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44화
또 꿈이다.
엘리자베스는 비릿한 화약 냄새를 맡았을 때 직감했다.
또, 또 꿈인 것이다.
물론 확실한 것은 목소리를 내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 그 망할 조국! 엘우드 밀! 넌 조국을 위해 영혼도 팔아먹겠지!”
성난 목소리가 엘리자베스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몰록에게서 들었던 목소리이며, 엘리자베스가 늘 꿈속에서 듣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늘 개연성이 뒤죽박죽이거나 감각이 뚜렷하지 않았던 지난 꿈들과 달리 이번 꿈은 이상하리만큼 생생했다. 특히나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있는 하얀 피부에 엘프 같은 외양을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말이다.
‘엘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그 남자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엘우드 밀은 어깨선과 허리선이 딱 떨어지는 하얀 옷을 입고 하얀 모자를 쓰고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뒤에는 기괴한 표식이 그려진 휘장이 걸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어떤 가문, 혹은 어떤 왕실의 표식인가 싶어 유심히 보았지만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에는 없는 것이었다.
엘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고 다만 미간에 살짝 생긴 주름만이 그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엘우드 밀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국은 우리의 전부다. 조국을 위협하는 간악한 무리들을 말살시키고 조국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전부인 조국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엘우드 밀의 눈에는 영혼이라는 게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를 알았다. 조금 천방지축이고 고집스럽고 반사회적이지만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숨겨져 있었다.
엘은 위험에 처한 자신을 모르는 척하지 못했으며 자신을 신고해 엄청난 금화를 얻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빈민들과 귀족의 목숨을 다른 저울로 재지 않았다.
그게 엘이었다.
이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당연한 거다. 간악한 무리가 조국을 해치려고 드는데 조금의 피눈물도 흘리지 않을 생각이었나? 지금 조국은 위험에 빠져 있어!”
엘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지금의 엘처럼 말하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클레몬트 공작에게는 가문만이 모든 것이었고, 그는 가문을 위해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아는 엘은 그는 분명 아버지보다는 똑똑한 인간이었다.
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동작에는 엘리자베스가 아는 무디고 어리바리한 구석은 없었고 군인처럼 딱딱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 포로들은 조국을 팔아먹으려고 한 자들이다. 그들이 어찌되든 너랑 무슨 상관이지? 반역자가 되고 싶은 거냐?”
“그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야. 알잖아! 제발 이러지 마. 형…….”
형? 엘리자베스는 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호칭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다음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짝!
거센 마찰음과 함께 엘리자베스의 목이 돌아갔다.
그 순간, 방 한구석에 있던 거울이 눈에 우연히 들어왔다.
거기엔 자신이 있었다.
하얀 얼굴, 밝은 금발, 밝은 초록색 눈을 한 엘프와 비슷한 얼굴의 남자가.
“고개 들어, 디트리히 폰 동무.”
그때 차가운 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트리히 폰.
이 꿈이 깨어나도 그 이름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무의식중에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디트리히 폰…….”
엘리자베스는 눈을 떴다.
* * *
“허억…… 헉…… 헉…….”
엘리자베스가 부드러운 침구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가장 먼저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디트리히 폰!”
잊어버리지 않았어.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이 놀라워서 얼른 방에 있는 거울을 찾았다. 얼른 몸을 일으켜 그 거울 앞으로 갔다.
거기엔 길고 착 가라앉은 곱슬머리를 한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자신의 푸른 눈이.
엘리자베스는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토악질처럼 깊은 숨을 뱉어냈다.
“흐윽…… 흑…….”
그녀는 그제야 방 안의 사물들을 눈에 담았다. 크고 넓은 침대, 화려한 캐노피, 그에 어울리지 않게 담백한 카펫과 집 안 장식들.
엘리자베스는 그 부조화의 이유를 알았다. 로버트 하커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며 큰 침대를 선물했지만 막상 케이 하커는 자신의 저택에 있는 물건을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부침실을 꾸미고 싶으면 알아서 꾸며.’
그렇게 말했었던가…….
엘리자베스는 이곳이 로킨트 저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다. 미리엄은?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준비해놨을 것 같은 얇은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 손님용 침실이 있는 방을 향했다. 문고리를 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미리엄은 이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의료원으로 옮겨져서 의식을 회복하고 괜찮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만…….
엘리자베스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을 열었다.
침실 안에서 열기와 습기가 뻗쳐 나왔다. 그리고 아픈 환자들이 기침을 할 때 나는 고름 냄새도. 그 냄새와 습기, 열기 사이에서 서서 겉옷을 껴입던 미리엄이 고개를 돌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아가씨. 좀 괜찮수?”
미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노랗게 부식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걸어갔다.
“괜찮냐구요? 누가요? 내가요?”
엘리자베스는 혼자 서서 옷까지 입는 미리엄을 보며 원망스레 물었다. 미리엄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얼굴이 굳어져서는 뒤로 물러났다.
“훠이, 훠이. 가까이 오지 마슈.”
“왜…… 왜요?”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자신이 조의 손가락을 뜯어놓은 것때문인가 싶어서 당혹스러워졌다.
“어젯밤에 많이 아팠다면서요. 열이 펄펄 끓고 몇 번이나 토하고 그러다가 결국 발작도 있었다는데.”
“아…… 그랬어요?”
