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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45화 (4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45화

케이는 누가 봐도 한숨도 못잔 얼굴을 하고는 응접실로 들어왔다. 마침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움찔 굳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자마자 쏜살같이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와 그녀의 뺨을 감싸쥐며 물었다.

“괜찮은 거야? 언제 일어났어. 젠장할. 그 돌팔이 새끼가 염병만 떨지 않았어도 널 두고 외출하진 않았을 텐데.”

미리엄의 말대로라면 염병을 떤 건 의사가 아니라 케이 하커일 터였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어제는 그냥…….”

엘리자베스가 말끝을 흐리며 케이 하커의 뒤로 안절부절 못하며 서 있는 토비를 보았다.

“그 남자.”

엘리자베스는 토비를 힐끔 보다가 케이에게 물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케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토비는 아까보다 훨씬 더 안절부절 못하며 들고 있던 더러운 수건을 꽉 쥐었다. 토비의 눈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왜일까? 어젯밤, 한 사내가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조는 죽었을까? 조는 무고한 사람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의 죽음이 어쩔 수 없이 달가울 것이었다. 조가 죽었다면 그건 전부 자신 때문인데도.

엘리자베스는 그런 스스로가 얄미워 목이 메었다.

“그 남자라니?”

그러나 케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케이는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살폈다.

“어떤 남자를 말하는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뒤에 있는 토비를 보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따라 토비를 보자 토비가 헛기침을 해댔다.

“쿠, 쿨럭. 저, 저, 메리 아줌마! 무, 물 한 잔만요.”

토비가 왜 저러는 거지? 엘리자베스는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식당을 향해 떠나가는 토비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가 죽은 모양이라고.

앰버 플래스가 아무리 조를 강간범으로 오해했다고 해도 리오든 한 복판에서 리오든 시민을 죽였다면 경찰 조사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앰버가 조를 죽이고 토비와 함께 조를 하일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몰랐다. 켄드릭 하커에게 협박했던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가슴 속에서 자라나는 속절없는 희망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꼈다.

‘넌 괴물이 되고 있는 거야. 진짜 괴물.’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제 혀끝에 닿았던 피의 달콤함을 기억하며 소스라쳤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떨자 케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아파?”

“아니야. 그런 거…… 저기 토비?”

엘리자베스는 목이 타는지 물을 반쯤은 흘려대면서도 맹렬하게 목구멍을 적시는 토비를 향해 말했다.

토비는 켁켁거리며 대답했다.

“네? 아가씨?”

“내가 좀 피곤해서 그런데 내 방으로 음식을 좀 가져다줄래? 메리는 닭고기를 다지느라 바쁘니까 부탁 좀 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토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난간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리자베스가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번쩍 들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토비에게 음식 트레이를 내어주기 위해 식당에서 고개를 내민 메리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전생에서는 케이와 싸우곤 술에 잔뜩 취해서 케이에게 업혀 들어온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맨 정신에 들쳐 메진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첫날밤을 치르던 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리며 말했다.

“나 혼자 걸을 수 있어.”

“퍽이나 그렇겠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새빨개진 게 보기 좋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곤 메리에게 말했다.

“토비한테 음식 좀 가지고 올라오라고 해. 난로가 식었을지도 모르니까 숯도 더 가지고 오고.”

“네, 도련님.”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지만 메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종잇장처럼 가뿐하게 들려가는 동안 메리를 보지 않으려고 케이의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케이의 피로한 숨소리가 엘리자베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케이는 계단이 꺾어지는 곳까지 걸어갔다가 멈춰 서서 메리에게 물었다.

“미리엄은? 좀 어떻지?”

“아까 아가씨께서 방에서 나오실 때 잠깐 뵀어요. 많이 차도가 있으시더라구요. 그래도 새로 의원을 구하셔야…….”

“알아. 안다고. 하지만 그 시건방진 돌팔이 자식은 이제 억만금을 줘도 안 오게 됐으니 새로운 왕진 의사를 구해야지.”

케이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메리의 말을 끊어버리고 위로 올라갔다.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부부침실까지 올라간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침대 위에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내려놓듯 내려놓았다.

“혼자 걸어올 수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슈미즈 자락을 꽉 쥐곤 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소심한 항변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벽난로로 가서 불을 살폈다.

“숯이 많이 필요하겠어. 기다려. 미리엄한테도 인사하고는 와야 하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파리한 안색을 보더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침대 맡으로 걸어와서 엘리자베스를 종용했다.

“얼른 다시 누워. 어제 열은 펄펄 끓고 내내 토하고 난리를 쳤잖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멀쩡한 척하면 안 돼.”

“진짜 멀쩡…….”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농담조에 농담조로 대답하려다가 케이의 퀭한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미리엄은 케이가 밤새 자신의 머리맡을 지켰다고 했다. 한숨도 자지 않고. 그래놓고는 의사를 때리고 그 의사가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의사를 찾아 헤매고. 이런 천하의 바보 멍청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의사를 때리다니. 미리엄 주치의를 새로 구해야 하잖아,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새끼가 네 맥박이 정상이 아니라는 둥, 눈동자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둥, 방법이 없다는 둥 헛소리를 하잖아!”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케이가 거칠게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큰 악몽을 꾸고 난 사람처럼 손까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제 손에 묻었던 피를 기억했다. 그것을 기꺼이 마셨던 스스로의 행동도.

