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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32화 (3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32화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슬쩍 돌아보았다. 케이는 눈을 꽉 감은 채 턱을 악물고 있었다. 저러다가 어금니가 상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걱정은 뒤로 하고 제 다리를 살폈다.

채찍으로 맞았던 자국이 흐려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염증이 생길 것처럼 뜨끈거려서 소독약을 발라놓고 잤었는데— 지금 상태는 마치 열흘은 된 상처인 것처럼 까진 곳에는 딱지가 앉고 안에서 터진 상처는 얼굴의 멍처럼 많이 옅어져 있었다. 상처 회복 속도가 비정상적이다.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돈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크흠. 다 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헛기침을 하는 것을 들으며 얼른 옆에 있는 더러운 수건을 들어 양동이에 넣고 적셔 물소리를 냈다. 그러자 케이가 그 소리도 듣기 싫다는 듯이 몸을 모로 뉘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수건을 더 꼭 짜서 겉으로 보이는 부위만 박박 닦았다. 다행히 아까 윌리엄 조쉬의 집에서 간단하게 물수건을 받아 씻었으므로 그렇게 더러운 곳은 없었다. 게다가 물과 수건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아서 솔직히 몸 이곳저곳을 닦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벗어 발도 닦을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냄새가 날 텐데 한번 벗었던 스타킹을 다시 신기는 찝찝할 것 같아 관뒀다.

원래 신고 있던 스타킹을 계속 신는 건 괜찮고 한번 신었던 것을 벗어뒀다 다시 신기는 싫은 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비과학적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셔츠, 그리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만 신은 채 침대 밑으로 갔다.

케이는 고집스럽게 모로 누운 채 그대로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제 몸에 난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지 못하도록 초를 후 불어 껐다. 엘리자베스가 불을 끄고 케이의 몸 아래 깔려 있는 이불을 끌어당기자 케이가 살짝 몸을 틀더니 엘리자베스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빛났다. 수풀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개처럼 말이다.

“조용히 자.”

“너만 없었으면 나는 벌써 잤을 걸.”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케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팔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 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과거의 기억이 그녀의 몸을 장악했다. 두 사람이 동침했던 날에 대한 기억은 결코 좋은 것들이 아니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렸다. 로킨트 저택에서의 용기는 전부 휘발된 사람처럼 말이다.

“……방이 춥잖아. 몸을 데워야 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듯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살짝 당겼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품 안으로 들어가 웅크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곤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둘 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몸에서는 늘 기계의 냄새가 났다. 비릿한 것이 피 냄새 같기도 하고 텁텁한 것이 숲의 냄새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냄새의 정체는 피도 아니고 숲도 아니었다.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의 냄새였다. 기계의 녹, 유제, 휘발유 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가짜 냄새.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그 가짜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진짜라고 우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고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러자 케이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엘리자베스가 낮게 웃자 케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웃지 마. 특히 이런 상황에선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웃지 말라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살짝 몸을 떼고 그를 보았다. 그의 몸 위로는 달빛이 창을 통과해 쏟아졌고 밖에서 내리는 자잘한 눈송이들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 탓에 그의 얼굴이 점박이처럼 보였다.

“멀어지라는 뜻이 아니었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멀어지려고 한 게 아니야. 그냥 네 얼굴을 보려고 한 거야. 그러려면 조금 뒤로 물러나야 하니까.”

엘리자베스는 이불을 끌어올려 코 아래까지 덮고 손가락으로 케이의 코끝을 살짝 쳤다.

케이가 뭔가에서 초탈한 얼굴로 그녀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래. 이렇게 하니까 추위에 새파래진 네 얼굴이 잘 보인다.”

케이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코끝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케이는 곧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삼켰다.

부드럽고 뜨거운 살점이 엘리자베스의 입 안을 헤집어놓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엘리자베스가 버거운 숨을 뱉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밀려나지 않도록 그의 두터운 손이 그녀의 등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허벅지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얽혀 들면서 그의 달아오른 체온이 그녀에게도 감지되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든지, 몰록이라든지, 눈앞에 닥친 위태로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안에서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케이가 입술을 뗐다.

“하…….”

엘리자베스가 진한 숨을 내뱉자 케이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곤 품 안에 꽉 가두고 말했다.

“마음이 바뀌면 말해.”

“무, 무슨 마음.”

엘리자베스는 멍청하게도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퀴닌인지 뭔지 그걸 성공시켜서 나와 네 망명자금을 대겠다는 네 계획 말이야.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고 싶다면 그냥 바로 말하라고.”

“……그러지 않을 거야. 성공하더라도 함께 떠날 수 있을지 그럴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몸이 움찔했다. 성공하더라도 함께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케이에게 타격을 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그 기묘한 괴물에게 물려 이상하게 변해가는 게 사실이고, 또 지금으로선 그걸 치료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엘리자베스로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엘리자베스의 예상대로 몰록이…….

감염자였던 인간이라면.

