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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33화 (3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33화

거울 속에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하얀 색 드레스…….

아니, 하얀 색 털에 휩싸인 자신.

저게 뭐지?

저게 나라고?

엘리자베스는 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것을 보다 겁에 질린 얼굴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케이가 없고 어느새 희고 유약한 엘의 얼굴이 있었다.

“너도 한때는 인간이었는데…! 엘리즈…… 흐윽…….”

슬픔에 잠식당한 엘의 얼굴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리볼버였다.

자신에게로 향한 총구를 보며 엘리자베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엘이 소리쳤다.

“괴물로 살고 싶은 게냐?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괴물로 남고 싶은 게야?!”

엘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몸부림이 멈췄다. 엘의 등 뒤로 거울 속에 카펫 위에 뒹굴고 있는 한 남자의 시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괴물에게 물어뜯긴 듯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 그 시체의 정체는 케이 하커였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피를 뒤집어쓴 채 울부짖었다.

펑!

화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엘리자베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을 땐, 벌써 동이 튼 지 오래였다. 예상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것 같았다.

잠은 오래 잤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어젯밤에 또 비슷한 꿈을 꿨다. 두 사람의 첫날 밤, 케이를 물어뜯고 하얀 털에 뒤덮인 짐승, 몰록이 되어 숲을 달리는 꿈 말이다.

꿈을 생각하자 어깨에 소름이 잔뜩 돋은 것이 느껴졌다.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젯밤에는 꿈속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어 몰록이 되었고 오늘 밤에는 스스로가 몰록이 되었다. 이 꿈들은 닥쳐올 미래를 보여주는 예지몽인 걸까?

엘리자베스는 오늘부터는 제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일지로 만들어 보관할 계획으로 서랍장에 손을 뻗었다. 거기엔 펜이나 종이 대신에 따뜻한 컵과 말라비틀어진 호밀빵이 놓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서랍장 앞에 의자를 등받이가 앞으로 오게 해서 등받이에 턱을 괴고 앉은 케이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보고 움찔했다. 어젯밤 꿈속에서 카펫 위에 갈가리 찢겨 누워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단호하게 말했다.

“똑바로 앉아. 의자는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하여간 귀족들이란.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야?”

케이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끌고 엘리자베스 옆으로 온 뒤 제대로 앉았다. 그러고는 따뜻한 커피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직접 가지고 왔어?”

“어. 여긴 호텔이 아니라서 여관 주인이 커피 심부름 같은 건 안 해.”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꼬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것도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따뜻한 커피 향이 코 속으로 파고들자 머리가 약간이나마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너는 안 마셔?”

“이미 마셨어.”

그렇게 말하는 케이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엿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많이 못 잤어?”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난 너랑 달라.”

“또 무슨 시비야.”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호밀빵을 우물거리며 말하자 케이가 뒷목이 뻐근하다는 듯이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네가 거기 그러고 누워 있으면 난 못 잔다는 거야.”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눈짓으로 엉망이 된 시트를 가리켰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반라 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시트를 올려 다리를 덮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까먹었어!”

“그걸 까먹을 수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야.”

케이는 그녀에게 쏘아붙이곤 마른세수를 했다.

“어제는 아무 말 안 했으면서.”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곤 얼른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일어나면 말려 올라간 셔츠가 내려와 아주 짧은 원피스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은 케이 하커가 제 허벅지를 응시하는 시선을 알아차린 후였다.

엘리자베스가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제 다리에 난 흉터를 깨닫기가 무섭게 케이가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의자는 아예 바닥에 내팽개쳐버리면서 말이다.

케이는 그녀를 침대에 앉히고 그녀의 오금 아래에 손을 넣어 그녀의 허벅지를 제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여린 살결에 케이의 손가락이 닿았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몸을 떨었다.

“뭐, 뭐 하는 거야!”

“공작이 이런 거야?”

그러나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동요 따위에 신경 쓸 정신이 없다는 듯 불꽃이 튀는 듯한 눈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살폈다. 당장 그녀를 낱낱이 벗겨내서 상처를 확인하고 싶은 것을 꾹 참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창피한 거지. 전생에서 이미 서로의 몸을 확인하지 않았나? 아니, 그보다 더한 것도……. 엘리자베스는 달궈진 쇠처럼 뜨거운 뺨을 제 손으로 가리며 대답했다.

“……어, 어젯밤에 안 봤어?”

“미쳤어? 내가 널 훔쳐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케이는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허벅지 위의 상처를 커다란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때마다 움찔거리자 케이의 얼굴이 더 굳었다.

“아파?”

아파서 그런 게 아닌데. 오히려 통증은 이상할 정도로 거의 없었다.

“……이제 거의 다 나았어.”

“도자기를 깰 게 아니라 공작을 죽여버렸어야 해.”

“나도 그랬어야 했나?”

