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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39화 (3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39화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이끈 곳은 오랫동안 쓰지 않은 분장실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다고 해도 케이가 성냥을 그어 불을 켜자 내부는 먼지만 좀 꼈을 뿐 나름대로 쓸 만해 보였다. 짐승들이 다쳤을 때나 낼 법한 낑낑거리는 소리가 자꾸 얇은 벽을 타 넘어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쥐새끼들이 많군.”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장갑을 벗어 소파에 먼지를 털어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럴 것 없어.”

“뭘?”

케이는 먼지를 털어낸 소파를 엘리자베스 앞에 가져오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에게 내민 소파는 그냥 두고 그 앞으로 새로운 소파를 끌어와 케이는 거기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옆얼굴에 흐르는 반항기가 이상하게도 그를 덜 자란 수컷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전부 착각일지도 몰라.’

“순진한 척할 필요 없다는 뜻이야. 날 배려한다면 더더욱.”

“뭘 순진한 척을 해?”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들어 있는 얇은 적의를 느낀 케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서로의 내부에 있는 적의를 예민하게 느꼈다. 그래서 큰 명분 없이도 싸움은 전쟁이 됐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엘리자베스는 이맘때의 서로를 떠올리며 끈적끈적한 신음소리들이 자신에게 와서 달라붙는 것처럼 느꼈다.

“저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척하잖아. 이곳에 자주 와봤을 거면서. 너도 재미 좀 봤나 보지?”

“재미?”

케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을 때, 그녀는 또 다시 싸움이 시작되리라고 여겼다. 지난 며칠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평화의 기운은 모두 거짓이었고 진실은 전생에서의 두 사람의 끔찍한 전쟁이라는 것처럼.

케이는 무희들이 분장을 지울 때 쓰는 티슈 곽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걸 집어던지는 대신 티슈를 뽑아서 자신과 마주 앉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에 똥이나 묻히고 다니는 여자만큼 재미있는 게 어딨다고.”

케이는 비릿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손에 들러붙은 말똥을 티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제 몸에서 흘러나왔을 악취를 상기하며 얼굴을 붉혔다. 옆에 있는 거울을 힐끔 보자 엘리자베스의 얼굴에도 말똥이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황급히 케이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케이는 피식 웃으며 그 손까지 잡아채갔다. 그러곤 티슈로는 떼어지지도 않을 것 같은 딱지들을 맨손으로 떼어냈다.

“더러워.”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빼자 케이가 농담조로 대답했다.

“겨우 이딴 게 뭐가. 마구간에서는 커다란 말똥을 베고 자기도 했어. 말똥을 코 밑에 바르고 말이야. 그래야 냄새에 금방 익숙해지거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었다. 앰버가 해줬던 케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거대한 덩치가 어린 시절에는 영양실조에 걸릴 듯 삐쩍 말라서는 희끄무레한 얼굴로 솔치노 스트리트를 돌아다녔다니.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케이를 거꾸로 매달아 그 시절에 대한 모든 진실을 털어놓게 만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지만.

‘케이는 자기 여자한테 그런 얘기는 절대 하지 않아요.’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케이가 자신에게 진실을 털어놓든, 털어놓지 않든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겨우 이런 걸로 더러워지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운 드레스에 똥이 묻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앰버를 떠올렸다.

그럼 사람은 어떤 걸로 더러워지지? 케이 하커. 말해봐.

그런 말은 삼켰다.

케이는 지저분해진 티슈를 옆으로 대충 던져버리고 새로운 티슈를 뽑았다. 이번엔 티슈에 품 안에 가지고 있던 술통에서 위스키를 살짝 묻히면서 말했다.

“지독한 냄새엔 술 냄새가 약이지. 자, 이제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볼까?”

과연, 술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오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엘리자베스는 제 손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케이를 내려다보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비가 좀 걸렸어. 그 사람 이름이 솔라티오인가 그랬는데 날 놔주지 않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자식한테…….”

솔라티오에게 잘못 걸린 건 제 잘못이 아닌데도 왜 이렇게 주눅이 드는 걸까. 부엌에서 먹지 말라는 음식을 훔쳐 먹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케이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똥을 먹였다?”

“효과가 좋았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케이는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효과가…… 크큭, 좋았다고?”

케이가 웃자 엘리자베스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어쩔 수 없었다고!”

“넌 정말…… 이제부터 솔치노에서는 반드시 나랑 같이 다녀야겠다. 솔라티오가 벼르고 있을 걸.”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짜증에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채 그녀를 놀려댔다. 엘리자베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케이를 쏘아보았다.

“솔라티오의 이름도 아네?”

