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35화
케빈 퍼킨! 이 망할 자식! 이 케이 하커 다음 가는 개자식!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빨개진 얼굴을 모자 아래로 푹 숙였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경비병 하나가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다행이다. 니콜라스 교수님이 아니구나.
엘리자베스는 두근거리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며 이상한 양가감정에 휩싸였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실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왜? 뭐가 실망스럽지?
“엥? 여긴 외부인 출입 금지요!”
분명 엘리자베스가 드레스를 입고 보닛을 썼을 때는 친절하게 대했을 경비병이 엘리자베스의 차림과 과자 봉투를 보곤 험악하게 손가락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잡아채 던져버릴 기세였다.
경비병의 말에 케빈이 대답했다.
“아, 여긴 연구원입니다. 이 과자는 그냥…… 드시려고 가져오신 거예요.”
케빈의 말에 경비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목을 긁어 억지로 남자처럼 목소리를 냈다.
“가, 같이 드, 드실라우?”
엘리자베스의 말에 연구실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오려던 경비병이 한숨을 푹 내쉬며 도로 복도로 다시 나갔다.
“됐수! 이 거지 소굴에서 뭐가 들어간단 말인지 원!”
경비병이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나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같이 드실라우?”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노동자 흉내를 따라했다.
레본에서는 같은 레본어를 쓰면서도 귀족과 평민은 억양은 물론이요 어휘까지 다른 것을 썼다. 그래서 처음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만났을 때, 케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엘을 따라 남부를 돌아다니면서 엘리자베스는 평민의 언어를 꽤나 따라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남부 사투리도 섞인 것 같고. 나도 남부 시골 출신이거든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이곳저곳에서 배웠어. 나 이만 가볼게. 내일 오후 칼몽 여관으로 와. 거기서 다시 얘기하자.”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모자챙을 생명줄처럼 붙잡은 채 나가려고 하자 케빈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앞을 막아섰다.
“왜 그래요? 니콜라스 교수님을 뵙고 가야죠.”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피해서 빠른 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왔다. 끈적거리는 액체들이 신발 밑창에 들러붙는 느낌이 났지만 이제는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케빈이 황급하게 그녀를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요?”
“학술원 밖으로.”
“왜요?”
케빈은 진심으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케빈을 힐끔 보고 말했다.
“내 꼴이 이런데 어떻게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 앞에 화학자로 얼굴을 보일 수가 있어?”
“지금 꼴이 흉해서요? 그러길래 저번처럼 입으시지. 옆 방 조교가 새로 맞췄다는 멀끔한 셔츠라도 빌려 드려요?”
케빈이 거기까지 묻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참지 못하고 철제 계단 맨 위에 서서 케빈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네?”
“그렇잖아. 나는 변변한 교육 한 번 받지 못한 ‘아가씨’고, 니콜라스 교수님은 학술원 산하 아카데미에서 6년간 교육받고 15년간 연구를 한 분이지. 너도 10대 초반부터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분 밑에서 벌써 몇 년을 있었고. 그런데 내 이름을 그분과 네 이름 옆에 적는다니!”
처음에는 화를 낼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케빈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점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케빈은 소리를 지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말이 안 돼요? 공녀잖아요.”
“난 여자잖아.”
“그래도 공녀죠.”
케빈은 황당한 얼굴로 철제 계단 앞으로 나와 엘리자베스의 앞을 막았다.
“왕족인데, 못 하는 게 어딨어요? 이 나라에서 왕족이 못 하는 일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이봐요. 나는 9남매의 맏이예요. 내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내 다리를 분질러버리려고 했어요. 절벽에서 밀어서요.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면 기어 다닐지언정 집에서 베라도 짜지 않겠냐구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 그간 날 먹이고 입힌 값은 누가 치러 주냐고 했죠.”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눈빛 속에서 케이에게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경멸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말간 갈색 눈동자 속에는 경멸은 없었고 그저 부러움과 시기심, 심술이 가득했다.
진짜로 귀족 여성의 의무와 굴레 따위는 모르는 듯한 얼굴. 계급적인 우위가 모든 것을 해결할 거라고 믿는 순진함을 엘리자베스는 비웃고 싶었으나 그 순진함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 것 같아서 그녀는 스스로를 자제했다.
위태로운 철제 계단 위에 선 두 사람의 발아래로는 온몸에 돼지 똥을 칠한 채로 왕립학술원을 들락날락거리는 도축업자들과 나무를 때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피부가 꺼칠했지만 그들은 그나마 이 리오든에서 중간은 가는 평민이었다. 그들이 일하는 마구간 옆의 조그마한 헛간 뒤에 있는 울타리 밖에는 그들이 가져다 버리는 음식 쓰레기 더미 속에서 썩은 사과 껍질 따위를 주워 먹는 도시 빈민들이 있었다.
더러운 오수 탓에 이는 전부 썩고 성한 것은 노랗게 변한, 평균 수명이 40도 채 되지 않는 자들. 엘리자베스가 엘 선생과 돌아다니며 치료했던, 배만 빵빵하고 팔다리는 가는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자들.