“그래요. 그래서 케이가 아주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난리도 아니었소. 의원이 병명을 모르겠다고 하니까 결국은 주먹까지 먹여서 그 의원이 집에 가버렸지 뭐요. 그래서 밤중에 새로 의원을 구해오고 뭐 하고…….”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을 보러 온 의원한테요?”
그 멍청한 자식. 엘리자베스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미리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겉옷 단추를 채웠다.
그런데 미리엄은 왜 겉옷을 입는 거지? 아직 밖으로 나다닐만한 몸 상태가 아닐 텐데.
“보면 알잖수? 이젠 괜찮아요. 쌩쌩해졌다니까.”
“뭐요?”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겉옷 위에 목도리까지 두르기 시작한 미리엄을 보았다. 그러곤 서둘러 그의 손을 잡아 말렸다. 그러자 미리엄이 그녀의 손을 툭 쳐냈다.
“에헤이! 건드리지 말라니까! 의사 말로는 당신이 나한테 학질이 옮은 걸지도 모른다고 했소!”
“난 학질이 아니에요! 그 말을 설마 케이 하커가 믿은 건 아니죠?”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미리엄이 코웃음을 쳤다.
“그 자식이야 내가 이 집을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했지만 당신이 아프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소? 아가씨는 귀족이잖소!”
그럼 지금 미리엄이 케이 몰래 이 집을 빠져나가겠다는 건가?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미리엄의 앞을 막아서며 두 팔을 벌렸다.
“나는 귀족이지만 당신은 케이의 친구에요! 당신이 몰래 이 집을 빠져나가게 둘 순 없죠. 미리엄, 이러지 마요. 아내 생각을 해야죠. 아내는 어디에 갔어요?”
엘리자베스가 서둘러 주변을 보았다.
미리엄은 아내 얘기가 나오자 얼굴을 굳혔다. 미리엄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셜리는 처가에 갔소. 처가가 농장을 하니까 거기서 돼지라도 먹이고 청소라도 잘하면 먹여는 줄 거요.”
“원래 집은요?”
“거기선 쫓겨났지. 이미 일주일마다 내는 세를 밀린데다 내가 병까지 걸렸다고 하니 앞으로 세를 낼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당연한 거 아니오?”
미리엄은 이제는 짜증스럽기까지 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람이 겨우 며칠 아팠다고 해서 방을 빼버린단 말인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에 있나!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당장 갈 데도 없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딜 간다는 거예요!”
“공장에! 거긴 아직 내 자리를 빼지 않았을 테니까 거기 가서 일을 하고 사무실 한구석에서 잠을 자야지. 그러는 자들이 많아! 나야 케이 덕에 길거리에 나앉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뿐이지.”
“케이한테 좀 신세를 진다고 해서 나빠질 것도 없잖아요. 아픈 당신이 길거리로 나앉으면 케이가 마음이 어떨 거 같아요.”
“하루 이틀 취해서 해롱거리다가 말겠지. 하지만 당신이 아프면 케이는 사람을 다섯쯤은 죽이고 자기 머리에도 총을 갈겨댈 거요. 그리고 어차피 여기에 남아 있는다고 해서 나을 수도 없지 않소. 학질 치료제는 높으신 양반들이나 구할 수 있다던데.”
그렇지 않아. 케이 하커는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케이 하커는 그러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에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조를 물었고, 치료제는 마지막 하나 남았다. 마지막으로 걸 수 있는 희망이라면 앰버 플래스가 조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려 조가 치료제가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을 거라는 것인데. 엘리자베스는 차마 그런 희망은 찾지 않기로 했다.
남의 목숨을 내 목숨 대신 거둬달라는 기도 같은 건 하는 게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건 신이 알아서 하게 두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데에 집중했다. 전생에서도 케이는 내가 죽었다는 얘기를, 내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어도 꿋꿋하게 살았었다.
주식회사를 만들고 하커 공장을 세계적으로 키워서 신문에도 났고…… 그리고…….
그래, 어쩌면 앰버 플래스까지도 구해내 함께 켈토로 갔을 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붉은 머리의 여자는 뜨거운 심장으로 케이를 매혹시켰을 것이다. 두 사람은 바다 건너의 거대한 대륙에서, 귀족도 왕족도 없는 곳에서, 그 누구도 창부의 딸이라고, 혹은 천한 자본가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는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괴물 같은 건 없는 땅에서 영원히 함께 행복하게.
엘리자베스는 가슴 속에 치미는 슬픔 같은 건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원래 이렇게 되기로 했던 거 아닌가. 엘 선생이 억지로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자신을 과거로 보내주었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다.
마차는 앞의 마차들이 남긴 궤적을 따라 도랑에 빠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인생도 그렇다. 하지만…….
“미리엄. 정말 죽을 각오에요? 정말로 목숨을 걸어보고 싶을 정도냐구요.”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목도리를 쥐었다. 미리엄과 엘리자베스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미리엄의 표정이 굳었다.
“왜, 왜 이래요.”
하지만 미리엄은 다를 수도 있다. 미리엄만은 살아남을 수도 있다.
“내가 위험한 제안을 하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요? 내가 당신을 살릴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은 길을 알고 있다고 하면?”
그래서 미리엄의 인생이 도랑을 빠져나간다면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이 빌어먹을 운명의 길에서 뭔가는 뒤바꾸고 간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