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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36화 (3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36화

“하지만 엘우드 밀이 분명 좋아하지 않을걸요. 그 인간, 성격이 더러워서 자기 이름을 왕립학술원에 등재하는 꼴은 절대 참지 못할 거예요.”

케빈 퍼킨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다시 [후세를 위하여]라고 적힌 청동 판 앞으로 돌아왔다.

케빈 퍼킨은 엘우드 밀과 얼마나 친밀한 사이일까? 돈 거래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이지만, 자신이 엘우드에 대해서 몇 가지를 떠본다고 해서 제 말의 진의를 의심할 정도의 사이는 아닌 걸까?

“왜지? 왕립학술원과 사이가 안 좋았나?”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케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들고 있던 과자 봉지에서 과자 몇 개를 빼먹고는 손가락에 묻은 설탕을 빨아 먹으며 말했다.

“글쎄요. 정확한 건 모르죠. 수도원에서 함께 봉사하시면서 꽤 친하셨다면서요. 왜 왕립학술원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얘기 못 들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엘우드와 수도원에서 함께 봉사를 하다가 친해진 사이라고 말했다. 엘우드가 자신의 병을 고쳐준 왕진 의사였다고 말할까도 고려했지만, 엘우드 밀 같은 자가 귀족을 위한 왕진의사로 지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너도 모른다는 뜻이니?”

“네. 저도 몰라요. 그치는 제가 있던 시골 동네 빈민구제원에 있었어요. 막내 동생이 아팠을 때 병을 고쳐줬죠. 제가 영특하다고 했어요. 나중에 꼭 좋은 과학자가 될 거라나? 뭘 믿고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몰라요. 덕분에 제가 수도로 올라가겠다고 해서 아버지가 엘우드 밀 그 인간의 목을 낫으로 따버리겠다고 난리를 피우셨죠.”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설탕을 털어내는 케빈의 손놀림이 느려지는 것을 보며 눈을 치켜떴다. 그런 그녀의 푸른 눈을 보던 케빈이 입맛을 다셨다. 케빈은 그때 당시로 돌아가 가난 탓에 부성애가 마모된 거친 아버지 앞에 선 소심한 소년이 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엘우드에게서 돈을 빌렸죠. 훔친 게 아니라 빌린 거예요! 엘우드가 직접 자기 입으로 돈은 천천히 갚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야반도주를 한 거구나?”

엘리자베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케이 하커의 손을 잡고 클레몬트 공작의 타운하우스를 빠져나왔던 자신처럼, 케빈 역시 가난한 아버지의 땅을 벗어난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란 뭘까. 서로에게 서로를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삶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건 언제부터 시작된 역사일까.

엘리자베스는 바지 끄트머리가 철제 계단을 내려오다가 더러운 진흙이 묻어 축축해진 것을 느끼며 무겁게 걸었다.

케빈은 경비병들이 지키고 선 철문 앞에서 엘리자베스를 배웅했다.

“교수님한테 돌아가봐야 해요. 엘우드 밀의 이름을 실어도 되는지 여쭤볼게요. 하지만 나는요, 여전히 댁 이름을 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뭐, 망명을 간다고 해도 과학자들이란 명성이 중요한 존재들이라고요. 당신이나 나나. 그러니 개 같은 니콜라스 교수님의 밑이라도 제가 열심히 닦는 게 아니겠어요?”

“케빈.”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막으며 경비병의 눈치를 힐끔 보고 말했다.

“너는 꼭 명성을 가진 과학자가 될 거야. 그 입만 당분간 조심하면 말이다. 엘우드 밀이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물어보시거든 따로 뵙게 해드린다고 해라. 아무 때나 칼몽 여관으로 오시면 말이야. 웨스트 리오든에 있는 칼몽 여관이야. 알겠니?”

“네, 아가씨.”

“아가씨?”

케빈의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황당해하며 되묻자 케빈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왠지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요. 주인 아가씨 같으시잖아요.”

“시끄러워. 마차는 어디에서 잡아야 하니? 오늘은 마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구나.”

