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9화
타운하우스의 문을 열고 나가자 습한 공기가 엘리자베스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지난 20여 년 간 비약적인 발전을 해온 수도 리오든의 습기에는 공장 오수 냄새, 매연 같은 것들이 섞여 들어가 있어 숨을 쉴 때마다 머리가 아파오곤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쉐필드를 떠나 리오든에 와서야 숨이 쉬어진다고 여겼다.
빅토리아 기차역에서 마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 시끄럽고 더러운 도시를 보았을 때, 이곳에서야말로 자신을 구원해줄 대단하고 소란스러운 무언가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내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나의 구원자. 그 구원자가 분명 나를 들썩이게 하리라.
엘리자베스에게 리오든의 더러운 냄새는 예언과도 같았다.
타닥. 타닥.
엘리자베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더러운 습기 속을 뚫고 귀족들의 타운하우스가 가득한 바실리 스트리트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차를 세워둔 채 자신을 기다리는 기다란 실루엣을 드디어 만났다.
그 실루엣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피투성이가 된 천을 제 이마에 대고 선 채로 삐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았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이 녀석도 기다리고 있었구나. 자신을 구원해줄 대단하고 소란스러운 무언가를.
“……널 기다린 게 아니야.”
케이 하커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불쑥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불에 잘 지져 소독한 바늘과 실이 든 가죽 가방을 든 채로 멈춰 섰다. 케이 하커의 눈이 새빨개진 것을 본 엘리자베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깊숙이 이해해버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면, 그땐 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이런 데서 새벽까지 날 기다리고 있으면 안 돼. 상처가 덧날지도 모른다고. 빨리 돌아가서 의사한테 가야지.”
엘리자베스는 아득해진 기분이 들어 들고 있던 가죽 가방을 일부러 코트 안으로 숨겼다.
엘리자베스는 의사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왕립학술원에 이름을 새길 수도 없고 직접 퀴닌 인공 합성을 할 수도 없다.
그녀의 전생이 남겨준 기억은 그녀에게 엄청난 힘을 안겨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여긴 과거고, 그건 미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지켜지지 않은 예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아직 지켜지지 않은 수많은 예언이 남아 있는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널 기다린 게 아니라고.”
케이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아까까지 피운 듯 불씨가 남아 있는 담배 꽁초를 발로 비벼 껐다. 그건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아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당장이라도 마부조차 떠난 마차 안으로 돌아가 로킨트로 돌아갈 거라고 여겼지만 의외로 케이는 그렇게 중얼거릴 뿐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아니라는 듯이.
“토비는 어디 갔어?”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보냈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어 무는 케이를 황당하다는 듯이 보았다.
“날 기다린 게 아니면 여기서 뭐한 거야?”
“그냥 있었어. 혹시…….”
케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은 엘리자베스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으므로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궤적의 이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마차가 들어선 기분은 예상처럼 신나거나 유쾌하지 않았고 무섭고 두려웠다.
“혹시 네가 저 망할 놈의 자식이랑 싸워서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을 수도 있잖아.”
그녀는 심장이 어디론가 추락하는 기분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다른 놈한테 가고 싶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럴 때 타고 갈 마차가 없으면 넌 분명 옴니버스 같은 이상한 거나 타고 다닐 테고 그 꼴은 내가 못 보지. 그래서 그냥 있었던 거야.”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생경한 표정을 짓는 것을 그만두고 삐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허탈한 기분으로 가죽 가방을 품속에서 꺼내 케이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넌 정말 이상해.”
그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나한텐 네가 더 이상해. 원래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좋아한다고, 그 숲에서 고백하던 그날부터 케이에게는 엘리자베스처럼 이상한 여자는 다시없을 것이었다.
“요새는 정말 더 이상해.”
펍에서 춤을 추는 이 여자를 보던 순간부터 케이의 확신은 굳었다.
자신은 평생이 걸려도 이 여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불을 붙이려던 담배를 가만히 든 채로 그녀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얇디얇은 셔츠에 엉성한 코트를 걸친 그녀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초겨울이라고는 해도 새벽이라 날이 추웠다.
“다시 들어가. 싸우고 나온 거라면 타든지.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지.”
다른 남자 집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그의 뺨을 때리고 싶은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너 정말…….”
“그럼 뭘 어쩌라고.”
케이는 어쩐지 화가 난 얼굴로 담배를 내던지고 제 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젠장. 그 자식은 왜 제대로 된 외투도 주지 않는 거야? 이 이상한 셔츠는 뭐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뭐라고 따질 새를 주지 않고 그녀의 몸에 코트를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토비가 준 독주 때문인지 그녀 때문인지 알 수 없다고 여겼다.
“원래 계획대로 널 여기 내려다주고 잽싸게 도망갔어야 해.”
“그럼 그러지 그랬어.”
“그러려고 했는데 도저히 도개교를 건널 수 없을 것 같았어. 마음이 아프더군. 끔찍할 정도로 말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걸친 제 옷자락을 잘 여미고 그대로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얼른 다시 엘리자베스에게서 멀어졌다.
“이건 내가 널 독점하고……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응? 말해봐. 모르는 게 없는 귀족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눈 밑이 시뻘건 케이의 얼굴을 차마 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돌리며 팔짱을 꼈다.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에 답답한 것이 찬 느낌이 들었다.
진득한 리오든의 공기 탓인지, 아니면 아직 그녀 안에 남은 악몽의 잔해인지, 아니면 그저 탈수 증상의 전조인지 알 수 없었다.
“말해보라고.”
케이가 그렇게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어렵게 그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몰라, 나도.”
“왜 몰라? 넌 뭐든 알잖아.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다정한 개자식처럼 웃으며 그녀의 턱을 매만졌다.