그런 빈민들에게 왕립학술원의 담장은 하늘과도 같은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그런 왕립학술원 담장을 넘어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 겪었을 고초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었다.
빈민들의 고달픈 인생사는 상투적이고 일관되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작가가 제 이야기의 틀에 맞춰 찍어낸 이야기처럼. 빈민들의 인생사는 대체로 자신들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케빈 퍼킨은 그런 세상의 틀 속에 갇혀 살았을 것이다.
남부 시골 마을. 8명이나 되는 동생들과 가난한 가족. 교육의 기회는 조금도 닿지 않는 곳.
케빈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을지 엘리자베스는 알았다. 자신의 세상도 그렇게 좁아터졌었으니까.
몰락한 왕족에게 부과되는 수많은 의무와 책무들. 가정교사에게 감금되면서 익혀야 했던 복잡한 궁중 예절과 굶어가면서까지 입어야 했던 자그마한 코르셋.
그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케빈의 눈에 서린 순진함이, 저 무지가 얼마나 무섭고 또 견고한 것인지를. 저 무지의 꺼풀을 벗는 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를.
그러나 알은 밖에서 깨줄 수 없는 것이다. 알은 스스로 깨고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가르치는 대신에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은 내 이름이 들어가면 논문의 신빙성을 낮출 거라는 거야, 케빈. 그리고 무엇보다 난…….”
엘리자베스는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멀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루이 니콜라스 교수였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케빈의 손을 잡아 계단 아래로 단숨에 함께 내려왔다. 공포에 시달리며 겨우 올라간 계단이라곤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난 곧 망명할 거야. 케빈. 그러니까 내 이름을 절대 말해선 안 돼. 설마 이미 말한 건 아니겠지?”
엘리자베스가 헐떡거리며 묻자 케빈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름은 정확히 말하지 않았죠. 공녀님 이름을 훅 말해버리면 좀…… 그런데 망명이라구요? 어디로요? 공녀가 무슨 망명을 해요?”
케빈이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빈은 순진한 눈으로 복도 끝에서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얼굴을 내미는 것을 보곤 얼른 엘리자베스를 잡아 당겨 계단 아래로 몸을 숨기게 하고 물었다.
“혹시 무슨…… 정치적인 망명?”
케빈의 눈이 커졌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는 순간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케빈의 입을 닥치게 하면서 사실을 교묘히 숨길 적절한 방법.
그건 제가 위험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척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윌리엄 조쉬처럼.
“그래. 그런 거야, 케빈. 이건 공작가에 아주 중요한 비밀이야. 만약 발설하면 나도 널 구해주지 못해.”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케빈에게 말했다. 그러자 케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유, 아유. 전 그런 복잡한 건 듣고 싶지도 않아요!”
케빈이 자기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이 허공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이런 걸 보면 영락없는 10대 소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남몰래 웃고 있을 때 케빈이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임상실험을 할 환자는 어디서 구하고 논문은 어디에 실어요? 학술원 논문은 지도 교수가 검수하지 않으면 등재할 수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담담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빼 니콜라스 교수가 있는지 보고, 그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계단 아래에서 걸어 나왔다.
“환자는 이미 있고, 논문은…… 그래. 논문은 나도 생각해봤어. 그런데 그 논문, 꼭 학술원을 통해서 실어야 할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요? 출판업자들은 학술지 같은 건 내고 싶지 않아 해요. 그런데서 내는 학술지를 읽는 독자도 없고요.”
“내가 아는 출판업자가 있어.”
빨간 책 전문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그 말은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케빈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공녀님은 무슨 아는 자본가도 있고 출판업자도 있네요?”
케빈은 그렇게 말해놓고는 얼른 입을 막았다.
“아, 이것도 혹시 비밀?”
엘리자베스는 화들짝 놀란 눈의 케빈이 약간이나마 귀엽게 느껴져 슬쩍 웃고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해야 할 것들. 우선순위. 그리고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엘리자베스는 냄새 나는 마구간을 지나 걸어가다가 케빈을 휙 돌아보았다.
“……케빈. 방금 말한 공동저자 말이야. 그거…… 내 가명을 실어도 되니?”
그녀가 멈춰 서자 뒤따르던 케빈이 엘리자베스와 훅 가까워졌다. 케빈이 또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며 대답했다.
“네, 네, 뭐…….”
케빈에게는 엘리자베스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가까이서 볼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그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로 케빈을 빤히 보았다.
그녀는 머릿속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엘우드 밀을 불러들일 덫. 그 덫에 놓을 좋은 미끼를 설치할 기회.
원래는 퀴닌 논문을 통해 불러들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런 좋은 기회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그럼 내 이름, 엘우드 밀이라고 말해줘. 그리고 그 논문, 신문사에 제보해도 될까?”
엘우드 밀. 원래라면 루이 니콜라스가 지금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었어야 하는 저온 살균 논문에 제 이름이 실린다면. 그 소식을 듣고도 제 발로 찾아오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아니. 절대로.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생각해낸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본 케빈이 벙찐 표정을 지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그럴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