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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42화 (4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42화

“……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서.”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케이는 코웃음을 치며 엘리자베스를 놔주었다. 반동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지자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티 나지 않게 몰아쉬었다.

“나도 예쁜 게 좋다니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난간을 쥐었다. 난간을 쥔 손등 위에는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왔지만 엘리자베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넌 머저리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쳐다보며 웃었다.

“개자식에…… 이젠 머저리에…… 다음은 뭐가 될는지…….”

“비앙카가 그랬어. 여자가 기회를 주는데도 잡지 못하는 남자는 머저리라고. 그리고 난 기회를 줬잖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로킨트 저택에서의 짧고 강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니, 그뿐이랴. 칼몽 여관에서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침대를 썼고 엘리자베스는 아무 일도 없이 아침을 맞았다. 무슨 일이 있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케이는 그날도 분명 저렇게 뜨거운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의 가슴이나 엉덩이나, 더 아래쪽에 절대로 닿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몸을 단단히 안고만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결벽증적인 태도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면서 다행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머저리는 머저리인 거다.

“그딴 말로 나를 꿰어내지 마. 난 그런 하찮은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아.”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또 한 모금 마셨다. 목이 타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왜 널 도발하겠어? 난 널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데.”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말투를 흉내 내며 비꼬아 말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옆얼굴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넌 노동자 말투를 흉내 내는 데는 소질이 없어.”

“난 노동자 말투를 흉내 내는 게 아니야. 네 말투를 흉내 내는 거지.”

“어느 쪽이든.”

케이의 목소리가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엘리자베스가 옆을 보았다. 길고 화려한 목걸이와 귀걸이를 한 엘리자베스의 옆선이 케이에게 한 눈에 들어왔다.

붉은 드레스는 그녀의 희디 흰 피부에 잘 어울렸고 그녀의 어깨는…….

그건,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케이는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신사고, 자신이 이곳의 무희였다면 케이는 분명 엘리자베스에게 매달렸을 것이다.

제 몸과 마음을 조각내고 이어붙일 생각도 없이 도망가도 좋다고. 절대로 책임 같은 건 지지 않아도 되니까 제발 나를 상처 입혀 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빌어먹을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내가 예뻐?”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예쁜 게 좋다, 는 케이의 말에 이제야 반응한 것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당연하지. 넌 피부도 희고 머리는 금발에 부드럽고 눈은 푸른색이잖아. 넌 대축일에 가난한 애들이 계란이나 얻어먹으려고 교회에 가면 볼 수 있는 성화 속 공주님처럼 생겼어. 감히 어리고 천박한 것들이 더러운 떼가 낀 손으로 건드렸다가는 손가락이 잘릴 그림 말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손을 잡았다. 케이의 거칠고 투박한 피부에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손가락들이 닿았다. 케이는 그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을 진정한 머저리라고 여겼다. 이 사실을 미리엄이 알게 된다면 미리엄은 케이를 한 평생 놀릴 것이다. 물론 미리엄이 병상에서 일어난다면 말이지만. 케이는 제 거친 숨을 들키기 전에 엘리자베스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난 피부는 탁하고 머리는 푸석푸석한 갈색에 눈동자도 갈색이야. 탁하지. 전부. 잡종이라는 뜻이야.”

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자베스를 최대한 낮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같은 거랑 어울려서 우리 사이에…….”

“공작가의 사생아라도 태어나면 큰일이라는 뜻이야?”

엘리자베스는 눈을 치켜떴다.

“멍청이.”

“이젠 멍청이가 추가됐군!”

케이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엘리자베스를 지나쳐 다른 발코니로 옮겨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졸졸 쫓아가며 말했다.

“넌 무희가 아니야. 나는 신사도 아니고. 나는 널 사려고 했던 게 아니라…….”

케이가 우뚝 멈춰 섰다. 막다른 곳이었다. 아니, 막다른 곳은 아니고 엘리베이터 입구가 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힘으로는 돌릴 수 없는 손잡이를 돌려 엘리베이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탁한 갈색 눈동자로 엘리자베스의 신비한 푸른 눈을 보았다.

“널 사랑하고 싶었던 거야. 개 같은 머저리 멍청아.”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케이는 짧은 꿈을 꿨다. 그대로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삼키고 붉은 드레스를 뜯어내고 그 안에 있는 흰 피부를…….

그때, 천장 위에 무언가 무거운 게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쿵!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동시에 위를 보았다.

“방금 무슨 소리…….”

엘리자베스가 말하려고 할 때 발코니 아래에서 앰버 플래스의 노래가 막 끝났다.

신사들의 박수소리가 홀을 잔뜩 채웠다. 저급한 말을 얹거나 휘파람을 부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앰버 플래스에게 완전히 매료된 얼굴로, 그녀의 허스키한 음성이 잠시 그들을 데려간 천국을 잊지 못한 듯 오페라 하우스에서나 그럴 것 같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이들의 얼굴을 보다가 케이와 함께 짧게 박수를 쳤다. 엘리자베스는 수많은 신사들의 앞에서 관대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앰버를 내려다보았다.

