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47화
케이의 뺨이 돌아가고 엘리자베스의 입에서는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
“이 미친 새끼. 이 개 자식. 이 건방진 새끼!”
엘리자베스는 몇 번이나 케이의 뺨을 내리쳤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무자비한 공격을 조금도 피하는 기색 없이 맞아냈다. 엘리자베스는 그게 더 화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스스로를 죽이겠다고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게 화가 났다. 망할 엘 선생님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엘리자베스의 몸은 안에서부터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 디트리히 폰이라는 알 수 없는 이름과 빌어먹을 꿈 속 휘장 따위는 제대로 된 단서 구실도 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네가 나 때문에 죽겠다니.
켈토로 앰버와 함께 떠나 행복하게 살아야 할 네가. 나 없는 미래를 행복하게 꿈꿔야 할 네가—
건방지게도 나를 위해 죽는다니.
“이…… 이…… 개자식…….”
엘리자베스는 이제는 끅끅거리며 울었다. 한 마리 짐승이 된 것처럼 케이를 때리다가 케이의 어깨에 기대서 울었다. 그러다가 케이의 뒤에, 침실 문 앞을 서성거리는 미리엄과 눈이 마주쳤다. 미리엄이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붙잡는 지독한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미리엄은 죽어가고 있고 자신에게는 치료를 위한 투약 분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이 만든 신의 가루인 퀴닌이 있다.
내일은 영명 축일이고, 루이 니콜라스 교수는 자신을 논문에 실어줄지도 모른다. 그럼 엘우드 선생을 만날 거고 엘우드에게는 치료제가 없을 것이다. 치료제가 없다고 해도 반드시 그 망할 과학자를 만나 물어볼 게 많았다.
몰록에게 물리면 죽는다더니 왜 자꾸만 몸이 튼튼해지고 가벼워지는 건지. 몰록에게 물려 몰록이 된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는 인간이 남아 있는 건지 사라지는 건지.
엘우드, 당신은 이 사실을 어디까지 알았는지.
수많은 계획들이 얽히고 설켰으며 변수가 너무 많았다. 지금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 있는 구상은 변인 중 하나만 통제되지 못해도 결국 실패로 이어질 실험 계획이다.
그러니 보험이 필요하다. 케이 하커가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하도록 만들 보험.
케이는 언제부터 자신을 위해 죽을 남자가 된 걸까. 그건 지난 미래에서부터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파혼을 한답시고 돌아다니며 만들어낸 수많은 변수 때문에 바뀐 것일까.
아마 엘리자베스는 그 시점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미 케이가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할 씨앗은 그의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좋아…… 네 말대로 네가 사생아 새끼인 건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 케이 하커, 진짜 이유가 궁금해? 그럼 말해주지.”
엘리자베스는 싸늘한 푸른 눈동자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를 감싸쥐고 있던 손을 풀어서 자신을 지탱하느라 힘이 풀려 있는 케이의 손에서 손쉽게 장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장총의 총구로 케이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장총을 겨눴다.
“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움직임에 놀란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그것을 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 조금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총부리를 쥐고 있었다. 마치 엘리자베스가 그 총을 드는 게 힘들까 봐 도와주겠다는 듯이.
“뭐 하는 거야. 괜히 잘못하다가 다쳐.”
케이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총을 잘못 쏜대도 엘리자베스는 손가락 몇 개 다칠 뿐이겠지만 케이는 즉사할 텐데도.
이 멍청한 자식을 어떡하면 좋지.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저주했다.
“총을 쏠 때는 몸에 딱 붙이고…….”
“닥쳐,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가슴팍을 총부리로 세게 눌렀다.
케이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못 쏠 것 같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럼 뭐가 중요하지? 아, 너와 네 동지들…… 특히 그 아름다운 창부의 딸내미가 혁명을 이룰지 말지, 그게 중요한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 하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맞는 곳을 찔렀다는 걸 느꼈다.
침실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벽 같은 침묵을 뚫고 케이가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한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는 것을 느끼며 총을 더 확실하게 케이에게로 겨눴다.
“너희가 감히 왕정에 반기를 들 계획을 꾸민다는 걸 안다고 했어. 창부의 딸, 평민의 자식 따위가 감히…… 감히! 몇 백 년이나 된 왕조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거.”
엘리자베스는 로킨트 스트리트에서 자신이 손쉽게 케이 하커를 흉내 냈듯이 손쉽게 아버지를 흉내 냈다.
‘그레이트 레본의 클레몬트 왕가는 감히 천한 평민들 따위가 돈 몇 푼으로 절대 살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하커 가의 자식과 결혼한대도 너의 이름에는 영원히 클레몬트가 남을 것이고, 내 손주의 이름에도 당연히 클레몬트가 남을 것이야!’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왕가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쓰는 특유의 억양, 특유의 눈짓과 특유의 손 움직임까지 모두 흉내 낼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가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총을 빼앗으려는 듯이 총신에 손을 댔다.
