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40화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을 때 케이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런 사람하고는 친구가 되지. 비앙카처럼 말이야.”
“그 여자랑 친구야?”
엘리자베스는 눈을 치켜떴다.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도 가족도 없이 떠돌아다녔다는 게 공통점이니까. 날 놀려먹는 걸 좋아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내 옆에 네가 없었다면 괜히 내 몸을 더듬는 시늉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뜻이야?”
“네가 홀에 들어왔을 때부터 비앙카를 포함한 모든 무희들과 신사들이 네가 여자라는 걸 알았을 거라는 뜻이지. 나 같은 놈이 널 데리고 들어왔으니 비앙카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거야. 추접한 연기나 하면서.”
“어떻게 알아? 바지도 입고 머리카락도 숨겼는데.”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목구비만 봐도 알아. 널 봐. 넌 피부도 희고 눈은 그려놓은 것처럼 동그랗고 코는 귀엽게 생긴데다 입술은…….”
케이는 말을 하다가 말고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함정으로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또다시 그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케이는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러니 결국 무희들이 관심을 가진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이 홀의 신사들도 그렇고.”
“너는……? 너는 어떤데?”
그렇게 말하는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비 맞은 강아지 같았지만 어딘지 사악하고 악랄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살짝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뒤로 뺐다.
“뭘?”
“비앙카가 그랬다고 해도 넌 다를 지도 모르잖아.”
“아까 말한 취향 얘기야?”
케이는 피식 웃으며 애써 여유로운 척 농담조로 말했다.
“영혼 같은 건 필요 없어. 나도 예쁜 게 좋아.”
“그렇구나. 이 홀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좋다는 거지?”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골똘해졌으므로 케이는 자신의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왜 저딴 고민을 하고 있는 거지? 지금 당장 이 홀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한 사람을 고를 텐데.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케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앰버 플래스! 그 멍청한 년!”
케이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을 금방 판별할 수 있었다.
켄드릭 하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케이는 분장실에 있는 탈의용 가림막 안으로 엘리자베스를 들여놓고 제 몸을 욱여넣었다. 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가발과 코르셋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뒷걸음질 치다가 생쥐의 몸통을 밟았다.
“윽!”
엘리자베스가 비명을 지르자 케이가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덕분에 두 사람의 몸이 더 딱 붙었다. 서로의 옷 아래로 서로의 피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앰버는 패트론 같은 건 두지 않아요. 솔라티오와 처음부터 계약을 맺었다니까요.”
그때, 분장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술에 취한 게 분명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탈의용 가림막 이음새 사이를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여자와 남자. 하나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희였고 하나는 신사처럼 치장한 켄드릭 하커였다.
“흥! 계약은 무슨. 솔라티오랑 붙어먹는 거겠지. 개 같은 년. 붙어먹어도 솔라티오 같은 시정잡배랑 붙어먹다니. 나는 하커 사의 장남이야! 이오페아 어디서든 내 이름만 대면 백지 수표를 내밀고, 군대를 내준다고!”
“군대요?”
여자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여자가 웃자 켄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켄드릭은 분노한 얼굴로 무희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왜 웃는 거지? 내 말이 우스워? 엉?”
무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너한테 돈을 주고, 너한테 농담까지 하고 있다는 거네, 그러니까? 대답해봐!”
엘리자베스는 켄드릭이 무희의 머리채를 잡고 휘두른 통에 무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비앙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케이를 떠밀었지만 케이는 밀리지 않았다. 케이는 무서운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넌 여기에 있는 거야. 넌 고귀한 공녀님이니까 천박한 사람들 일에 낄 이유가 없지. 천박한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 사니까.”
케이가 나지막하게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여자를 때리는 건 불명예스러운 일이야. 미쳤어?”
케이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여기 들어와서 내내 벌레 보듯이 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비앙카는…….”
내가? 내가 언제…….
엘리자베스는 차마 부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아주 잠깐 동안은 그러했는지도 모르니까.
그때였다. 엘리자베스의 발목 위로 생쥐 한 마리가 타고 들어왔다.
“꺄악!”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켄드릭의 움직임이 멎었다.
켄드릭이 한 걸음씩 가림막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며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옷을 벗어. 대신에 내가 가려줄 테니까.”
케이의 말에도 엘리자베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쉴 뿐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케이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엘리자베스의 셔츠를 잡아뜯어버렸다. 그러고는 제 바지 버클도 풀어버렸다.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고개를 돌린 사이 케이는 제 코트로 엘리자베스의 상체를 가린 다음 가림막을 발로 차버렸다.
“이게 누구야? 케이 하커. 너 여기서…….”
켄드릭은 황당한 얼굴로 케이의 코트 자락 안에 숨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쥐새끼처럼 뭐하는 거야.”
케이는 코트로 꽁꽁 둘러싼 엘리자베스를 두고 켄드릭에게로 걸어갔다. 켄드릭이 취해서 비틀거리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케이가 그를 뒤로 떠밀었다.
“씨발! 뭐 하는 거야! 어디다가 손을 대! 이 더러운 사생아 새끼가!”
켄드릭의 말에 케이는 코웃음을 쳤다. 비앙카가 엉망이 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비앙카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비앙카가 얼른 코트로 둘러싸인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왔다.
