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46화
“더러운 사생아 새끼?”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가 천천히 엘리자베스의 말을 곱씹었을 때, 케이 하커가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담긴 손수건을 내버리거나 재판장에서 엘리자베스의 가문을 배은망덕하다고 몰아붙일 때처럼 삐뚤고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기를 바랐다.
혐오와 경멸을 담아 자신을 봐주기를. 그리하여 그 혐오와 경멸에 혐오와 경멸로 답할 수 있기를.
하지만 케이 하커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가만히 앉아서 엘리자베스를 보며 그 눈을 했다.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눈. 동요 따위는 들어 있지 않은 가라앉은 갈색 눈이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눈을 보는 순간 당장 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도망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엘리자베스는 이 지경이 되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운명이 아가리를 벌리고 두 사람을 씹어 삼킬 듯이 굴고 있는데.
“그래. 더러운 사생아 새끼.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더러운 노동자들이랑 어울리면 더러운 병에 옮을 수 있다고.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됐잖아.”
“진짜 그렇게 됐다고?”
케이는 여전히 무감각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로버트 하커의 밝디밝았던 온실 앞에서 피를 흘리고 서 있을 때처럼.
“미리엄 같은 천한 노동자도 모자라 앰버 플래스 같은 창부까지 함께 어울리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던 거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할 때 케이의 눈이 엘리자베스를 샅샅이 훑어 내리고 있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팔짱을 낀 손으로 제 팔뚝을 쓸어내렸다. 눈에 힘을 주고 주먹은 꽉 쥐고 아래턱을 악 물어도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려왔다.
“우리는 왕족이고, 귀족인데. 아무리 아버지가 화가 나셨더라도 풀어드렸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우리라…….”
케이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까부터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퍼붓는 말에 조금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엘리자베스의 말을 따라 하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안간힘을 써서 참으며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연역적인 명제들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그러니 영명 축일이 지나면 날 아버지 댁으로 돌려놔. 영명 축일에 우리 아버지한테 싹싹 빌고 그 대신에 파혼이든 뭐든 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해. 나는…….”
그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착실하게 닦아놓은 논리의 돌계단들을 다 부숴버리며 케이가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싸쥔 것은.
“불치병이라고 하던가?”
“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해 어버버거렸다.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싼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케이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얼굴에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내 말은 날 영명 축일에 클레몬트 공작가로…….”
“불치병에 걸렸다고 했냐고. 그래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더니 나한테 파혼하자고 한 거야? 어디론가 사라져서 내 눈앞에서 도망쳐서 다신 안 나타나려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끊더니 분기를 참지 못하고 작은 협탁을 발로 차버렸다. 그 바람에 그 위에 있던 유리 재떨이 따위가 떨어져 바닥에 파편이 튀고 엉망이 되었다.
순식간에. 겨우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다니.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실력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불치병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뿌옇게 변해가는 시야를 느끼며 케이에게 소리쳤다.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만드는 모든 것을 눈앞의 이 남자는 손쉽게 깨부수고 망가뜨려버린다. 그러니까 내 평온한 인생을 망쳐버린 이 소란스럽고 대단한 녀석이 자신이 쉐필드에서 지평선을 보며 기다리던 그 녀석이 맞던 것이다.
케이는 붉은 흰자에 분노가 가득한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럼 뭐야! 더러운 사생아 새끼라고? 겨우 그딴 헛소리를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나한테서 도망치는 것 외에 얻는 게 뭐냐고! 전쟁이나 꾸미고 네 몸에 손이나 대는 개 같은 가문으로 돌아가는 거?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케이는 이미 밑동이 부서져버린 도자기를 다시 발로 차서 엘리자베스에게서 멀리로 보내버린 뒤에 거친 숨을 토해냈다.
“거짓말도 최소한의 성의는 있게 해야지!”
그러니까 내 거짓말이 성의가 없어서 화가 난 거구나.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제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제 귀로 들으면서도 웃었다. 그렇다면 성의 있게 해주지.
“미친 새끼…….”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나 창가에 기댔다.
“내가 너 같은 미친 사생아 새끼한테서 도망칠 궁리가 필요할 거 같아? 난 왕족이야! 난 공녀고…….”
“씨발. 그래. 넌 공녀야, 그래서 어쩌라고!”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엘리자베스 역시 팔짱은 풀어내고 언성을 높였다.
“앰버 플래스한테 전부 다 들었어! 앰버는 창부의 딸이고 너는 더러운 사생아 새끼라서 둘이 친해졌다지! 너는 마구간에서 잤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노동자들이랑 7살 때부터 일했고 하커 가문에서 노예처럼 살았다고! 배은망덕한 하커…… 어떻게 감히 왕족의 딸에게 공장에서 일하던 노예 새끼를 붙일 생각을 해? 은혜를 모르고…… 은혜를 모르고!”
