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38화
“내가 처음으로 켈토에서 내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왔을 때 케이는 공장에서 근처 옷가게에 포목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어요. 마부와 친해보였고, 마부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장에서 빛 하나 못 받고 영양실조에 걸려 비실거리는 노동자처럼 보이기도 했죠.”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부? 노동자? 엘리자베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아무리 케이가 로버트의 저택에서 마구간의 짚을 침대로 썼다고 해도 케이는 로버트의 아들이었다.
하커 사가 어디인가. 그레이트 레본은 물론 이 이오페아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이 아닌가.
“케이는 로버트 하커 씨의 아들이에요.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가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앰버가 와인을 홀짝거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게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로버트는 기업가예요. 그 말은 귀족처럼 고귀한 이도 아니고, 평민처럼 가난한 이도 아니라는 거죠. 로버트가 건드린 창부, 공장 직원만 해도 수십 명일 거예요. 로버트가 제 앞으로 자식을 데리고 온 여자들을 모두 데리고 살았다면 그 저택에는 남아나는 방이 없었겠죠.”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앰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앰버가 말할 때마다 수많은 신사들이 앰버를 바라보았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제 목소리가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에 주의했다.
“하지만. 케이의 어머니는 달랐어요. 케이를 데리고 문 앞에 서서 악을 쓰지도 않았고 마차에 매달리지도 않았죠. 고요하게 한 살배기 케이를 그 집 저택 앞에 버리고 갔어요. 한겨울에요. 아무리 리오든의 겨울이 그리 춥지 않다 해도 케이가 그 저택 앞에서 하루를 꼬박 버틴 건 기적 같은 일이에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해가 지기 시작한 리오든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앰버를 보았다. 한겨울에 그 어린 아이를 버리고 갔다고? 그걸 하루 동안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이 모든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과 별개로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는 앰버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꼈다.
앰버는 이 모든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어린 아이가 동사하지 않았다는 걸 안 저택의 누군가가 케이를 안으로 들였고 케이는 그때부터 로버트 하커의 노예처럼 살았어요. 그 댁의 마부도 됐다가 공장의 노동자도 됐다가 하면서요. 삯 한 푼 받지 못하구요. 사생아들의 인생이란 그런 거죠. 나도 모종의 이유로 아버지한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켈토에서 리오든으로 왔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일하던 술집을 삐까번쩍하게 내부를 수리해 홀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에서 살고 있죠.”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을 듣는 사이에도 주변에 있는 신사들은 앰버를 보며 노골적인 미소를 띠었다.
앰버는 어떤 사람일까? 앰버의 안에는 어떤 감정들이 살고 있을까? 그 안에 살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 저들 중 한 명이라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케이 하커를 처음 만났을 때, 겨우 6살쯤 된 녀석이 이 커피 하우스 발코니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죠. 처음에는 에그 크림 같은 달달한 게 먹고 싶어 그러는 줄 알았는데, 녀석이 물어보더라구요. 전 그때 술집에 오던 어느 부자가 주었던 금발 머리를 한 인형을 들고 있었는데, 그게 얼마냐고 했어요.”
‘넌 어떻게 그런 걸 가지고 있지?’
케이는 앰버에게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고, 앰버는 대답했다.
‘아저씨가 사줬어.’
‘그건 동냥이나 다름없어. 넌 거지야?’
앰버는 케이의 말을 흉내 내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웃지 못했다.
“‘난 돈을 벌면 내 힘으로 그런 걸 살 거야. 난 거지가 아니니까.’ 케이는 그렇게 말했죠. 그때부터 싹수가 노랬어요. 그 녀석은.”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추억에 잠긴 눈으로 발코니 바깥을 바라보는 게,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케이를 바라보는 게 불쾌해져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못 할 말이 없나 보군요. 아주 비밀스러운 가정사까지 모두요.”
“우린 친구니까요.”
“나도 케이의 친구예요. 나도 케이를 오랫동안…….”
“아뇨. 당신은 케이의 여자예요, 친구가 아니라.”
앰버는 나이든 노련한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듯 단호하게 말했다.
“케이는 자기 여자한테 그런 얘기는 절대 하지 않아요. 거기다 엘리자베스는…….”
앰버는 숨을 깊게 몰아쉬다가 솔치노 스트리트의 한쪽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케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그 인형을 닮았어요. 케이는 돈이 생기면 꼭 자기 물건으로 그걸 가질 거라고 했어요. 그 작은 인형을 유일한 자기 소유물로 놓고 지킬 거라고. 케이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할 거예요. 그러니까 켈토로 가요, 엘리자베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켈토로 가는 배편과 멜니아 중앙은행의 수표를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앰버 플래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켈토를 향한 망명과 케이가 가지고 싶어 했던 인형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제대로 묻지 못했다. 켈토로 엘리자베스가 가고나면 앰버와 케이가 하려는 게 혁명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도.