엘리자베스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피가 스며 나온 케이의 이마를 매만졌다. 열이 감지되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소독은 다시 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마에 엉성하게 붙어 있는 제 속치마 자락을 떼어내고 말했다.

“흉터가 남을 거야. 그러니까 누가 밤새 이 상태로 눈이나 맞으면서 서 있으래? 괜히 다른 남자 집에 데려다주기나 하고.”

엘리자베스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케이를 신경질적으로 밀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케이가 빵과 커피가 담긴 트레이와 함께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그나마 깨끗한 수건을 찢어 독주를 묻혀서 다시 돌아왔다.

이 여관에 웬일로 깨끗한 수건이 있었을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상처를 꼼꼼하게 소독하며 궁금해했다.

케이는 어젯밤보단 통증이 덜한 듯 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아?”

“윌리엄 조쉬랑 너 사이에?”

“그래.”

“별로 알고 싶지 않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알겠어.”

“조금도 믿지 않는 얼굴인데?”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얼굴을 빤히 보자 케이가 한숨을 내쉬곤 대답했다.

“믿어. 그 자식이랑 무슨 짓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냥…….”

“그냥?”

“네가 그 자식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게 싫어. 둘이 가까워 보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케이의 얼굴에 진심으로 불쾌함이 떠올랐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어쩔 도리 없이 부드럽게 웃고 말았다.

“왜 웃는 거야? 지금 비웃는 거야?”

“그냥. 네가 나한테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구나, 싶어서.”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피가 묻은 수건을 양동이에 담긴 깨끗한 물에 빨아서 다시 케이의 상처에 가져다대자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있지. 내가 너한테 개 같은 자식이라는 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말이 엘리자베스의 목구멍 안을 지나갔지만 지금으로선 모두 부적절한 말들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모든 말을 삼키고 그저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내가 로버트 하커 씨 댁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튀었으니 그 댁에 사과라도 하고 와야겠지. 저녁 때 같이 가자.”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필요 없어. 수습하더라도 내가 해. 이번 일은 수습도 필요 없지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가 제 상처를 봐주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것보다 언제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어?”

“어릴 때부터?”

“그런데 왜 네가 하는 말은 전부 음악이니 예술이니 원예니 그런 따분한 것들이었지?”

엘리자베스는 그 따분한 것들에 대한 책을 서재에 한가득 모아둔 케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 것도 싫지 않았어. 좋지도 않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상처 위에 수건의 가장자리를 대고 묶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뭔가를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그런 생각 같은 거 못해봤어. 어릴 때는. 그런 게 나한테 허락되지도 않았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쉐필드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 그 내면마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각하려고 들었던 아버지. 장원 내에서는 공주님처럼 대접받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벌벌 떨기만 하던 농노들.

쉐필드의 푸르른 자연과 탁 트인 하늘은 그 자체로 이미 거짓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전히 기름 냄새가 나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내가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건 일평생 너뿐이야.”

엘리자베스는 코가 시큰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왜일까.

만약 치료제를 구하지 못한대도 남은 6개월은……. 그 6개월만큼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이 그녀 앞에 펼쳐졌는데. 6개월이 끝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여긴 그녀였는데.

그 삶 속에 케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가슴을 끔찍하게 저며 왔다.

* * *

케이 하커는 찜찜해하면서도 그녀를 옴니버스 정거장 앞에 내려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절대로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당장 돌아가 의사에게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걱정하지 마. 미리엄 때문에 안 그래도 한두 시간 후에 의사가 오기로 했어.”

그녀는 케이의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옴니버스에 올라탔다. 전처럼 옴니버스 마부에게 후하게 동전을 지불하는 대신 딱 정해진 동전만 내고 셔츠에 바지를 입은 채 노동자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 앉았다.

옷에서 냄새가 좀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면 너무 눈에 띄었다. 케이는 알아서 수습하겠다고 했지만 지금 클레몬트 공작가며 하커 가문이며 여기저기 사고 쳐놓은 게 많은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선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마부 옷을 입고 모자로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를 가린 것이었다.

그녀는 그 차림으로 왕립학술원 앞에 내렸다. 어제와는 달리 경비병이 그녀를 붙잡았다.

“이봐. 어딜 들어가려고.”

엘리자베스가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온 과자 봉지를 들어 보이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1봉지에 1페니. 요 앞 말고, 저 뒤쪽에서 장사할게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부러 모자 아래의 얼굴을 너무 들어올리진 않았다. 경비병이 망설이자 엘리자베스는 얼른 그에게 동전을 우르르 쏟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가 드레스를 입고 클럽에 들어가려고 할 때 경비병에게 내밀었던 돈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액수였지만 그걸 본 왕립학술원 경비병의 얼굴은 환해졌다.

“뒤쪽에서만 장사하는 거야, 엉?”

엘리자베스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과자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돈을 많이 쓰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걸, 그녀는 또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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