자신의 구원자로 변하길 바라며.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고 두 사람은 그저 그런 악연으로 끝이 났다. 과거에는.
이번 생이라고 다를 게 없겠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에게 말했다.
“난 지금 널 협박하는 거야. 케이 하커. 제발 닥쳐. 로버트 하커가 아무리 왕정을 팔아먹을 정도로 대단한 사업가래도 반역으로 제 아들이 목이 잘리는 건 막지 못할 걸. 반역죄에는 리오든 경찰청에서의 논리적인 수사 전에 공개재판이 선행되니까.”
클레몬트 공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삼켰다.
* * *
칼몽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여관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해미쉬의 사촌이라는 주인장은 여관에 있던 광부들이 대부분 일터로 출근을 하고 이제 한산한 때라고 말했다.
케이는 주인장에게 품 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어 내밀며 말했다.
“그럼 잘 됐군. 내 약혼자가 쓰는 2층은 오늘 하루 객실을 전부 비워. 그렇게 하면 이걸 두 개 더 주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머저리 같은 짓을 보면서도 무시하기 위해 얼른 2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 주인장이 케이의 금화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금화보다 소중한 단골 고객들이 있어서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하지만 감히 내 여관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식들은 없으니까 걱정마슈. 그리고 위층 아가씨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 말에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제 방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자베스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 공녀님!”
엘리자베스는 방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얼굴을 보고 놀랐다. 거기에 서 있던 것은 케빈 퍼킨과…….
“정말로 공녀님이 여기에 계시는 군요?”
루이 니콜라스 교수였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에게 칼몽 여관의 위치를 알려주었던 것을 그제야 기억해냈다.
젠장할. 잊고 있었어. 통제해야 할 강력한 변인 중 하나.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가 내세운 가짜 이름이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사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잊은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고 루이를 보았다. 루이는 신사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잘 기른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케빈 이 녀석이 공녀님이 엘우드 밀이라는 과학자를 안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꾸짖었지요. 워낙 이 녀석이 헛소리를 좋아하는지라…….”
“그, 그러셨군요.”
엘리자베스는 놀란 기색을 숨기며 천천히 걸어서 침대 옆에 있는 협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거기엔 서류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여유로운 움직임을 흉내 내며 그 안의 수표도 살폈다. 그대로였다.
“그래서 제가 닦달을 했더니 이 녀석이 사실은 공녀님이 온도와 함께 시간을 통제하라고 하셨다지 뭡니까? 저도 그걸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낮은 온도까지는 실험을 해보지 않았던 탓에…… 아니, 그것보다는 그런 걸 어떻게 공녀님이 아신 겁니까?”
루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빈은 헛기침을 하며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피했다. 망할 자식! 엘리자베스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루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엘우드 밀의 이름을 대신 거구요? 논문에는 원칙적으로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실어야…….”
원래는 어떻게든 엘우드 밀의 행세를 할 대타를 루이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젯밤 이성을 잃고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왜냐하면 제 이름이 엘우드 밀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님.”
그리고 들어온 것은 케이 하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