케이가 어둠이 짙게 깔린 눈동자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저렇게까지 겁에 질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케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차마 엘리자베스를 보지 못하겠다는 듯 돌아섰다.

“……토비에게 숯을 많이 가져와야 한다고 얘기하겠어.”

케이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쾅 닫았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움츠렸다.

혼자 남겨진 방에는 한기가 돌았다. 엘리자베스가 이불을 대충 끌어서 덮으려고 할 때 문이 다시 열렸다. 문을 연 것은 토비였다.

불쌍한 어린 마부는 엘리자베스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음식 트레이를 침대 맡 협탁으로 가지고 왔다. 엘리자베스가 토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토비가 불안하게 시선을 옮겼다.

“토비. 어젯밤에 있었던 일 왜 도련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니?”

“그, 그게요…… 그게…… 앰버 플래스 양께서 그 얘긴 도련님께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엘리자베스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걱정하며 다가오던 조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왜?”

“왜긴요.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공녀님이시고…… 아가씨의 명예를 위해선 어제 있었던 부, 불상사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도, 도련님은 좋은 분이지만 도련님은 아가씨의 약혼자고…….”

토비가 벌벌 떨며 하는 말들에는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정보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결국 토비와 앰버 플래스가 끝까지 조를 자신의 드레스를 갈갈이 찢어놓고 강간하려고 한 놈으로 기억한다는 것 외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토비를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떻게 됐니? 토비?”

토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물을 반통은 마셨으면서 아직도 목이 마른 것 같았다.

“앰버 플래스 양께서는 당연히 그 남자를 쫓아서 죽이고 싶어 하셨지만…… 그렇지만요…… 남자가 솔치노 스트리트 뒷골목 지리를 잘 아는 것 같았답니다. 그래서 결국 찾지 못하셨어요. 하지만 앰버 양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자를 쫓을 거라고 하셨어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조가 죽지 않았다. 치료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았을 거고, 조의 손가락은 자신이 물어뜯었는데. 하지만 조가 죽지 않고 도망친 덕에 자신이 조를 죽일 일도, 앰버가 조를 죽일 일도 없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이불을 꽉 쥐었다.

모두 잘 된 것이다.

모두.

“꼭 죽여서 입막음을 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꼭이요. 그러면 도련님께 새어 들어갈 일도 없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토비, 앰버보고 그러지 말라고 해…… 제발…….”

“네? 왜요?”

토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을 때였다. 벌컥, 침실 문이 열렸다. 거기엔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케이 하커가 서 있었다.

들었을까? 엘리자베스가 애써 침착한 얼굴로 토비에게 말했다.

“이만 가봐.”

“예, 아가씨.”

토비는 재빠르게 나가려고 했지만 케이가 그를 붙잡았다.

“무슨 얘기를 했지?”

케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토비를 보았다. 토비가 불쌍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다가 얼른 돌아서 케이에게 말했다.

“저…….”

토비가 의심을 살 것 같아 얼른 엘리자베스가 그의 말을 막고 대신 말했다.

“내가 속옷이 좀 부족해서 장에 갈 일 있으면 사다달라고 했어. 그런 것까지 알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토비를 보았다. 그러자 토비가 얼굴을 달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큼…… 알았어. 나가 봐. 숯을 좀 더 가져오고.”

케이는 민망한 얼굴로 말하곤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왔다. 토비는 마지막까지 엘리자베스를 힐끔거리다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끔찍한 혼란 속에서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괜찮아? 정말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냐고? 괜찮을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아니. 괜찮지가 않아.”

엘리자베스는 차마 케이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침대에서 나와서 창가로 걸어갔다. 케이가 물었다.

“많이 아픈가? 당장 마차를 준비하라고 할까? 의료원에라도 가보면…….”

“……내가 학질일 수도 있다며? 미리엄이 얘기해줬어.”

엘리자베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케이의 말을 끝냈다. 그러곤 로킨트 저택의 3층 창문 너머로 로킨트 스트리트를 바라보았다. 과거 자신이 이 야단스럽고 위험한…… 케이 녀석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장소였다.

그때는 매일 밤 자신이 케이를 기다렸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그래서 오늘은 꼭 말할 수 있기를.

‘오늘은 아침을 같이 먹자. 오늘은 싸우지 말자. 오늘은…… 같이 잠들자.’

너의 숨결을 느끼며 잠에 들고 싶어. 눈을 떴을 때 네가 싫어하는 너의 삐뚤어진 코, 탁한 갈색 눈, 갈색 머리카락을 가장 먼저 보고 싶어.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무너져가는 왕정이나 귀족 따윈 관심 없어. 나한테는 네가 케이 하커가 아니라 케이인 편이 더 좋아.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오로지 너 하나뿐이야.

이렇게 말하기 위해 케이가 자신과 케이의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은 케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케이가 기다리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가슴 속에서 이는 폭풍을 느끼며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침대 기둥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천한 노동자들이나 걸리는 병에 내가 걸리다니. 지저분해. 더럽고, 천박해.”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았다. 케이의 탁한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게 더러운 사생아 새끼랑 어울린 벌일지도 모르지. 케이 하커. 아버지 말처럼 더러운 것들이랑 같이 있으면 더러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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