엘리자베스는 총을 두 손으로 꽉 쥐고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겨눌 듯한 모습을 취했다. 그러고는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비밀 투표. 보통 선거. 아동 노동 금지.”
차티스트들의 표어를 엘리자베스는 전부 읊을 수 있었다. 케이의 턱에 힘줄이 돋아났다.
“너…….”
“귀족원 세습 금지! 왕정 폐단 철폐!”
엘리자베스는 핏줄이 돋아난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케이의 움직임이 멎었다.
케이는 총신에서 손을 뗐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자백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이 뭐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어. 네 비상금 출처가 궁금해서 윌리엄 경한테 뒷조사를 부탁했으니까. 윌리엄 경의 위험한 친구들이 그런 것도 말해주지 않았을 것 같아? 윌리엄 경은 ‘우리’ 세계의 사람답지 않게 혁명에도 관심 있는 친구들을 많이 갖고 있거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라는 말에 강조를 실었다. 우린 우리고, 너넨 너네야. 우리는 몰락하는 왕조와 함께 썩어문드러져 갈 거고, 너희는……. 기어코 역사에 여자와 노동자의 이름을 쓰겠지.
그게 너희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약해지려는 마음은 비릿한 피 냄새에 솟아나는 식욕을 느끼는 순간 다시 다잡을 수 있어졌다.
“집에서 키우는 개만도 못한 것들. 배은망덕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투표권을 달라고? 하원에 여자와 노동자의 자리를 원해? 국왕 폐하는 신이 내리는 거야! 평민 따위가 뽑는 게 아니라고.”
케이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총신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그어진 듯이 케이는 그 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하원에 자리를 달라는 게 반역을 말하는 건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사업가들이 하원에 자리를 얻고 나서 한 일을 봐. 세상이 엉망이잖아. 그런데 이젠 켈토에 나라를 팔아먹을 궁리까지 하다니. 개 같은 자식. 클레몬트 왕가를 팔아서 비상금을 많이 챙겼나? 감히 너희들을 배불려준 왕가를 버려?”
케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얼굴과는 확연히 다른 열정적이고 격렬한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에서 솟아나는 혐오와 경멸의 빛을 기껍게 바라보았다.
“배불려주다니.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봐. 그들이 왕가 덕에 무슨 덕을 봤어? 어? 말해봐,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하며 침대 기둥을 내려쳤다. 로버트 하커가 비싼 값을 치르고 들여온 처리가 잘 된 가구에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지만 케이의 주먹은 새빨갛게 변했다.
멍이 들리라. 엘리자베스는 당장 케이의 손을 제 손 안에 쥐고 약을 발라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동요 따위는 눈치챌 여유가 없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의 눈에도 물기가 고여 있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어. 농노는 노동자가 되었고 장원은 해체되고 왕조는 위태로워. 그런데도 난…… 나는…… 우리만 생각한 거야.”
“우리?”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총을 내려놓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것은 결코 손에서 오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 우리. 우리가 함께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 그것만 생각한 거라고. 내가 진짜로 노동자들을, 그 어리고 약한 것들을, 공장에서 14시간씩 화학약품 냄새를 맡다가 폐병으로 내 나이쯤엔 죽어버리는 그것들을!”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엘리자베스의 총을 빼앗았다. 엘리자베스는 있는 힘껏 버텼지만 수가 없었다. 케이는 단숨에 엘리자베스의 총을 빼앗고 그것을 내던져버렸다. 반동으로 딸려오는 엘리자베스의 몸은 그대로 품 안에 가둬버리고 침대 기둥으로 밀어붙였다.
“내 어린 시절을…… 불쌍하게 여겼다면 너와 약혼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 빚더미에 오른 클레몬트 공작가를 팔아서 무슨 이득을 남길 수 있었겠어.”
“뭐?”
엘리자베스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이 시절의 케이 하커가 이미 클레몬트 공작가가 빚더미에 올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런데 왜 로버트 하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거지. 이야기했다면 우리의 약혼은 금방 깨졌을 텐데. 왜.
“그런데 기어코 빚더미에 오른 클레몬트 공작가가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도 너를 도망가게 하지도 않았겠지. 너는 클레몬트 공작가에 남은 유일한…… 가치 있는 물건일 텐데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태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케이의 얼굴에 남은 흉한 죄악감의 상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케이에게는 케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들을 배신해야 하는 아픈 역사였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뼈저리게 실감하고 케이를 노려보았다.
“네 마음, 네 감정 같은 건 이제 나하곤 상관없어. 내가 너한테 요구하는 건 딱 하나야. 내일 영명 축일에 우리 아버지한테 나를 돌려놔. 죄를 빌고 파혼이든 뭐든 받아들여. 돈도 전부 하커 가문이 내야겠지. 안 그러면 로버트 하커 씨의 사생아 새끼는 물론이요, 그의 동지들도 전부 컬로든 궁 앞에 머리가 걸리게 될 테니까. 이해…… 해?”
엘리자베스는 마지막 말에서만큼 어쩔 수 없이 말을 더듬고 떨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손을 차가운 얼굴로 내려다보며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전부 이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