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31화
“무슨 조건 말입니까?”
윌리엄 조쉬가 꽤나 초조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자 엘리자베스는 잠시 이 상황이 주는 불안감을 털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통쾌하달까.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가지고 노는 데에 쾌감을 느끼는 게 적절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는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졸음기가 눌어붙은 눈을 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간단해요. 칼몽 여관에 방을 한 칸 빌려줘요. 그 대가는…….”
“내가 지불하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항의하려는 윌리엄을 막아선 것은 케이 하커였다.
그가 기다렸듯이 말하자 윌리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설마…….”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그녀가 케이에게 그와 동지들의 정체를 발설했을까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현관 앞 어딘가에 있을 리볼버를 찾고 있다는 것도.
‘정말 망할 혁명가 놈의 자식.’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윌리엄의 시선 앞으로 돌아서며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당신이 유력한 공직자의 귀부인과 놀아났다는 사실은 케이에게 말했어요. 그게 누군진 말하지 않았죠. 어쨌든 당신이 내게 약점을 잡힌 덕에 적절한 보상만 있다면 나에게 당신의 밀회 장소를 내줄 거라는 걸 이제 케이도 알고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에게 위협적인 눈빛을 보냈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가 그의 비밀을 케이에게 발설하지 않았다고 돌려 말한 것을 눈치챈 듯했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도 될지 찝찝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해미쉬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이 광경을 고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할 건데요? 두 사람도 거기서 밀회를 즐길 겁니까?”
윌리엄의 말에 케이 하커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백지 수표를 꺼내, 가지고 있던 펜으로 큰 금액을 적고 서명했다. 윌리엄은 그걸 보곤 눈이 동그래졌다.
“내 약혼자가 머물 곳이야. 앞으로 여드레 치의 여관비라고 생각해. 이딴 구린 여관에서 내 사람을 재울 순 없지 않나.”
내 사람.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잠시 몸을 떨었다. 과거 들었던 내 아내라는 말보다 훨씬 이상한 전율을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소유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드레. 두 사람의 결혼식 전에 두 사람은 이 관계를 끝맺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으므로 몰래 현관에 있는 반신 거울을 힐끔 훔쳐보았다. 케이에게 던지는 시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주 잠깐만.
그러나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시선에 닿은 것은 케이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었다. 안색이 다소 파리하긴 해도 반듯하고 깔끔한 자신의 얼굴.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만졌다. 생각해보니 오늘 이 시간까지 화장을 덧칠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그녀의 상처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체 왜 멍이 벌써 이렇게 흐려진 걸까?
멍은 내출혈이다. 타박상으로 인해 출혈이 일어나 피부 아래로 퍼진 피가 흡수되고 분해되어야 사라진다. 거기엔 보통 인간이라면 수일이 걸리는데…… 보통 인간이라면…….
엘리자베스가 얼을 빼놓고 있는 사이, 윌리엄이 세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깨고 말했다.
“내가 거절하면 어떡할 거죠? 아니면 돈만 받고 당신들의 요구는 싹 무시하면?”
윌리엄이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케이가 뭔가를 말하기 전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가슴을 짓누르는 불길함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 말에 윌리엄의 얼굴이 굳어짐과 동시에 케이가 문을 발로 차서 열어버렸다.
쾅! 문짝이 부서질 듯한 소리가 나면서 차가운 바람이 세 사람 사이에 돌았다.
케이가 포효하듯 말했다.
“이제 나가지! 윌리엄 조쉬, 거래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이건 다시 가져가겠네.”
케이는 현관문 앞에 올려놓았던 수표를 챙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윌리엄이 해미쉬를 보고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해미쉬. 두 분을 당신 사촌 동생의 집에 데려다줘. 남들의 눈을 피해 즐길 만한 좋은 방을 알려달라고 하고.”
윌리엄은 분노한 케이의 얼굴을 보며 콧방귀를 뀌곤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나를 과대평가해준 건 고맙지만, 클레몬트 양, 나라면 남을 쓸데없이 후하게 평가하지 않겠소. 사람에겐 누구나 제 몫을 지키기 위한 잔혹성이 숨어 있는 법이니까. 돈이 잠시 그 잔혹성을 길들인 것처럼 보일 순 있겠지만 말이오.”
윌리엄은 그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이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과소평가해준 건 고맙지만, 윌리엄 경, 나라면 경처럼 남의 계산속을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함부로 충고하지 않겠어요.”
* * *
“미쳤어?”
칼몽 여관의 상태를 본 케이는 그녀에게 그녀가 제정신인지를 열 번 정도 물었다.
“……나한테 연구실이 필요해.”
“그럼 로킨트 저택에서 해. 연구인지 뭔지. 그 망할 서재도 난 거의 안 쓰니까.”
엘리자베스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만 주어진다면 케이의 성질머리를 제일 연구하고 싶었다.
“거긴 아버님으로부터도 우리 아버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잖아. 중요한 건 내 정체를 추측하지 못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장소야.”
그녀의 말에 케이가 입술을 물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당장 집사에게 말해 제 소유의 로킨트 저택에 있는 쥐새끼들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쥐새끼처럼 제 집에 숨어들어 간자 짓을 한 놈들 때문에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진짜 쥐가 나오는 방에서 머물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케이였다.
