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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43화 (4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43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이었던 것들.

엘리자베스는 몰록의 붉은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마주한 순간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는 괴물이 되느니 사람으로 죽을 거야. 날 죽여. 엘.’

꿈속의 자신에게서 나온 목소리지만 자신이 아니었던 목소리. 그건 뭐였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을 할 시간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질척거리는 리오든 뒷골목의 땅에 주저앉은 채로 몰록을 노려보았다.

총도 없고 칼도 없다. 엘 선생이 전생에서 자신에게 주었던 것 같은 특별한 물질을 바른 총알? 그딴 건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소리를 질러서 토비를 불러야 할까? 토비가 저놈의 발톱에 당할지도 모르는데?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클레몬트 공작은 엘리자베스가 책 속의 세상 밖에 모르는 바보라서 굼뜨고 아둔하다고 말했다.

‘좋은 혼처를 찾아 제때에 결혼하지 못하면 가문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거다, 이 멍청한 것. 그리고 가문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너의 가장 큰 무기를 잃는 셈이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클레몬트라는 이름은 너의 유일한 무기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클레몬트 공작은 신문도 읽지 않았고 책도 읽지 않았다. 공작은 국왕이 보내는 서신이나 심복의 말, 그리고 사교계에서 공작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목소리만을 들었다. 아버지는 진짜 세상은 그런 곳에 있다고 믿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지만 아버지의 말은 틀렸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의 가장 큰 무기는 빠른 판단력과 행동력에 있었다.

“크으으…….”

놈의 짐승소리가 뒷골목 전체를 울렸다. 건물 천장 위에 올라타 있던 놈이 단숨에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엘리자베스는 토비를 부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뛰었다. 놈이 착지 후에 자세를 잡는 그 짧은 시간을 틈타, 놈에게 썩은 오크 술통을 집어던졌다.

“크르르!”

놈은 주먹으로 그것을 부숴버렸다. 파편이 이곳저곳으로 튀었다. 엘리자베스는 파편 중 하나를 집어들고 딱 붙는 드레스를 찢어버렸다.

엘리자베스는 뛰었다.

질문 하나. 몰록은 수영을 할 줄 알까?

엘리자베스는 뒷골목에 막힌 곳이 없다면 솔치노 스트리트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길을 택한다면 하일 강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일 강에 뛰어든다면? 그런데 저 괴물이 수영을 할 줄 안다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엘 선생은 몰록이 어둠 속에서도 좋은 시력을 유지하는 대신에 빛을 가까이하면 장님이 되고 머리가 좋다고 했다. 하일 강 근처에는 리오든 경찰청에서 치안을 이유로 대대적으로 설치한 가로등이 있고 도개교를 관리하는 병사들이 있다. 빛을 싫어하고 머리가 좋은 놈이라면 싫어할 만한 조건이었다.

질문 둘. 무기 하나 없는 토비와 잘 무장된 병사 여럿 중 누가 몰록에게 다치지 않을 가능성이 클까?

그거야 당연히 후자였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 셋. 그때까지 몰록에게 따라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결국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솔치노에서 하일 강까지는 뛰어서 간다면 7분 정도 거리였다. 운이 따라준다면 나쁘지 않은 도박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걸음이 가벼워. 몸이…… 날아다니는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뛰었다. 평소의 엘리자베스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닿는 건물과 술통들, 바닥이 멀어져갔다.

대체 왜 이렇게 빠른 거지.

거대한 폭풍이 자신의 몸을 자꾸만 떠미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좁은 길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동안 힐끔힐끔 뒤를 돌아볼 때마다 좁아터진 건물 사이의 하늘로 거구의 하얀 털뭉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쿵.

쿵.

그때마다 몰록의 발아래에서 건물 지붕이 큰 소리를 내며 조금씩 부서졌다.

아까 그건 우박이 아니었던 것이다.

몰록은 틈틈이 아래를 보면서 엘리자베스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빨리 달아나고 있는데도 조금도 엘리자베스에게서 흥미를 잃지 않은 눈치였다.

남부의 수녀원에서 엘리자베스를 마주치고도 그냥 놔준 채 도망쳤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왜?

왜 이번에는 몰록에게 엘리자베스가 놓치면 안 되는 표적이 되었단 말인가.

“헉……헉…….”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 순간, 저 멀리서 하일 강으로 추정되는 빛무리가 보였다.

조금만 더 달리면…….

조금만 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귓가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넌 괴물이야. 너도 괴물이야.’

엘리자베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엘리자베스의 걸음이 느려졌다.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뒤를 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건물 사이의 틈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민 몰록이 엘리자베스를 붉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괴물이고.’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가 꿈에서 들었던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목소리가 저 몰록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몰록을 보았다.