“켄드릭 하커가 왔어요. 지금 이런 꼴로 약혼자의 동생을 만나고 싶지는 않겠죠. 어서 가요.”
엘리자베스가 그 말에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커피 하우스로 켄드릭 하커가 막 들어선 뒤였다.
입술을 깨문 엘리자베스는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여러 신사들의 테이블을 지나쳐 뒷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뒷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를 막아섰다.
“내 말은 절대 안 듣는군. 위험한 곳엔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익숙한 목소리에 엘리자베스의 등골에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
엘리자베스는 이틀 뒤에 있을 왕의 영명 축일에 기리게 될 예리아모 성인에게 기도했다.
‘제발. 저를 쥐구멍에라도 숨겨주세요.’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했을 땐 이미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그러쥔 케이 하커가 그녀를 납치하다시피 해서 뒷문이 아닌 켄터베리 홀 공연장 내부로 통하는 통로로 데려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눈으로 앰버 플래스를 보았지만 앰버는 이미 엘리자베스를 등지고 선 켄드릭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 * *
“사고뭉치.”
케이 하커는 곧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채로 공연장 안에 들어갔다.
거대한 샹들리에로 장식된 높다란 천장을 가진 홀 내부는 클럽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시끄러웠다. 심장까지 울리는 북소리, 탬버린, 무희들의 웃음소리로 바로 옆에서 떠드는 이들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케이도 그것을 아는 듯 자신의 가슴께에 매달린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도망갈 생각일랑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이런 곳에서 그런 옷을 입고 마차를 잡을 생각은 아니었겠지.”
엘리자베스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조금의 자비도 없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몸을 안다시피 해 홀 중앙에 길게 늘어져 있는 무대와 그 근처를 빙 둘러 있는 의자 중 하나에 엘리자베스를 앉혔다.
엘리자베스는 무대 위를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무희들의 맨다리를 보며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원래 나도 여기까지 들어올 생각은 아니었어!”
엘리자베스는 항변하듯이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는 적반하장의 원망이 들어 있었으므로 케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감히?”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때, 무희 중 하나가 엘리자베스의 목덜미를 만졌다.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 제 모자를 사수했다. 그러자 무희가 까르르 웃으며 케이에게 고래고래 말했다.
“소녀인지 소년인지는 몰라도 예쁜 놈을 데리고 오셨네? 케이 하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저 무희가 케이의 이름을 단번에 말한 것인가? 얼마나 케이가 이곳의 단골이었으면 저럴 수가 있지.
“건드리지 마. 내 거니까.”
케이는 제 먹잇감을 지키는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무희의 손등을 쳐냈다.
무희는 그런 케이의 행동을 보더니 푸스스 웃었다. 무희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반쯤은 살이 보이는 가슴이 출렁거리고 몸에서 나는 짙은 향수냄새가 엘리자베스의 코를 찔렀다.
“이런 취향이셨어?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는 귀여운 쪽?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금방 질릴 걸. 결국 남자들이란 원숙미가 그리워지는 법이야.”
무희는 낄낄거리며 케이의 목덜미에 기다란 손가락을 뻗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엘리자베스가 모자에서 손을 놓고 무희의 손가락을 쳐냈다. 그 바람에 엘리자베스의 모자가 떨어지고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 탓에 무희와 주변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단숨에 엘리자베스에게로 모여들었다.
“뭐야? 소녀도 소년도 아니었잖아?”
엘리자베스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 케이가 제 외투를 벗어 엘리자베스에게 덮어 씌웠다.
그러곤 엘리자베스를 또 다시 품에 안고는 무희에게 말했다.
“그만 놀려, 비앙카. 지금 3층 분장실에 아무도 없겠지?”
비앙카라 불린 무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쥐새끼들이 새끼 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케이는 그 말을 듣고는 엘리자베스를 그대로 안고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코트에 둘러싸여 시야를 차단당한 채 케이의 보조를 맞춰 걸었다.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린 코트가 사라졌을 때는 케이와 엘리자베스는 낡은 수동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케이는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엘리자베스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장하군. 정말 장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에 들어 있는 경멸을 익숙하게 느끼며 벌컥 화를 냈다.
“그럼 저런 여자들이 계속 네 몸을 만져대는 걸 보고 있으라는 거야?”
그 말에 케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귀는 빨개지고, 눈동자는 떨려왔고, 입술은 무언가를 꾹 눌러 참듯이 찌부러졌다.
케이가 말했다.
“만진 게 아니라 스친 거야.”
“그게 그거야. 그냥 뒀으면 셔츠 안에도 손이 들어갔을걸!”
엘리자베스가 소리 지르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케이의 귀에서 시작된 홍조는 목덜미 전체에 퍼진 채였다.
삐걱. 엘리베이터가 두 동강 날 듯한 소음과 함께 멈춰 섰다. 드르륵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어두운 복도 이곳저곳에 남녀가 얽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손차양을 만들어 시선을 가리자 케이가 코웃음을 치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