몰록에게 물린 인간이 몰록이 되는 거라면—

자신은 지금 괴물이 되어가는 중인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가스등으로 활활 타오르듯 화려하게 밝기만 했던 로버트 하커의 저택과 그 안에서 피를 흘리던 케이 하커를 떠올렸다. 그렇게 괴물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온 케이 하커에게 또 다시 괴물을 사랑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네가 나한테 맘대로 왔던 것처럼 맘대로 가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케이는 일그러졌던 얼굴을 수습하듯 또 건방지게 웃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콧잔등과 이마, 귓불에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입술을 가져다대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있자. 지금은.”

* * *

엘리자베스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신방으로 들어가는 문턱 앞에 서 있었다. 그건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게는 존재하는 기억, 두 사람의 첫날밤의 광경이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결혼이 무르고 싶어졌나?”

엘리자베스가 얼을 빼고 있자 뒤에서 케이의 삐뚤어진 목소리가 그녀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렇게 말하며 케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이 닿은 어깨에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문턱…….”

“뭐?”

“신부가 신방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진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올려다본 케이의 얼굴에는 오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군. 어차피 우리 결혼은 행복할 수 없어.”

케이는 어쩐지 단단히 경직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케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할 수 있는 한 세게 때렸다.

그러나 그녀의 체중을 실은 타격이 조금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듯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곤 단숨에 그녀의 오금 아래에 손을 넣고 그녀를 들어올렸다.

“……읏!”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려다가 파티를 즐기던 손님들이 그녀와 그를 주목할 것이 두려워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은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 하커는 그녀를 안아 올린 그대로 신방 문턱을 넘어 그녀를 침대 위에 단숨에 올려두었다.

“이러면 넘어질 일이 없지.”

케이는 공장에서 천 뭉치를 옮기고 난 노동자처럼 그녀를 침대에 던져버리곤 멀찌감치 앉아서 와인을 진처럼 잔에 부어 벌컥벌컥 마셨다.

엘리자베스는 뒤집어진 치마를 잡아 내리며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네 쓸데없는 걱정을 덜어줬을 뿐이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초조한 듯 다리를 떨었다.

밖에서는 화려한 클레몬트 공작의 응접실에 모인 손님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배!”

“두 가문의 화합을 위하여!”

즐거워 보이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케이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저치들이 왜 안 가고 있는지 알아?”

“우리 결혼을 축하하려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신부나 신랑이 신방에서 도주하는 걸 막으려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때의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빛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너는 나한테서 도망갈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얼마나 열렬히 빠져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케이는 왜 저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걸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러운 짐승 털로 만들어진 푹신한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다리 아래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고릿적처럼 피가 묻은 침대 시트를 가지고 나가야 되는 건 아니더라도, 이제는 그냥 도망칠 수는 없어. 여기서 나가려면 나랑 파혼해야 돼.”

피라는 말보다 파혼이라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케이를 보았다.

혹시 케이 하커는 여기까지 와놓고 막상 자신과의 잠자리가 싫어서 도망갈 마음이라도 먹은 걸까?

엘리자베스는 화려하게 장식된 흰색 드레스와 부부간의 신의를 상징하는 치렁치렁한 진주목걸이로 장식한 채 방금 제 남편이 된 남자를 불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도망가려면 지금 말하라는 뜻이야. 엘리자베스…… 하커.”

엘리자베스 하커.

케이의 입에서 제 새로운 이름이 나오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땀을 닦기 위해서 손에 소중하게 들고 있던 손수건을 꽉 쥐었다. 그것은 결혼식 열흘 전 쯤,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라는 처녀 적 이름을 수놓아 준 것이었다.

“네가 도망가고 싶은 건 아니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꿈틀했다. 케이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깨끗하게 비우곤 그녀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내가 지난 시간 내내 너한테서 도망치고 싶어 했어도 지금은 아니야. 넌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자식인지 간과하고 있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머금었다. 진한 포도주의 향기가 그녀의 정신을 파고들어왔다.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혀들 새도 없이 케이는 그녀를 먹어치울 듯이 조급하게 굴었다. 그의 입술은 그녀를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몸 위를 돌아다녔다.

“……내가 널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너는 몰라.”

케이의 말과 함께, 밖에서 탐욕스러운 귀족 무리와 사업가 무리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또 누군가의 시답잖은 농담이 분위기를 달구는 모양이었다.

웃음으로 욕망을 덮으려는 애처로운 시도. 이어지는 실패. 서로를 이용하려고 하면서 이용당하는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이들. 경멸에 혐오로 답하는 화려하게 치장된 사냥터.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자신의 결혼식의 진실을 몰랐었던가? 아니면 알고도 눈을 감았던가?

엘리자베스는 꿈속에서 기억을 재연하면서도 헷갈렸다.

그렇게 케이의 아래에 깔린 그녀는 도망갈 곳 없는 궁지에 몰린 채 포식자의 시선 앞에 선 사냥감처럼 바르르 떨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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