“당연히 알지. 솔치노 스트리트에서 제일가는 갑부이름인데. 켄터베리의 홀의 실질적인 소유자이기도 하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예민한 목소리에는 반응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케이의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포획한 먹잇감이라도 보듯이 응시하자 엘리자베스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솔라티오한테 똥을 먹인 건 좀 통쾌하지만 그 자식이 너한테 조금이라도 상처를 남겼다면 그 새끼를 산 채로 묻어버려야 하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사람을 산 채로 묻겠다는 거?”

엘리자베스가 눈을 치켜뜨자 케이가 진지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왜 솔라티오한테 그렇게까지 적의를 가지고 있어? 그 사람이 앰버 플래스를 포함한 이곳 여자들을 ‘자기 여자’라고 부르니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는 것을 그만두고 엘리자베스의 눈을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불퉁한 얼굴로 덧붙였다.

“너도 이곳 여자들이 전부 네 차지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지? 솔라티오나…….”

“다른 신사들처럼?”

엘리자베스가 너무 천박하지는 않게 들릴 만한 어휘를 고르는 동안 케이가 뒷말을 대신했다.

케이의 눈에는 다시 그 빛이 떠올랐다. 앰버 플래스에게도 있었던 빛. 닳고 닳아버린, 하지만 그래서 무뎌진 것만은 아니고 어떤 모서리는 날이 아주 새파랗게 살아 있는 감정의 빛.

“나를 저 남자들이랑 비교하고 싶은 거야? 너를 이런 분장실에 신사들이 데리고 들어오는 무희들이랑 비교했듯이?”

케이는 우습다는 듯이 말하곤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워졌던 몸을 뒤로 뺐다.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러운 거리감에 마음이 허전해졌다. 하지만 차마 케이를 향해 손을 뻗어 그를 당겨올 자신은 없었다.

케이가 술통에 담겨 있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이건 정확히 하지. 지금의 나와 널, 신사와 무희에 비교하고 싶다면 네가 신사, 내 쪽이 무희에 가깝겠지.”

케이가 말하는 사이사이에도 얇은 벽을 타고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무희를 벽에 몰아붙이고 힘과 권력, 돈의 힘을 빌어 제압하려 드는 신사들. 커피 하우스에서 겉으로나마 유지했던 체면 따위는 개나 줘버린 짐승 같은 목소리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케이의 몸을 벽에 몰아붙이고 그의 몸 이곳저곳을 희롱하며 저급한 농담을 하는 것을 상상해봤다.

“그런 건 절대 불가능하잖아. 힘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떤 점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케이를 권력으로 샀다는 것. 힘으로 눌러버리고 제압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이 케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그래. 신사 놈들은 무희의 외모를 따져대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얼굴 따윈 안 보고 남편감을 골랐으니 말이야.”

“얼굴을 안 봤다니? 넌…… 넌…….”

케이 하커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케이는 자신이 어떤 외모를 가졌는지 모르는 건가?

케이와 함께 정찬회에 초대받으면 귀부인들은 케이를 힐끗거리며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자빠뜨렸을 거’라는 농담을 공공연히 하곤 했다. 귀부인들이 케이 하커의 앞에서 일부러 넘어지는 척하면서 케이의 몸을 더듬는 것을 본 것도 수차례였다.

“넌 잘 생겼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뭐?”

케이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다시 떠올랐다.

“방금도 비앙카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네 몸을 더듬고 갔잖아. 넌 그 여자한테 돈을 주지도 않았는데!”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하는 말이 천박하디천박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너라면 패트론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이 홀의 여자들이 줄줄이 따랐겠지.”

엘리자베스가 마지막 말을 결국은 해버리고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다들 널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을 테니까.”

나처럼.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뱉고 나니 별 수 없이 눈물이 살짝 고였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눈은 보지도 않고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파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케이의 얼굴은 온통 붉고 몸짓은 과장되어 있었다.

“무슨 헛소리야. 이 홀의 여자를 포함해서 나한테 관심 있는 여자는 없어. 날 봐. 나는 코뼈는 삐뚤어지고 말투는 투박하고 또, 또…….”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점점 더 달구다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풀이 죽어서는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왜 표정이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비 맞은 강아지 같잖아.”

“그냥. 네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걸 들어보니 네 미에 대한 기준이 높은 가보다 싶어서. 그래서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봤는지도 모르고.”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케이가 그 앞에서 더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럼 네 취향은 뭐야? 어떤 거지? 외모가 아니라 영혼이 통하는 여자인가? 너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람?”

내가 아닌 사람. 엘리자베스는 앰버 플래스를 떠올렸으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질투하는 게 앰버 플래스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스가 질투하는 것은 케이 하커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여자들이었다.

돈이나 권력에 의해 팔려가도 절대 더러워지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여자. 혁신적인 미래를 꿈꿀 줄 알면서 가장 지저분한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여자.

케이가 사랑할, 자신이 아닌 모든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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