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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34화 (3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34화

엘리자베스가 정문 회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케빈 퍼킨이 [후세를 위하여]라는 글씨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빈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티 나게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가 그의 코앞에 다다랐을 때까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케빈.”

“아, 깜짝이야!”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흘끗 보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뭐예요. 공녀님 주제에 옷은 왜 그렇게 입어요?”

“공녀님은 뭐 입으면 안 되는 옷이 따로 정해져 있어? 빨리 가자. 내가 말한 퀴닌 분자의 합성식은 실험해 봤어?”

엘리자베스는 재빠른 걸음으로 어제 왔을 때 들어갔던 정문 쪽 로비로 향해갔다. 그러자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뒷덜미를 잡아채다시피 해서 다시 끌어왔다.

케빈은 겨우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지만 엘리자베스랑 키가 엇비슷했다. 엘리자베스는 성인 여성보다 살짝 키가 작은 편이었고 케빈은 그 나이 때의 소년보다는 키가 훨씬 큰 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분한 기분으로 케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케빈은 그런 엘리자베스의 소심한 반항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그녀를 혼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예요. 외부인은 그쪽으로 출입이 안 된다구요.”

“하지만 어제는…….”

“어제는 댁이 공녀님이었고 오늘은 그냥 과자 팔이 소년이잖아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외부인은 어디로 다니는데?”

“저쪽이요.”

케빈이 가리킨 곳에는 더러운 헛간으로부터 이어진 위태로운 철제 계단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며 경악한 얼굴로 케빈에게 물었다.

“저거 한 번에 우리 두 사람이 다 올라가도 안 무너지는 거 맞니?”

“그럼요, 청소부들은 엄청 무거운 포대를 들고도 올라간다구요.”

하지만 나는 포대가 아닌데…….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손가락으로 밀기만 해도 흔들릴 것 같은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케빈은 콧방귀를 뀌곤 케빈이 손을 대기만 해도 끼익거리는 철제 계단 위로 몸을 실었다.

“저도 맨날 이쪽으로 다녀요. 감히 응접용 로비로 다니다가 교수님들한테 들키면 뺨 몇 대는 각오해야 된다구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눈에 자신이 한심스럽게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그 위로 올라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케빈은 날렵한 소년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심장을 옥죄고 있던 두려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올라와야 실험실을 보여주죠. 뭐하는 거예요!”

왕립학술원의 실험실을 볼 수 있다고? 광학 현미경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화학물과 위대한 과학자들의 실험식이 존재할 그곳.

엘리자베스는 그곳의 공기 한 움큼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하일 강 도개교의 철제 구조물 위를 걸으래도 걸을 수 있었다.

“올라가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지르며 철제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거짓말 안 하고 철제 계단이 15도 각도 쯤 휘어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보는 게 낫겠어!

* * *

엘리자베스가 헉헉거리며 계단의 정상에 올랐을 때는 케빈은 그녀를 약 올리듯이 뭐인지 알 수 없는 물질에 의해 움푹 파이거나 색깔이 기묘하게 변해버린 바닥을 가볍게 밟으며 복도 끝으로부터 3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보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그래도 나름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 치익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대체 이곳에서 과학자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케빈을 보았다.

케빈은 하얗게 질린 엘리자베스를 잠시 바라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녀에게 걸어왔다.

“마차라도 대령해드려요, 마님?”

“대체 어딜 밟아도 되는지 모르겠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한숨을 푹푹 쉬며 먼저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엘리자베스는 울상이 되어서 그의 뒤를 쫓았다.

“여기에요.”

1시간 같은 1분이 지나고,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가리키는 3번째 방에 섰다.

거기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체 어떤 화학물질인지 알 수 없을 끈적끈적한 물질이 책상에 엎어져 있고, 열린 창문으로는 쉴 새 없이 더러운 기체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한 구석에서는 뭔가가 끓고 있었으며 또 벽면의 유리로 된 창에는 누가 깨트린 건지, 아니면 알아서 깨진 건지 알 수 없는 자국들이 잔뜩이었다.

“……혹시 도둑이 들었었니?”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그녀를 의아하게 보며 말했다.

“도둑이요?”

“그래. 왕립학술원에 침입자가 있다니. 당장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에요! 여긴 원래 이렇다구요.”

“원래…… 이렇다고……?”

엘리자베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실험실 내부를 보았다.

이 실험실에는 왕립학술원의 위대한 학자들이 사용하는 실험실에 있어야할 휘황찬란한 아우라는 다 어디로 가고, 당장 노숙자가 자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진창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엘리자베스는 분명 지금 끓고 있는 양은 냄비로부터 나는 냄새 때문인 게 분명한 두통을 느끼며 케빈을 바라보았다.

“저, 저렇게 둬도 되는 거야?”

엘리자베스가 냄비에서 끓는 무언가를 가리키자 케빈이 이제야 봤다는 듯이 얼른 그쪽으로 걸어가 불을 껐다.

“아이고, 이거 또 교수님이 해장하신다고 토마토 스프 끓이셨다가 다 태웠네. 일단 앉아요, 앉아.”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끈적거리는 액체를 대충 옆에 있는 걸레로 닦아버렸다. 아마도 인공 화학물은 아니고 그냥 어떤 교수의 망한 음식물인 것 같았다.

대체 과학자들은 왜 이러고 산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엘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늘 칠칠치 않게 여기저기 뭘 흘리고 다니고, 연구에 집중하면 수프 그릇에서 푸른 색 곰팡이가 필 때까지 뒀다가 다시 먹기까지 했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품질을 떨어뜨려야 가능한 일일까?

엘리자베스는 케이 앞에서 뻔뻔하게 외쳤던 자신의 결심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댁 덕분에 안 쫓겨나게 되었어요.”