칼몽 여관에서 이쪽으로 올 때만 해도 바실리 스트리트의 끄트머리에서 마차를 몇 대는 만날 수 있었기에 많이 걷지 않았다. 그런데 왕립학술원 근처에는 마차가 거의 없었다.

“마차를 타고 오가는 과자 팔이 소년은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차림새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일 모레가 폐하의 이름날이라면서요. 시골 귀족들이 기차를 타고 모여든다던데요. 마차란 마차는 전부 기차역 근처로 갔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그제야 오늘이 국왕 폐하의 영명 축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회귀 전 자신의 결혼식 5일 전이 영명 축일인 탓에 많은 귀족들이 몰릴 거라고 어머니가 기뻐하셨던 게 생각이 났다.

그레이트 레본에서 국왕의 이름날은 원래 탄신일보다 크게 챙기는 법이었지만 교회의 힘이 약화되면서 그런 전통은 유명무실해졌다.

그래도 영명 축일에는 컬로든 궁이 열리고 남쪽 예배당에서 축일 예배가 진행되기 때문에, 수많은 귀족들이 그날을 노린다. 수도에 있는 머나먼 친척 집에서 기거하면서라도 왕족을 알현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축일에 국왕이나 왕족과 안면을 트면 봄에 있을 사교계 시즌에 컬로든 궁에 초대받아 정식 ‘데뷔’를 치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고, 불륜이나 이혼, 사랑의 도피 따위의 부정을 저질러 데뷔를 치를 수 없다 해도 영명 축일에 왕족의 소개로 크고 작은 귀족들과 안면을 트면 사교계에 입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를 클레몬트 공작 부부와 로버트 하커가 놓칠 리가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회귀하기 전 이 국왕의 영명 축일에 클레몬트 공작 부부는 하커 사와의 결합을 통해 늘어난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고 싶어 했고 하커는 곧 시작될 의회 개회시기에 맞추어 ‘경’ 칭호를 승인 받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 누구도 국왕의 이름날이라는 성스러운 축제에는 관심이 없는 축일이었다.

케이는 예배당에서 엘리자베스를 본 척 만 척했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가 얄미워서 축일이 끝나고 귀족 영식의 집에서 열리는 연극 초대회에서 만취했었다. 케이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고……. 늘 그랬듯이 싸우고, 또 싸우고.

이즈음의 그녀와 그는 그런 식이었다. 그녀는 제멋대로 술에 취해 케이를 농노처럼 부렸고 케이는 그런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면서도 눈빛에는 경멸을 심어 그녀를 보았다.

감히 너 따위가 그렇게 본들 어떻게 할까.

엘리자베스는 그런 식으로 상처받은 스스로를 위안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케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이었고, 그를 완벽하게 가질 수 있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에도 이상한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불안감이 그녀를 눈멀게 했다.

공작 부부는 하커 가와 결혼을 해놓고도 ‘경’ 칭호 하나 하커 가에게 내어줄 힘이 없었다. 국왕의 이름으로 달아둔 어마어마한 부채를 숨긴 채 진행하는 결혼이었는데도 엘리자베스는 이 결혼이 가져올 파국을 알지 못했다.

전쟁이 아무리 여린 공녀님에 불과했던 엘리자베스의 상상력 밖에 있는 것이었다 해도 그렇게 순진했다니.

엘리자베스는 불현듯 스며드는 과거의 감정을 떠올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날 수많은 귀족들이 엘리자베스와 클레몬트 공작 부부를 보았을 것이다. 케이에게 눈이 먼 채 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어리석은 왕족을. 케이 하커도 분명 그녀를 보았을 것이다.

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전쟁에 대해 미리 언질하지 않았을까.

엘리자베스의 감정이 순식간에 그녀를 다시 과거로 돌려놓는 사이에 케빈이 말했다.

“차라리 솔치노 스트리트로 가서 마차를 잡아요. 거긴 언제나 술 취한 귀족들이 많아서 마차가 모여드니까요.”

