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41화
케이 하커가 켄드릭을 마차를 잡아 배웅하기로 한 사이에 엘리자베스는 분장실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깨끗하게 씻긴 엘리자베스를 조명 앞에 앉혀놓고 여자들은 그녀를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의 배우처럼 화장시키기 시작했다. 인형 옷을 입히는 어린 여자애들처럼 그녀들은 행복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눈으로 비앙카를 보며 물었다.
“켄드릭한테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진 않죠.”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비앙카는 엘리자베스의 뺨에 바를 분홍색 분을 붓에 묻히며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솔라티오가 또 날 쥐 잡듯이 잡을 테니까요. 하지만 켄드릭은 홀에 다시는 못 들어올 거예요.”
뒤에 있던 다른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켄드릭 하커는 저번에도 셀리 손가락을 부러뜨렸어요. 비앙카가 못 참을 정도면 앰버도 못 참는 거고, 앰버가 못 참으면 솔라티오는 앰버를 막을 수 없어요.”
“솔라티오가 이 홀의 주인이라면서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비앙카가 코웃음을 쳤다.
“주인이 모든 걸 맘대로 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공녀님의 삼촌은 이 나라의 주인이니 이 나라를 맘대로 해야 될 텐데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비앙카를 보았다. 국왕을 모욕하다니.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아버지가 어디선가 나타날 것 같아서 두려움에 떨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차분해진 기분으로 비앙카를 보았다. 비앙카는 씨익 웃으면서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분을 바르기 시작했다.
“천하의 로버트 하커라고 해도 제 아들이 솔치노 스트리트에서 쫓겨난 걸 가지고 뭘 어쩌겠어요? 바보 같은 남자들. 놈들은 여자한테 맞은 게 창피해서 집에 가서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할 거예요.”
“정말 막 나가는군요.”
앰버 플래스의 여자들이라니.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케이의 공녀님이라니. 난 케이 하커한테 드디어 정부가 생긴 줄 알았죠. 우리 귀여운 꼬마 소년이 너무 수절을 하고 다녀서 다들 걱정이 많았다니까요. 혹시 어디에 문제가 있나 하고.”
비앙카의 말에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수, 수절이라뇨. 말이 너무 부적절하네요!”
엘리자베스의 항변에도 비앙카는 그저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주인 아가씨.”
명백한 조롱조에 엘리자베스가 비앙카를 노려보았다. 비앙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자베스는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았다. 머리는 아래로 길게 땋아 내리고 어깨는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드러낸, 비앙카가 빌려준 실크 드레스 차림의 제 모습을 말이다.
“이렇게 입고 어떻게 집에 가요? 지금은 겨울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비앙카가 대답했다.
“케이가 당신을 따뜻하게 해줄 거예요. 장담하죠. 케이 하커의 아까 눈빛을 봐서는 당신이 땅을 밟고 다니게 두지도 않을 것 같았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이, 밖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앰버 플래스의 노래 소리였다.
* * *
엘리자베스가 홀린 듯이 밖으로 나가자 발코니 아래로 거대한 홀에서 노래하는 앰버 플래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신사들이 위스키 잔을 채우고 시가를 피우며 젠체하는 표정으로 앰버를 응시했다. 조명 아래에 있는 앰버가 조각상이라도 된다는 듯이 마음껏 평가하고 깔아뭉갰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등 뒤에 있는 밴드를 보며 로킨트에서의 그녀를 떠올렸다. 로킨트 펍의 모두에게 추앙받던 앰버 플래스를.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슬픈 눈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화염이 서부를 삼키고, 서부로 간 그 사내.
거대한 화염이 서부를 삼키니, 그 사내는 사라져버렸네.
그가 보낸 편지만이 남았는데 답장할 주소가 사라져버렸네.
“그렇게 입고 어떻게 밖에 나간다는 거야?”
엘리자베스가 감상에 빠져 있을 때 뒤에서 케이가 다가왔다. 엘리자베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케이가 걸음을 멈췄다. 케이의 시선이 엘리자베스의 하얀 목덜미, 어깨, 그리고 다시 올라가 붉게 칠한 입술에 머물렀다. 케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앙카…….”
케이가 그녀의 뒤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자 이내 비앙카와 여자들이 우르르 분장실을 나와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화난 옆모습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저 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자와 자신을 비교하면 자신이 얼마나 어린 아이처럼 보일지.
엘리자베스는 헛기침을 했다. 케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케이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켄드릭은?”
“알아서 잘 닥치게 해서 마차에 실었어. 하지만 오늘 사고 친 덕에 국왕 폐하의 영명일에는 우리가 꼭 가야 될 거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로부터 가장 먼 난간에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케이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앰버 플래스에게 고정되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의 내부에서 자신감이 사그라져갔다. 비앙카는 이 드레스를 입으면 케이 하커도 껌뻑 죽을 거라고 했는데…….
“축일까지 이틀이나 남았어. 우리 결혼식까진 일주일 밖에 안 남았고.”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가 대답했다.