총을 가지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엘리자베스가 본 일이 있는 총이었다. 위험하고 아름다운 총신이었지만 앰버를 지켜줄 만큼 강하지는 않은 무기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심하게 감정이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케이에게 말했다.

“방금 이상한 소리, 들었어?”

케이가 막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앰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솔라티오를 만나면 홀 보수를 서두르라고 충고하겠지만 그 자식은 내 말 따윈 듣지 않을 거야. 오늘은 로킨트 저택에서 자. 내일 또 어디로 가든 간에 그 더러운 여관에서 하룻밤 더 재우는 건 용납 불가야.”

케이는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또 갓 잡은 다람쥐처럼 파르르 떨면서 화를 낼 거라고 여겼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다시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박인가……?”

“우박?”

케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오든에서는 우박 같은 건 안 와.”

“그런가? 하긴 리오든에서 우박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쉐필드에서는 종종 있었어. 새끼 양 한 마리가 잘못 나갔다가 우박을 맞아 죽은 것도 봤어.”

“쉐필드가 리오든보다 남쪽 아니던가?”

“그렇긴 해도 쉐필드는 더 내륙이니까. 겨울엔 더 춥고 여름엔 더 더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그녀를 잠시 가만히 응시했다.

“쉐필드가 그리워?”

쉐필드가 그립냐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이 우습다고 여겼다.

“거긴 리오든처럼 사계절 내내 우중충한데다 더럽고 냄새나고 시끄럽지 않았을 거잖아. 널 모실 농노들도 충분했을 거고.”

“그리고 나를 때리는 아버지와 나를 가두는 어머니와 나만 보면 겁에 질리는 가정교사도 충분히 있었지,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담담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그러자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를 클레몬트 타운하우스에서 데리고 왔을 때와 같은 성난 얼굴이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케이의 가슴속에 불꽃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케이는 분노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있던 상처가 없어졌다는 것 말이다. 비앙카의 그 뛰어난 분장술로 지운 걸까?

케이가 물어보려고 입을 연 순간에 엘리베이터가 제 멋대로 움직였다. 드르륵거리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거기에서 토비가 내렸다. 토비는 엘리자베스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엘리자베스의 차림새와 흰 어깨를 보곤 얼굴을 붉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가리듯 서서 토비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도련님. 저택에 계신 친구 분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답니다. 메리 아줌마가 직접 왔어요. 홀에 왔다가 지금은 의원을 부르러 가셨구요. 혹시…….”

토비의 말을 듣는 케이의 얼굴이 시시각각 무서워졌으므로 겁이 없는 마부 소년조차도 살짝 떨며 다음 말을 전했다.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인사는 하셔야 되는 거 아니냐고…… 메리가…….”

케이는 이를 악물곤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서둘러 말했다.

“코트를 입고 가. 분장실에 있어. 내가…….”

“코트는 네가 입고 가야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나는 테시톤과 타고 온 마차를 타고 다른 의원에게 들렀다가 갈 거야. 넌 토비가 모는 마차를 타고 가. 알겠지? 제발…….”

케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그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목덜미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자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조심해서 가.”

케이가 대답했다.

“집에서 보자.”

집에서 보자.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울림을 남기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분장실로 향했다.

* * *

엘리자베스가 밖으로 나온 건 신사들이 썰물처럼 밖으로 휩쓸려 나가거나, 아니면 홀 내부의 밀실 같은 곳으로 삼삼오오 스며들어 후문이 텅 비었을 때였다. 물론 몇몇은 술에 취한 채 담배를 피우며 낄낄거리고 있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를 알아볼 만큼 정신이 박혀 있는 이는 없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토비와 함께 옆에 있는 가게로 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하커 가문의 문양이 박힌 마차가 있었다. 토비는 마차 위에서 졸고 있는 늙은 남자에게 말했다.

“맡아줘서 고맙수! 이제 내리슈!”

토비의 말에 늙은 남자가 퍼뜩 깨어나더니 토비를 보았다.

“안 졸았어. 나 안 졸았다고…….”

“알았다고. 내리라고!”

토비가 소리를 지르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그 광경으로부터 살짝 떨어져서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뒤에 있는 더러운 골목에서 쥐가 한 마리 튀어나오기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뒤로 물러나다가 골목에 있는 버려진 술통에 걸려 넘어졌다.

“아!”

엘리자베스가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른 손을 보았다. 오래된 술통의 거스러미가 손가락에 박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그것을 뽑아내자 피가 주르륵 흘렀다.

비릿한 냄새. 이상할 정도로 피 냄새가 강렬하게 자신의 코를 쑤셔왔다. 엘리자베스가 멀쩡한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지만 토악질은 그 사이로도 새어나왔다. 엘리자베스가 주저앉아 시큼한 물을 쏟아냈다.

얼마나 그랬을까. 컥컥거리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으로 침잠된 골목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짐승도, 인간도 아닌 것의 소리.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그게 뭔지 보기도 전에 알았다. 하지만 그 괴물의 붉은 눈을 보았을 때는 더 확실히 알았다.

“……몰록…….”

엘리자베스가 붉은 눈과 조우한 순간, 그것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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