‘알고 있지 않나. 같이 가자. 너의 피 냄새를 맡고 왔다. 동족이여.’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제 손을 바라보았다. 거스러미 때문에 흘러내렸던 피가 굳어 딱딱하게 딱지가 앉은 게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상처가 아문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등 뒤에 있는 하일 강을 보았다.

강까지의 거리를 어떻게 1분도 안 되어 가로질러 왔고?

몰록은 엘리자베스가 뒤로 물러나는 데도 위협적인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고 가만히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몰록이 조금씩 엘리자베스에게로 가까이 손을 내밀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살점과 피가 엉긴 손톱이 엘리자베스에게로 다가왔다. 더러운 피 냄새가 기이하게도 달콤하게 엘리자베스를 괴롭혔다.

‘맛있을 거다.’

맛있을 거라고? 방금…… 무슨 말을…….

엘리자베스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그 말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아니, 그 말을 의심해보려고 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배 속을 가득 채우는 허기를, 어떻게든 부정해보려고 노력은 했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몰록의 손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몰록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베어버릴 수도 있는 거리였으나 몰록은 그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몰록의 손톱에 묻은 피를 제 손바닥에 묻힐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그 피를 들여다보는 것을 끝까지 응시했다.

이걸 입에 가져가서는 안 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쪽 손을 꽉 쥐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배가 고팠으니까.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끼이이!”

몰록이 비명을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지붕 위의 몰록을 보았다. 몰록은 뒤를 보며 화들짝 더 높은 지붕 위로 올라갔다. 몰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곧 골목 끝에 있는 로브를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습니까? 거기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내는 천천히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어쩔 줄 모르며 중얼거렸다.

“엘 선생님……?”

엘리자베스의 말에 흠칫, 사내가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로부터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몸속에 꿈틀거리는 혈관들 때문에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주저앉았다.

“엘 선생님…….”

그러자 남자가 서둘러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와 엘리자베스를 부축했다. 그 탓에 사내의 후드가 벗겨졌다. 사내의 후드 아래에 있는 얼굴은 살집이 좀 있는 평범한 농부의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어디 다쳤어요? 저 괴물이 피를 냈냐는 말입니다.”

“아뇨, 아닌데요.”

엘리자베스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사내를 보았다. 이 남자는 누구지?

“당신…… 당신은…….”

“그런데 방금 우리 선생님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자베스는 헐떡거리며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 선생님을 아는 분이군요. 그럼 설마 저 괴물도 아십니까? 리오든 북부까지 넘어오는 놈이 아닌데 오늘은 무척이나 이상하더군요.”

사내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헐벗은 몸을 살폈다. 이 와중에도 엘리자베스의 맨살에 손이 닿는 것은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럼 혹시 저도 아시나요? 제 이름은 조입니다. 선생님의 조수죠. 젠장할!”

조라고? 엘리자베스는 끔찍한 현기증과 귓가를 둥둥 울려대는 심박소리 속에서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조. 엘리자베스는 그의 얼굴은 처음 보았지만 목소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 손가락을 잃었다며 흐느끼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날 그녀는 엘 선생의 조수가 되기로 했었다.

그때 조가 자신의 가죽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그것을 뒤집어서 웬 초록색 액체와 깨진 유리 파편을 꺼냈다.

“치료제가 깨지다니. 두 개 밖에 안 남은 거랬는데, 야단났네! 정말 다친 데 없어요, 아가씨? 네?”

엘리자베스는 손발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뭔가를 말해보려고 했다. 눈이 자꾸만 몰록이 자신에게 묻혀준 피로 향하고, 혀가 그곳을 핥으려는 것을 막을 힘만 비축했다면 분명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 당신 지금 손가락이 몇 개야. 마지막 남은 치료제는 어디에 있어. 나를 엘 선생에게로 데려가, 이 망할 자식아.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조가 축축이 젖은 가죽 주머니를 털어내는 사이에 자신의 손바닥을 핥았다.

끈적한 피는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달콤했다. 앰버가 오늘 주문해준 에그크림처럼 부드럽게 입안과 목구멍 안을 적셨다.

맛있어.

젠장할. 너무 맛있어.

더 먹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에게 드는 혐오감을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기며 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의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그러나 다섯을 세기 직전에 엘리자베스의 사고 회로가 멈췄다.

“으아아악!”

조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가 조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조가 사력을 다해 엘리자베스를 밀어냈다. 엘리자베스의 몸은 대로 쪽으로 밀려났다.

조가 울먹거렸다.

“내 손가락…… 내 손가락…….”

엘리자베스가 조의 사정 따위는 상관없이 다시 조에게 달려들려고 할 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에 따뜻한 모포를 둘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았다. 거기엔 헐벗은 엘리자베스에게 모포를 씌워준 토비와, 총을 든 앰버가 서 있었다. 앰버는 조를 향해 총을 겨누고 말했다.

“개 같은 자식. 죽어버려!”

총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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