“결혼식 전날까지도 결혼식장에 들어갈 것처럼 굴어야만 해. 괜히 잘못 걸렸다가는 넌 이오페아 대륙에서 영원히 엘리자베스 하커로 살 거야. 그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어차피 그럴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6개월 후면 클레몬트 공작부부는 처형되고 엘리자베스는 반역자의 딸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건…….
엘리자베스의 몸이 천천히 그녀의 영혼을 죽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케이가 앰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우리 귀족 아가씨가 그 부분에 있어서는 현실적이라니…… 정말 다행이야.”
동부의 선착장에는 그의 애인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데.
편지를 쓸 주소는 없어지고 그의 시신도 사라졌네.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할 게 있어. 너한테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할 것도 있고. 도움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로 걸어가서 왜인지 자꾸만 자신의 눈을 피하는 케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칼몽 여관에 네가 준 3만 오천 세르크짜리 수표를 보관하고 있어.”
리오든에 첫눈이 오던 날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준 것이었다. 켈토로 가는 배편과 함께.
3만 오천 세르크는 그레이트 레본 돈으로 치면 2만 파운트였다. 케이는 기어코 자신에게 2만 파운트를 주려고 한 것이었다.
“가져가라고 했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쪽으로 그제야 몸을 돌렸다. 케이는 오만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깔아뭉갤 준비를 하고 그녀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케이가 어떨 때 저런 눈빛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제 속내를 보여주기 싫을 때다.
“나도 너한테 도로 가져가라고 했잖아.”
엘리자베스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세르크로는 레본에서 아무것도 못해.”
“뭐?”
“파운트로 줘. 당장 그 돈을 써야 해. 네 공장에 있는 작은 염료 실험실도 내어주고.”
“이제 나한테 명령을 하네?”
케이가 비릿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케이와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계획을 수정했다. 엘우드를 찾고, 그 다음에 케이를 설득하는 것으로. 그 전에는…….
“네가 만약에 실험실을 내어주고 돈을 주면 일주일 후에 켈토로 가는 배를 탈게. 꼭 그렇게 하겠어.”
그저 케이를 속여 넘기면 그만이었다.
케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한걸음 더 다가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마치 숲 속에서 위험한 포식자를 만난 정찰대 같은 행동에 엘리자베스가 어이없어 했다.
“그럼 켈토에서는 뭘 하려고? 세르크 한 푼 없이 켈토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줄 알아? 그 잘난 입으로 날 속여 넘길 생각하지마. 켈토는 리오든이 아니야. 여기서야 네 아버지와 핏줄이 너한테 잠잘 곳, 먹을 곳, 쉴 곳을 제공해주지만 거기선 아니라고.”
“켈토에서도 사람들은 아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마를 매만졌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케이의 이마에 엘리자베스의 차가운 손이 닿자 케이가 뒤로 물러났다.
“실험만 성공한다면 켈토에 있는 자들에게도 약을 팔 수 있어.”
“성공한다면, 이지.”
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건방지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의 몸은 엘리자베스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난간에 바짝 기대어 서 있었다.
“이미 성공했을 수도 있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에게 바싹 다가선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기분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길고 몸에 딱 붙는 드레스가 적응이 되지 않은 나머지 휘청거렸다. 케이가 재빨리 엘리자베스의 등허리를 받치지 않았다면 그녀는 넘어졌을 것이었다. 케이는 제 다리로 엘리자베스의 다리를 감고 그녀의 하체와 자신의 하체를 가깝게 붙였다.
“읏……!”
엘리자베스가 신음을 내며 케이의 등 뒤에 있는 벽을 받쳤다. 그 탓에 케이의 가슴팍에 밖에 안 오는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를 지탱하느라고 몸을 낮춘 케이를 덮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신사와 무희들.
엘리자베스는 아까의 상상 속의 모습이 실현된 것 같아 얼굴을 빨갛게 달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케이가 불편한 신음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
케이의 목소리가 무언가에 목마른 사람처럼 갈라졌다. 엘리자베스는 제 아랫배로부터 느껴지는 이 열기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게 지금 케이를 갈증 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것도 알았다.
‘당신이 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보면 미치려고 할 걸요, 케이 하커가. 물론 드레스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엘리자베스는 비앙카의 알쏭달쏭한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 이런 옷을 남자들은 좋아하나 봐. 비앙카 말이 맞았네.”
엘리자베스가 허둥지둥 말하며 케이로부터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케이는 그 말을 듣고는 얄궂은 얼굴을 하더니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랫배를 달구는 열기에 몸을 떨었다. 지난 생에서 엘리자베스가 케이와 동침을 한 게 아무리 적었다고 해도 둘은 부부였다. 새삼스럽게 이런 상황이 창피할 필요도 없지만 굳이 이런 난처한 상황을 오래 지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까 분장실에서는 내내 코트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못 느꼈나 본데 나는 네가 손에 말똥을 묻히고 소년처럼 입고 있을 때부터 내내 이런 상태였어. 넌 내가 어떤 놈인지 전혀 모르는 거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