켄드릭이 케이의 풀린 바지 버클을 보며 낄낄거렸다.
“고귀한 척, 약혼녀한테 신의를 지키는 척하더니 너도 결국 별 수 없구나, 케이 하커. 너 같은 사생아들이나 싸지르고 다니려고?”
켄드릭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코트 안에서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케이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무덤덤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젠 그저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저 표정.
엘리자베스는 당장 코트를 벗어 버리려고 했다. 비앙카가 이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코트 안에 가두지 않았다면 말이다.
“괜한 짓 하지 말아요. 아가씨.”
비앙카는 꿈틀거리는 엘리자베스를 코트로 둘러싼 채 꽉 껴안고 그대로 문을 향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켄드릭이 엘리자베스를 힐끗 보며 이렇게 말하기 전에는 말이다.
“금발이네. 금발 아가씨.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처럼 말이야. 정말 궁금하단 말이야. 앰버 플래스 같은 여자를 두고 왜 그 목석같은 계집애를 좋아하지? 저번에도 내가 엘리자베스에 대해서 한 마디 했다고 날 죽여버리려고 들었잖아. 형제끼리 여자 하나 나눠 쓸 수 있는 건데.”
켄드릭의 말에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켄드릭. 주먹질 한 방에 네가 죽어버릴 수 있었다면 나도 편했을 거야.”
“뭐, 이 개자식아?”
켄드릭이 케이에게 달려들었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뭘 하기 전에 비앙카가 켄드릭의 머리채를 잡았다. 뒷목부터 시작하는 그 짧은 머리채를 잡은 비앙카는 켄드릭을 단숨에 케이 쪽으로 던져버렸다.
“으아아악!”
케이는 손쉽게 켄드릭을 피했다. 켄드릭은 쓰러진 가림막 위에 넘어지며 코를 찧었는지 코피를 흘리며 황당한 눈으로 일어나 비앙카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감히 이 무희 년이 패트론의 머리에 손을 대?”
비앙카는 손에 잡힌 켄드릭의 머리털을 허공에 손쉽게 털어버리며 말했다.
“멍청한 새끼. 앰버 플래스가 계약할 때 이곳의 무희들한테 손을 대는 신사는 경비한테 쫓겨난다는 조항을 넣어달라고 했어.”
“난 하커 가문의 장남이야!”
켄드릭이 분노한 얼굴로 비앙카에게 달려들자 비앙카가 단숨에 켄드릭의 흉부를 걷어 차버렸다. 켄드릭이 쿨럭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난 켄더베리 홀의 무희야. 네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솔치노에서 앰버 플래스의 여자들한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줄 알아?”
켄드릭이 코피를 만지며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였다. 옆방에서 신음소리나 흘리고 있던 무희들이 전부 문 앞에 와서 켄드릭을 구경했다. 캉캉 드레스를 입은 채 엘리자베스를 둘러싸고 희롱했던 이들이었다.
솔라티오가 자신의 여자들이라고 말했던 여자들.
엘리자베스는 그녀들의 눈에 담긴 아까와는 다른 살기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케이의 팔을 잡았다.
케이는 그녀를 제 뒤로 숨겼다.
“이, 이, 씨발년들이…… 씨발…….”
켄드릭이 비틀거 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작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러자 비앙카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너 같은 년 하나 어떻게 한다고 해도 난 하커 가의 장남이야! 너넨 아니고!”
케이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뒤로 밀어내고 켄드릭 앞으로 갔다.
켄드릭의 칼 앞에 서서 케이가 말했다.
“미쳤어? 여기서 칼질하다간 손목이 잘려. 켄드릭.”
“솔라티오한테? 그 새끼가 무슨 힘이 있다고. 멜니아 갱인지 뭔지 하는 새끼들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써. 내가 돈 좀 먹이면 아무 말도…….”
“솔라티오가 아니라 나한테 잘린다는 뜻이야. 멍청이.”
케이가 한 말이 아니었다. 그때 여자들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무희 중 한 명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앰버.”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이 흩날리며 앰버 플래스가 총을 똑바로 겨눈 채 켄드릭을 노려보았다.
“앰버 플래스…….”
켄드릭은 총을 든 앰버를 보며 중얼거렸다. 켄드릭은 총에 시선을 주고 새하얗게 표정이 질렸다가도 애써 허세를 떨며 말했다.
“당신 그거 어떻게 장전하는지…….”
켄드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앰버가 총을 장전했다. 철컥, 하는 차가운 쇠의 소리가 분장실 안에 울려퍼졌다. 앰버는 총을 가볍게 들고 켄드릭의 손을 가리켰다.
“여기서 칼질하다간 나한테 손이 잘려, 켄드릭 하커.”
“날 죽이면 우리 아버지가……!”
“당신 아버지가 그런 걸 알 새도 없지. 절대.”
앰버가 쓱 뒤를 보자 여자들은 차가운 눈동자로 분장실 한쪽에 있던 자루에서 삽과 곡괭이를 꺼냈다. 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이다. 저런 걸 왜 여기다가……?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 비앙카가 앞으로 나왔다.
“그 전에 쥐도 새도 없이 서부 광산에 묻어버리니까.”
비앙카가 말했다. 그걸 본 케이가 고개를 숙여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이 말을 하려고 했어. 비앙카는 앰버 플래스의 여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