“이런 방에서 잘 수 있을 리가 없어. 게다가 당장 네가 없어지면 클레몬트 공작과 내 아버지는 난리가 날 거야. 우리가 파혼할 거라고 널리 신문 광고라도 때릴 셈이야? 이건 미친 짓이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선 오늘 밤만 잘 거야. 일단 내일 아침에 빨리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내일부턴 다시 너네 집에서 자면 되지. 연구만 여기서 하는 거야.”
그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 네 이름으로 발표하면 돼. 퀴, 퀴…… 닌? 그런 걸 네가 발표했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게 아니잖아.”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게 문제야,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아래층에서 쿵쿵거리는 남자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들은 윌리엄의 동지들이 아닐 것이다. 윌리엄이 칼몽 여관을 유지하는 것은 칼몽 여관이 무척 허름한, 평민들을 위한 여관 및 펍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윌리엄이 칼몽 여관을 이용하는 이유는 칼몽 여관의 주인장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해미쉬의 사촌인 그녀가 연락책 역할 같은 걸 하는 거겠지.
물론 이건 추측에 불과하고 의외로 이 여관 지하실에 폭탄이나 소총 같은 게 즐비했는지도 모르고 저 평범해 보이는 이들이 전부 윌리엄의 동지로 유사시에는 지하실에서 총을 꺼내 전투태세를 갖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엘리자베스는 그냥 윌리엄 조쉬를 믿기로 했다. 과거 어떤 이유를 가져다댔든, 그는 결국 엘리자베스를 도왔으니까.
“세상은 여자의 이름이 담긴 논문으론 절대 뒤집어지지 않아. 내가 발표할 논문에 적힌 과학적 발견이 참신하면 참신할수록 표지엔 남자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만 해. 그게 아니면 왕립학술원에서 퀴닌의 합성식을 용인하지 않을 거야.”
그럼 엘이 자신을 찾아오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왕립학술원 따위의 용인이 뭐가 중요하지?”
“뭐가 중요하냐니. 당연히 중요하지. 이 나라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게 학술원이야. 그곳을 통하지 않고선 그 어떤 발견도 인정받지 못해.”
“그런 건 필요 없어. 네가 발견한 합성식이 엄청난 거라며.”
케이는 바닥 아래에서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불쾌한 표정을 해 보이며 말했다.
“엄청난 거여도 사람들의 인정은 중요하지. 그래야 돈도 벌고 그 과학자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어서 어디론가 떠날 수도 있지. 너도 내가 아까 과학자라고 했을 때 비웃는 표정을 했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바닥에 깔린 나무판자 아래만 뚫어지게 보던 케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난 널 비웃지 않았어.”
“애써 부정하지 마. 다 티 났어.”
“넌 바보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나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네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넌 바보라고.”
내가 바보면 넌 머저리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충분히 지쳐있었기 때문에 말없이 케이를 지나쳐 침대에 앉았다.
침대 매트리스 충전재는 어디로 다 빠져나갔는지 앉자마자 그녀의 엉덩이가 철제 틀에 닿았다. 하지만 하루 정도라면 잘 수 있을 것이다.
엘을 따라 이보다 더한 곳에서도 자지 않았나. 그녀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제 나가. 너무 피곤해. 지금 자두지 않으면 아침 일찍 움직일 자신이 없어.”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여관방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그러더니 커다란 사내 두 명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 보곤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이고, 화장실인 줄 알았네. 죄송합니다.”
“정신 좀 차리라고. 잭!”
두 남자가 사라지자 케이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달래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할 때, 케이가 먼저 움직였다. 케이는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옆에 있는 서랍장을 옮겨 문을 막고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
그러곤 당황해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그녀의 옆으로 걸어와 침대에 걸터앉고는 조끼를 훌러덩 벗어서 옆에 던져버렸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에 있자. 네가 자초한 거니까 구시렁거리지 마. 구시렁거리면 너를 어깨에 들쳐 메서라도 데리고 나가겠어.”
그 말과 함께 케이는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케이 하커!”
* * *
새벽 세 시가 넘어가자 아래층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사그라졌다.
따뜻하게 데운 물을 유약처리를 한 철로 만든 양동이에 담아, 몸을 씻으라며 가져다준 여관 주인의 말로는 저들은 이 근처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이라고 했다. 오늘 새벽 기차를 타고 산 깊은 곳에 있는 일터로 가서 몇 달 정도 장기체류를 하는데, 거기에 가기 위해 자정쯤에 일찍 일어나 이곳에 와서 배터지게 술과 안주를 먹고 떠나는 게 관례라고 했다.
해미쉬의 사촌동생이라는 여관 주인의 말을 어디까지 신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여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나 케이는 그녀가 묵기로 한 방을 나가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케이는 제 어깨가 다 들어차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안 자고 있다는 걸 다 아는데!
“난 몸을 닦을 거야.”
“맘대로 해.”
저 자식이 정말…….
엘리자베스는 당장 녀석의 목을 졸라주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하고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케이의 몸이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