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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30화 (3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30화

엘리자베스가 케이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마자 진눈깨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비인지 눈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눈이 좀처럼 오지 않는 리오든 기후로 따지면 올해의 첫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땅이 질척해지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케이의 이마를 꿰맸다.

바늘을 든 엘리자베스 앞에서 처음에는 살짝 두려워하던 얼굴이었던 케이의 표정은 상처 봉합을 마치고나자 한결 나아졌다. 엘리자베스는 꿰맨 자리를 살피며 말했다.

“아까 왕진 의사를 불렀어야 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웬만한 의사보다 실력이 좋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대꾸했다. 엘 선생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엘리자베스는 당장 하일 강에 몸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꿰맨 자리를 다시 꼼꼼히 소독하고 바늘을 다시 가죽 가방에 집어넣으려고 할 때 케이가 토비의 수통에 있는 독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켈토로 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손이 멎었다. 이 녀석은 어째서 아직도 그녀가 다른 남자의 집에서 자길 바라는 것일까.

케이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을 알아내려 노력했던 지난 시간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짓을 해도 이 녀석의 마음을 알아낼 수 없었을 텐데.

“나 켈토로 가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 말에 케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 나라가 곧 전쟁에 휩싸일 거라고 말했는데, 널 팔아먹어서라도 내 아버지와 공작이 이 나라를 망칠 사업에 뛰어들고 싶어 한다고 말했는데, 가지 않겠다?”

그 말엔 어폐가 있었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1년 6개월을 더 살았지만 전쟁이 이 땅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클레몬트 공작가만이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사업의 실패를 혼자 뒤집어쓰고 죽었다. 물론 제철공장에서 발견된 무기의 양은 전쟁에는 무지한 엘리자베스가 보기에도 전쟁 군수 물자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그 물자를 빼돌려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든 전쟁이나 다른 곳에 쓰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당장 몇 개월 안에 이 땅이 불바다가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본 환영은 뭐였을까. 역시 제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영이겠지.

“그래.”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내 말이라면 싫다고 말하고 보는 거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케이와 소모적인 말싸움을 이어가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2년 전부터 알았어? 네 아버지가 전쟁에 뛰어들 거라는 거.”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딱 그때부터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즈음부터 서서히 알게 된 거지. 아버지가 공작가에 빌붙어서 벌리고 싶은 사업이라는 게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규모라는 걸. ……세계적인 규모라는 걸 말이야.”

“세계적인 규모라는 건 무슨 뜻이야?”

“전쟁이잖아. 전쟁은 상대가 있어야해. 레본 혼자 전쟁을 할 순 없지.”

엘리자베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케이는 심각한 얼굴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케이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엘리자베스도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두운 리오든 밤하늘을 보며 아까의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거대한 비행선이 리오든 상공에서 무서운 화염을 토해내는 모습을 말이다.

그 광경이 불안감에 젖은 엘리자베스의 뇌가 만들어낸 망상이라면 다행이지만 몰록이 옮기고 다닌다는 전염병의 증상 중 하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엘 선생은 그녀에게 전염병의 증상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녀 역시 굳이 정확한 얘기를 캐묻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괴물에게 물리게 되는 미래는 상상도 하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엘에게 더 자세한 얘기를 묻지 못한 게 후회스러워졌다. 이제라도 엘을 찾아야 했다. 찾아서 지금 그녀의 몸과 머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낱낱이 알아내고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엘이 손가락을 세 개나 잃어버린 조수에게 치료제를 써버리기 전에. 엘리자베스의 온몸이 전염병에 잠식당하기 전에.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예상이 맞는다면 6개월 후 그녀는 죽음보다 끔찍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괴물이 되느니 사람으로 죽을 거야. 날 죽여. 엘.’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하지만 대체 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가 아는 건 전생에서는 엘이 재판소에서 나오는 엘리자베스를 그 근처에서 구해냈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지금으로부터 6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때는 이미 엘이 조수에게 치료제를 써버린 후일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행동이 자꾸만 주변 상황을 바꿔나가는 지금, 미약한 파장으로 시작된 변화가 엘의 행동반경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미 케이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나.

2년 전부터 이미 전쟁 준비에 대해 눈치를 채고 있었던 케이가 이제 와서 전쟁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혼자 켈토로 보내려고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변화가 그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까지도 변화시켰다는 증거였다.

“2년 전부터 아버지는 어떤 자리든 나를 대동하고 다니셨어. 공작가의 사위로 내정된 내 존재가 아버지의 사업에 도움을 줄 거라고 판단한 거지. 그 즈음부터 마구간 신세도 면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내 입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그럴 만도 하지. 나라도 집에서 키우는 벼룩이 감히 집안 사정을 밖에 발설할 거라고 여기지 않았을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병. 전쟁. 그리고 케이 하커와의 관계. 지금 제 앞에 놓인 문제 상황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우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치료 도구를 전부 가방에 챙겨 넣은 후, 결연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뭐?”

“너 자신을 벼룩이라는 둥, 너 스스로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나한테도 너는 내가 손에 넣어본 가장 값진 물건이었어, 케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케이는 무슨 말을 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달아오른 얼굴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을 소리를 하는군. 공녀님이 나 따위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표정을 보면서 처음으로 케이가 쓰는 ‘공녀님’이라는 말이 싫지 않다고 여겼다.