“알아도 소용없으니까 말하지 않을 거야. 아는 거랑 설득하는 건 다른 거야. 넌 날 사랑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잖아. 내가 윌리엄 조쉬 같은 놈이랑 놀아날 거라고 굳게 믿잖아. 나는 네 인생을, 널 망칠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잖아. 그럼 설득해도 소용없어.”
“아니.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그게 아니야.”
케이는 화난 얼굴 그대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널 망칠 거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결혼이 널 망치겠지.”
케이는 품 안에서 파혼 계약서를 꺼냈다.
구깃구깃한 그것을 언제부터 그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케이가 갈색 봉투에서 꺼낸 것은 케이의 이름이 끝까지 서명된 계약서뿐 아니라 케이 하커의 이름이 적힌 타국의 수표가 함께였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타국의 문양을 보곤 잠시 멍해졌다.
“이건 켈토에 있는 멜니아 중앙 은행 수표야. 네가 원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켈토로 가는 배편을 준비하지. 거기에서 배를 갈아타고 동쪽으로 가서 사라져도 좋고 켈토에서 다른 이민자들처럼 떵떵거리면서 살아도 좋아. 그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파혼은…… 내 선택이 되겠지.”
케이가 내미는 봉투를 엘리자베스가 얼빠진 얼굴로 받아들었다. 그러자 거기엔 켈토의 상징물이 박힌 수표가 보였다.
켈토로 가는 배편.
이건 그것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봉투를 받아들곤 굳어진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같이 가자고는 안 해?”
“넌 혼자 가야 돼. 멜니아는 신분에서 자유로운 곳이라지만 네가 공녀로서 망명가는 것과 레본의 평민 사생아의 아내로서 망명가는 건 전혀 다른 삶이 될 거야.”
“그래도 이렇게 쉽게…… 갑자기…….”
“방금 말했잖아. 나는 네 인생을 망칠 거라고.”
케이가 전에 없이 음울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프란시스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프란시스의 감출 수 없는 어두움이 배어 나왔다. 그것은 프란시스의 천성이었을까? 아니면 로버트 하커에 의해 만들어진 기질이었을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천성일까, 아니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일까?
그렇다면 전생에는 두 개였던 배편이 하나가 되고, 6개월 후로 예정되었던 켈토 행이 오늘이 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변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변화된 행동을 한 탓에 상황이 변했기 때문인가.
마차가 궤적을 벗어난 지금, 엘리자베스로서는 그 이유를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케이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2년 전부터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어.”
갑자기 흘러나온 다른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새로운 사업 얘기가 갑자기 왜……. 엘리자베스는 다시 케이를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점점 심해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주 돈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 너와 네 가문,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 전체를 망칠 위험하고 대단한 사업.”
케이가 말하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아까 꿈속에서 보았던 불꽃이 번쩍거렸다.
몸이 거꾸로 매달린 기분이 들었다. 등이 화끈거리고 온몸의 피가 혈관 밖으로 뛰쳐나갈 듯이 빨리 도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 흰색 털을 가진 동물이 그랬듯이.
엘리자베스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며 물었다.
“그게…… 뭔데?”
케이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케이가 입술을 열었다.
“전쟁.”
진한 화약 냄새.
떨어진 살점의 물컹한 느낌.
목에서 철컹거리는 쇠로 된 목걸이의 차가움.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꿈속에서 아스라하게 들리던 제 목소리를 떠올렸다.
제 목에서 나는 소리이되, 제 목소리가 아닌 것.
‘전쟁은 좆같아. 나는 괴물이 되느니 사람으로 죽을 거야. 날 죽여. 엘.’
엘우드의 일그러지던 표정.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보는 환영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 몰록도 한때는 인간과 같은 존재였다, 라는 엘우드의 말만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젠장.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엘리자베스가 흐려지는 시야로 케이를 보았다.
“전쟁……?”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묻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쟁. 이미 팽창할 대로 팽창한 이 도시에서 더 큰 판로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업. 아버지가 어떻게든 너와 날 결혼시키고 싶어 했던 이유야. 공작의 이름을 등에 업는 순간 그 사업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개떼처럼 몰려들 테니까. 이미 그러고 있지. 그 순진한 공작도 이미 냄새를 맡고 사업에 투자했거든.”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흐릿한 시야 속에서 케이의 뒤로 떠오르는 거대한 비행선이 보였다.
리오든을 침공하는 거대한 비행선.
지금 그녀가 보는 건 꿈의 잔상인가? 아니면 케이의 말이 불러온 불안감이 만든 환상인가?
하지만 지금 엘리자베스는 어쩌면 알지 말았어야 할 세계의 이면을 엿본 기분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쟁에 뛰어들고 싶어 했다니. 케이가 그걸 알고 있었다니.
이제 보니 자신의 생을 떠받들고 있던 것은 수많은 거짓이었다.
“공작이 제철공작 명의를 이전받았다고 하더군. 결혼 전에 미리 알아서 다행이야. 우리 결혼이 파토나면 공작이 나서서 판을 키울 일도 없을 테니까. 네가 위험해질 일도, 내가 널 망칠 일도 없겠지.”
엘리자베스가 목이 졸리는 기분에 비틀거리며 마차에 기댔을 때, 케이는 그녀가 충격에 빠져 그렇다고 여기는 듯 그런 그녀의 어깨를 받쳐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네 아버지처럼 널 물건으로 여기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널 독점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어. 너는…….”
케이의 얼굴에 건방지고 삐뚜룸한 미소가 번져갔다.
“내가 만나본 가장 귀하고, 쓸모 있고, 아름다운 물건이니까. 감히 내가 가질 수 없지. 절대로 깨지지 않도록 멀리 멀리 떠나보내 지킨다면 또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