엘리자베스의 눈에도 핏발이 섰다. 목에는 힘줄이 드러나고 말끝에는 울음이 묻어났다. 이것이 엘리자베스의 성의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숨소리가 떨리듯 케이의 숨소리도 떨려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떨리는 숨소리 외는 잠시 잠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케이 하커였다.
“그래…… 불치병이 아니란 말이지…….”
케이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숨 같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흐느끼고 있었고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케이가 그런 엘리자베스에게로 또 한 걸음 걸어왔을 때 엘리자베스는 당장 옆에 있는 부지깽이라도 들어 이 무뢰한을 내려치고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럼 솔치노 뒷골목에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 때문이야?”
“뭐라고…….”
엘리자베스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는 케이가 토비와 자신 사이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에는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 미친놈은 그러니까 자신이 앞에 한 말은 조금도 믿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학질에 걸렸을까 봐, 더러운 사생아 새끼와 결혼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제 내 소유욕과 집착이 휘발되었으니까 내가 너한테서 도망간다는 말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 얼굴이다.
“그 일 때문에 그 잘난 공녀님 명예 실추라도 될까 봐?”
“그런 거 아니…….”
케이는 저택이 울리도록 소리쳤다.
“토비! 토비!”
케이가 소리를 지르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케이 하커, 이 개자식.
“예! 예 도련님!”
토비는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방 안의 살풍경을 보곤 깜짝 놀라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에 눈물로 번들거리는 엘리자베스를 보곤 토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사냥용 총을 가져와라! 쉬고 있던 말도 데리고 나와!”
“예……?”
토비가 이 한겨울에 사냥 준비를 하라는 주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는 사이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솔치노 뒷골목에서 만난 그 작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 오늘 내가 그 새끼를 죽여버리기 전엔 저택에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옷도 단단히 챙겨줘.”
“네?”
토비가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하지만 케이는 토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른!”
“아, 예. 예. 도련님!”
토비는 케이의 눈에 담긴 무시무시한 노기를 느끼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무슨 헛소리냐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든 아니든 그 새끼는 죽여버리려고 했어. 앰버의 말대로 죽여버리면 후환을 남길 일도 없지. 이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더럽고 지저분한 일은 전부 내가 하면 돼. 그런 건 네 아버지보단 나랑 더 잘 어울려.”
“이 미친 새끼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토비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냥용 총을 가져와 케이에게 안겨주었다. 토비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케이는 토비의 등을 툭툭 치면서 가서 다른 것도 준비해오라고 했다.
엘리자베스의 허리춤까지 올 것 같은 장총을 한 손으로 손쉽게 받아든 케이는 진짜로 당장 인간 사냥이라도 나갈 기세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이 미친놈을 막기 위해 케이의 팔을 잡았다.
“미쳤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조가 아니라 내가 조의 손가락을 물어뜯었어. 조를 죽일 뻔한 건 나고, 내가 언젠가 너도 죽이려고 들 거야. 나는 느낄 수 있어. 내 안의 식욕을…… 내 안의 괴물을…….
엘리자베스가 그 말을 하지 못해 망설이는 사이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았다.
“절대 새어나가지 않아.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뭐가 문제야. 왜, 설마…….”
케이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파리한 안색을 살피던 케이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임신 같은 거라도 했을까 봐? 그런 건 걱정하지 마. 그건 그냥 내 자식이라고 하면 돼. 나랑 엮이는 게 싫으면 내가 널 강간했다고 해. 손목 한두 개 쯤 잘리거나 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너는 약혼자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고 해.”
“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 자식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전생에 자신이 어떤 이유로든 방치하고 내버렸던 아내를 위해, 왜.
“그런 사생아 새끼를 키우는 것도 불안하다면 그냥…… 날 줘…… 내가 그 갓난쟁이 사생아 새끼를 하일 강에 던져주고 올 테니까. 말했잖아. 더럽고 지저분한 건 내가 더 잘해.”
“뭐라고…….”
엘리자베스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갓난쟁이 사생아 새끼. 로버트 하커의 철문 앞에 버려져서 죽었어야 할 목숨.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에 든 끔찍한 무덤덤함을 알고 있었다. 그건 제 운명에 대한 체념이었다.
“그래놓고도 불안하면 내가, 내가…… 이 더러운 사생아 새끼도 죽여버리지. 내 손으로 직접.”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가리킨 케이는 정말로 당장 자신을 쏴버릴 것처럼 총을 장전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는 순간 미리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 하커는, 자신이 죽는다면 사람을 다섯쯤은 쏴죽이고 자신도 쏴버릴 것이다. 그래, 이 개 같은 새끼는 자신이 버린 아내를 위해 죽을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