“어쨌든 내일 당장 켈토로 떠나. 켈토는 이민자들의 도시고, 멜니아 대륙은 이오페아 대륙의 이권 싸움에서 자유로운 곳이야.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그곳은 안전해. 내일 켈토로 가는 사업가가 하나 있어.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널 배웅할 거야.”

“아니, 난 가지 않을 거야.”

“넌 정말……!”

엘리자베스는 벌컥 마차 문을 열었다. 차가운 기운이 어떤 전조도 없이 무자비하게 마차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마치 그녀의 인생에 끼어든 위험한 운명들처럼.

“여기 남아 해야 할 일이 있어. 켈토가 있는 멜니아가 아니라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마음속으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인생은 슬프게도 과학과는 다르다. 과학처럼 정확한 온도와 습도를 맞추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은 없다. 인생에는 그저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해야 할 일? 그게 뭔데?”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엘리자베스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진창이 된 바닥에 서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미리엄을 고칠 거야.”

“의사 말 못 들었어? 미리엄은 학질이야. 학질은 불치병이고.”

“불치병이 아니야. 교회에서 독점하고 있는 약재를 쓰면 나을 수 있어.”

“교회에서 미리엄 같은 평민을 위해 신의 가루를 내어줄 리가 없어.”

신의 가루. 그게 나무껍질에서 채취되는 자연 상태의 퀴닌의 이름이었다. 금, 은보다 비싼 신의 은총. 교회는 신의 은총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설마 공작에게 가서 부탁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채 당장 칼이라도 뽑을 듯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대체 저 녀석은 왜 저렇게 성질머리가 나쁠까?

“아니야. 부탁한다고 들어주실 분이 아니야.”

“그럼?”

“내가 만들 거야. 신의 가루를.”

“뭐? 그게 말이 돼?”

케이가 삐딱한 자세로 마차 문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맞으며 서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얼굴이 터져버렸을지도 몰랐다.

“말이 돼. 내가 퀴닌의 합성식을 알고 있거든.”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지금 케이 하커를 설득할 수 없다면 앞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합성식……? 그런 걸 어떻게 알았는데?”

“그야 나는…….”

엘리자베스가 헛기침을 하곤 슬쩍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나는 과학자니까.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퀴닌을 발명하면 모르긴 몰라도 2만 파운트 같은 건 삽시간에 벌 수 있을걸.”

말해버렸어.

엘리자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과학자라니. 그 단어만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우선순위는 이것이었다.

우선 엘 선생부터 찾는다.

엘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엘이 자신을 찾아오도록 한다.

그녀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가설 하나. 엘은 퀴닌의 화학식을 찾아낸 인간이 케빈 퍼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엘도 시간여행자니까.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케빈보다 먼저 퀴닌을 발명해버리면?

케빈 퍼킨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의 이름이 퀴닌의 발명자로 등록될 것이다. 만약 클레몬트의 이름을 쓸 수 없다면 가명을 달면 그뿐이다.

그렇게 엘이 아는 과거가 바뀐다. 그렇다면 엘은 과거를 바꾼 자신을 분명 궁금해할 것이다. 과학자들이란 원래 호기심이 많은 작자들이니까.

엘은 신문에 실린 이름을 찾아 제 발로 그녀에게 걸어들어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엘리자베스의 가설에 따른 계획이었다.

남은 건 실험을 통한 입증뿐이었다.

“내가 할 거야. 미리엄을 고치는 것도. 망명 자금을 대는 것도. 그리고…… 너와 나를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빼내는 것도. 나는 스스로 할 수 있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가 어느새 빨개진 코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케이의 코트를 입은 채로 말이다.

* * *

두 사람이 타운하우스 문에 나란히 들어서자 윌리엄 조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한밤중에 바늘이랑 실을 달라고 해서 뛰어 나가더니 이젠 약혼자까지 데리고 들어오다뇨,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그 말에 입구에 버티고 서 있던 케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내 약혼자는 언제 어디에나 맘대로 들어가고 맘대로 나올 자유가 있어, 윌리엄 조쉬 경.”

“언제부터 반말이셨죠? 케이 하커 씨?”

“아까부터.”

케이는 당연하지 않으냐는 듯이 대답했다.

“얼씨구.”

윌리엄은 피로로 어두컴컴해진 눈그늘을 한 채로 어느새 해미쉬에게 제 옷을 받아들고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는 여관이 아니라 내 집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약혼자에게 말해주면 좋겠군요.”

“여긴 여관이 아니래.”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케이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어. 이런 구린 벽지를 발라놓은 여관에서 묵고 싶어 할 손님이 몇이나 되겠어.”

그 말에 윌리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케이는 윌리엄을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에게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 몸값을 올려야겠어요. 엘리자베스.”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를 보았다.

“준다는 돈 말이에요. 재협상하자구요. 그 돈에 이 한밤중에 댁들의 사랑 놀음을 구경하는 노고까지 포함되는 줄 알았으면 돈을 두 배로 올렸을 겁니다.”

“아, 그거 말이군요.”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윌리엄의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그거. 조건을 수정해요.”

“돈을 올려주겠다는 말이죠?”

“돈을 올리고, 조건을 추가하겠다는 말이에요.”

윌리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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