솔치노 스트리트라면 엘리자베스가 메리와 토비를 데리고 갔던 올라운드 클럽이 있는 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토비를 따라 걸었던 기억이 있었다.

“고마워, 케빈.”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케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 * *

한 번 걸어본 길이라고 자만했던 건 실수였다. 그때는 메리와 토비라는 좋은 길동무가 둘씩이나 붙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인 엘리자베스는 금방 솔치노 스트리트 초입에서부터 시작되는 화려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에 주눅 들었다.

가슴을 반쯤 드러낸 여자들이나 술에 취해 과격하게 구는 남자들의 옆을 지나갈 때마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마다 엘리자베스는 그 행동이 더 이목을 끈다는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토비와 메리를 데리고 다닐 때 느꼈던 자신감은 한낱 허울에 불과했나.

“어이, 귀여운 소년. 내 구두도 좀 닦아줄래?”

그때 작은 체구로 어리숙하게 돌아다니는 엘리자베스를 구두닦이 소년쯤으로 여긴 한 여자가 그녀를 불렀다. 캉캉이라고 부르는 외설적인 춤을 출 때나 입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녀를 보며 활짝 웃더니 제 치마를 들쳤다. 그러자 새하얀 다리 아래로 목이 긴 부츠가 드러났다.

“나, 난 구두닦이가 아니오!”

엘리자베스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자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그녀를 놀렸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귀여워라. 너 몇 살이니?”

“누나가 손이라도 좀 잡아줄까?”

여자들은 단숨에 그녀를 둘러쌌고 엘리자베스는 새하얀 가슴이며, 다리, 붉은 입술에 포위되어 눈 둘 곳을 모르다가 겨우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뒤에서는 여전히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천박해.’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랄 겨를도 없이 뛰다가 거대한 벽 같은 것에 부딪혀 자빠졌다. 말똥으로 가득한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올렸다.

“뭐야. 앞도 안 보고 다녀?”

케이 하커보다 옆으로는 두 배쯤 뚱뚱하고 위로는 3분의 2정도 밖에 안 되는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그녀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그녀의 몸은 남자의 손에 마치 뼈가 없는 동물처럼 흔들거렸다. 번들거리는 피부에 알 수 없는 상처가 가득 난 남자는 그녀의 몸을 바닥에서부터 손가락 하나 만큼 띄우고도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말했다.

“구두닦이냐? 어딜 감히 솔치노에서 이 솔라티오의 허락 없이 내 손님과 내 여자들의 동전을 털어가려고 해? 엉?”

남자의 두툼한 손가락이 단숨에 그녀의 허리춤을 노려 들어왔다. 수치심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더듬다가 그녀의 바지주머니를 뒤집었다. 주화 주머니가 떨어졌다. 남자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옆에 있던 멀대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멀대들이 주머니를 뒤집었다. 그 안에서 금화 한 개와 은화 몇 개가 떨어졌다.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너 뭐하는 놈…… 으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엘리자베스가 넘어질 때 손에 쥐었던 말똥을 남자의 눈에 처박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헛구역질을 하며 몸부림을 친 탓에 엘리자베스의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엘리자베스는 근육통 따위에 신경을 쏟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남자들의 손을 피해 잽싸게 뒤로 달아났다.

어차피 금방 잡힐 테지만 그렇다고 도망가지 않을 순 없다. 죽을 날을 받아놨다고 오늘 숨을 안 쉴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엘리자베스가 치받는 숨을 억지로 삼키며 캉캉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에게로 비틀비틀 뛰어갈 때였다. 캉캉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불쑥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은 엘리자베스의 팔을 꽉 쥐고 자신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솔라티오 씨. 이게 무슨 소란인가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어 그렇게 말하는 상대를 보았다. 그러자 붉은 머리카락에 희디 흰 피부, 거기에 화려한 목걸이와 드레스로 치장한 여자가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윙크했다.

“앰버.”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예기치 못한 조우로군요. 그런 옷도 잘 어울리네요.”

엘리자베스는 말똥이 잔뜩 묻은 손을 얼른 앰버의 손으로부터 빼서 뒤로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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