“저온 살균에 성공했구나?”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자신이 앉은 나무 의자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를 잊어버리고 빙그레 웃었다. 케빈은 얼굴이 벌게져서 대답했다.

“네. 엄청난 발견이라던데요? 교수님이 이번 논문에 제 이름을 실어줄 거라고 하셨어요.”

“잘 됐다.”

엘리자베스가 그 말에 건너편에 놓인 케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케빈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케빈은 얼른 손을 빼며 말했다.

“내, 내 말은……! 고맙다 이거예요!”

케빈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창가에 가서 고개를 빼꼼 밖으로 내밀었다. 마치 달궈진 얼굴을 식히려는 듯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의 뒷모습을 다소 의아하게 보다가 본론을 꺼냈다.

“그보단 내가 말한 퀴닌 합성식은 실험해 봤어? 생각보다 금방 될 텐데.”

인공합성물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실제로 방법을 알고만 있다면 합성 자체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지만, 수율1)이 낮으면 그보다 많은 양의 합성물을 얻고자 재실험을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지금 엘리자베스에게 필요한 양은 그다지 많지 않고 무엇보다 합성식을 이미 전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퀴닌의 합성 성공은 물론이요, 그 성공을 통해 논문을 쓰고 신문에 새로운 약의 발견을 공표하는 것까지 모두 일주일이면 빠듯하더라도 해결될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일주일.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결혼식까지 남은 기간이다.

“아, 그거요. 해봤어요. 그런데…….”

케빈이 찝찝한 얼굴로 창문에서 얼굴을 떼며 말했다.

“그거 생각보다 수율이 상당히 낮던데요?”

“얼마나 낮은데? 만든 거 있어? 보여줄래?”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수율이 낮다는 것을 알았다는 건 일단 케빈이 합성에는 성공을 했다는 뜻이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반짝거리는 눈이 부담스럽다는 듯이 다른 책상으로 가서 플라스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든 하얀 가루를 저울 위에 올린 케빈이 눈금을 보여주었다.

“겨우, 이만큼?”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기록한 실험지를 살폈다. 그리고 기록된 내용에 살짝 실망했다. 수율이 낮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10퍼센트도 안 되다니.

이 정도면 미리엄이 한동안 먹을 약을 만드는 데에만 한 달이 걸릴 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든 약을 임상적으로 증명하기만 하고 재결정하는 시간 동안에 엘리자베스가 논문을 쓰는 걸 보조하면 일주일 안에 논문 정도는 완성할 수 있었다. 미리엄의 치료는 케빈에게 부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재결정2)하고 약을 더 만들자. 논문은 내가 도울게. 아니, 내가 거의 쓰다시피 할 수도 있어. 논문은 많이 읽어봤으니까…….”

“아뇨,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때,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말을 막았다. 케빈은 상당히 곤란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이게 학질 치료제라구요? 학질이면 보통 도시 노동자들이 걸리는 병이잖아요. 그쵸? 그런 사람들이 약을 사먹을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럴 수 있다 해도 노동자들의 질병 치료제에 돈을 댈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빈의 곤란한 얼굴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깨달았다.

제약이란 가장 실용적인 과학의 분야이자 그만큼 가장 사회적 영향을 많이 받는 분야였다. 그 약을 먹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 사람들이 약을 돈주고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계급인가, 아닌가. 그런 것들이 제약 회사의 이익 계산에 첨예하게 영향을 끼쳤다.

제약 회사의 고려 항목에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간 퀴닌이 개발되지 못했던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학질은 가난한 자들의 질병이기 때문에 수익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년쯤 레본 정부에서 무역 활로를 찾기 위해 갑작스레 학질 같은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뱃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하기 전까지 퀴닌이 한동안 제약 회사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던 이유였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며 케빈을 노려보았다.

“있어. 그런 사람. 당장 돈이 안 되어도 날 믿어달라고 하면 믿어줄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은 돈이 아주 많아.”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으로 한 남자를 떠올리며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퀴닌은 반드시 돈이 될 거야. 왜냐하면 내가 이걸로 단순히 약을 만들 게 아니니까, 케빈 퍼킨.”

엘리자베스의 계획 속에는 1년 후면 전국에서 대히트를 칠 건강 음료, 토닉워터에 대한 계획까지 서 있었다. 퀴닌이 대중 음료가 되는 순간 퀴닌은 꼭 노동자들의 약만은 아니게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려 문 근처를 바라보았다. 외부인인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 곤란해졌다. 경비병한테 질질 끌려 나가게 되는 걸까?

엘리자베스가 숨을 곳을 찾는 사이, 케빈이 한가롭게 말했다.

“아, 니콜라스 교수님인가 봐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분이 왜?”

“왜긴요. 저온 살균에 성공했잖아요, 당신 덕분에.”

“……그래서?”

케빈의 평온한 얼굴이 엘리자베스에게는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불길한 기분으로 물었다. 저온 살균에 성공한 거랑 니콜라스 교수가 지금 이곳으로 오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교수님이 저온 살균을 성공시킨 사람의 이름을 실고 싶다고 하셨어요. 처음엔 제 이름일 싣고 싶어 하셨는데, 그걸 성공시킨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했죠. 그러니 이름을 실으시려면 당신 이름을 실으셔야 한다고 했어요. 공동저자로요.”

“뭐?!”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장 케빈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너 내 얘길 했어? 교수한테?!”

“그럼요. 저온 살균을 성공시킨 건 오롯이 당신 아이디어잖아요.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건 도둑이나 하는 짓이에요.”

케빈 퍼킨, 이 자식은 또 왜 쓸데없이 이렇게 양심적이란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당장 케빈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 하던 그때, 실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엘리자베스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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