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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화 (2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화

케이와 함께 정원의 절반쯤 걸어 나왔을 때,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버트나 켄드릭은 보이지 않았지만 프란시스만은 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앞서 달리는 마차의 궤적을 따라가는 운명.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어떤 궤적을 따라가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걸 안다고 한들 그 궤적으로부터 그녀를 이탈시킬 방법은 알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토비! 너 독주 가진 것 있니?”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정원 끄트머리에 도착했을 때, 마부석에 앉아 쉬고 있는 소년 마부를 불렀다. 토비가 케이의 찢어진 이마를 보곤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마님.”

“널 추궁하는 게 아니야. 네 주인님의 이마를 소독하려면 독주가 필요해, 토비.”

엘리자베스의 진지한 얼굴에 토비가 품 안에서 독한 술을 담은 수통을 꺼내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케이가 피식 웃었다.

수통을 받아든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마차에 올라 토비에게 빨리 이곳을 나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케이에게 물었다.

“너 손수건 같은 거 있어?”

그 말에 케이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없는데. 원래 있던 걸 잃어버려서…….”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드레스 자락을 들쳤다. 그걸 본 케이는 마부석에 앉은 토비 쪽을 얼른 보곤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속치마를 찢으려고. 지혈해야지.”

물론 이마 쪽에는 중요한 동맥이 지나가지 않지만 모든 상처는 소독과 지혈을 똑바로 하지 못하면 나중에 화근이 되기 마련이었다.

“있어. 손수건.”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속치마에 손을 대자 질색을 하며 품속에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걸 본 엘리자베스의 눈이 커졌다.

“이 손수건 너한테 있었어?”

“그래. 메리가 다림질하다가 딸려 왔든지 했겠지.”

“그런데 왜 방금은 없다고 했어?”

엘리자베스가 물었지만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도 딱히 무척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더 추궁하지 않고 손수건에 토비가 준 독주를 묻혀 케이의 이마를 덮었다. 케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뭉개졌다.

손수건에 피가 번지기 시작한 게 보였지만 손수건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손수건은 마음이 아니니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처녀 적 이름을 수놓아준 어머니의 마음은 이런 데에 있는 게 아니니까.

맞아서 엉망이 된 채 갇혀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왜 부모의 마음을 모르고 헛짓을 하냐며 서럽게 울던 그 모습에, 그 기억에 어머니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리 여겼다.

“……토비한테 독주가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그의 상처에 도자기 파편이 남아 있지 않은지 살피며 대답했다.

“마부들한테는 보통 독주가 있어.”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내가 전생에서 마부들을 많이 만나봤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마부들은 마부석이나 마구간에서 자잖아. 그런데는 추우니까 독주를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해야 될…… 거라고 생각했어.”

손수건은 곧 피 범벅이 되어 쓰기 어려워졌다. 엘리자베스는 결국 속치마를 찢었다. 손수건은 마차 바닥에 일단 내던졌다.

“우리 공녀님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신기하네. 마구간에서 자본 것도 아니면서.”

케이의 이마에 알코올을 잔뜩 묻힌 속치마 자락을 꾹 누른 엘리자베스가 그의 눈을 보았다. 방금 켄드릭이 케이에게 다시 마구간지기의 헛간에서 자고 싶냐고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너는 왜 마구간에서 잤는데?”

엘리자베스의 말에 집요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던 케이가 눈을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의 머릿속에 불과 두세 시간 전에 그의 저택에서의 격렬했던 행위가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결론적으로 키스…… 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마음이 잠시 붕 떴던 것도 잠시, 다시 피로 물드는 속치마를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케이의 말대로 식사 초대를 거절했어야 했다. 괜히 로버트 하커의 동태를 살피려고 어설프게 굴었다가 케이를 다치게 했다.

“그야 당연한 거야. 난 저 집의 벼룩이니까.”

케이가 삐뚤지도 않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벼룩 새끼.

엘리자베스는 켄드릭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단순히 켄드릭이 취기와 노기를 이기지 못해 오늘 한 번 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케이가 확인시켜준 셈이었다.

케이 하커가 로버트 하커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으로 집 안에서 겉돈다는 것은 밖에서 들은 이야기로도, 로버트 하커와 켄드릭에게서 흐르는 묘한 냉기로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엘리자베스였다. 그러나 그가 벼룩 취급을 받으며 독주를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냉기가 흐르는 마구간에서 자고 이렇게 맞는다는 건…….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가 당하던 폭력의 부조리함도 눈치채지 못하던 아둔함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널 정말 조금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일까?

엘리자베스는 아까 저택에서 먹은 식사가 전부 쏟아질 듯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케이를 보았다. 그를 위로할 말을 떠올리고 싶은데 그 어떤 말도 적절치 않아 보였다.

그녀는 다시 속치마를 버리고 또 다른 속치마 자락을 찢어내 독주를 묻히며 말했다.

“우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며칠 간격으로 이렇게 번갈아 얻어터지니까 말이야.”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이마에 속치마 자락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케이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그는 알코올을 묻힌 천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막았다.

“왜 그렇게 말해?”

“……재밌으라고. 좀 기분 전환하라고.”

엘리자베스가 주눅 들어 말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재미없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어떤 식?”

“너랑 나랑 같다는 식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케이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대신에 핏방울이 살짝 맺혔다. 피가 멎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소독한 바늘이 있다면 서너 바늘쯤 꿰매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가 왜 다른데?”

“당연히 다르지. 난 아버지가 공장에 있는 노동자를 수없이 건드리다가 실수로 낳은 자식이야. 저 집에 있는 마부보다 못한 존재라고. 공짜로 숙식을 제공받았으니까. 내가 맞는 건 농노가 주인한테 맞는 것처럼 당연한 거지만, 네가 맞는 건 달라. 넌…… 그러면 안 돼. 너한테는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

거기까지 말한 후 케이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케이의 이마를 누른 손에 힘을 격하게 줬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케이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화닥닥 손을 떼며 말했다.

“미안. 근데 너 정말 머저리 같아. 헛소리만 하잖아.”

“넌 듣기 싫을지 모르지만 현실이 그래.”

더 머저리 같은 소리를 하는 케이에게 엘리자베스가 항의하려고 할 때였다. 마차가 막 도개교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케이가 말했다.

“도개교를 건너가라, 토비.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은 오늘 우리 저택에서 주무시지 않을 거야.”

“뭐?”

“노스 리오든에 있는 호텔에서 자. 호텔비를 주지. 거기선 어떤 놈을 불러서 재우든 상관하지 않겠어.”

어떤 놈? 너랑 난 다르다고?

엘리자베스는 이 상황에서까지 개 같은 말만 골라서 하는 이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그래서 토비에게 소리쳤다.

“토비. 바실리 23번가로 가!”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호텔까지 부를 거 뭐 있어? 딴 남자 집에서 자면 돼.”

그녀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엔 이마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 * *

“세상에, 엘리자베스 양!”

바실리 23번가의 문을 두드리자 잔뜩 흐트러진 매무새의 윌리엄 조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니, 당혹스럽다기보다는 ‘이 여자가 여길 왜 와?’라는 불쾌한 표정에 가까웠지만 윌리엄 조쉬의 표정은 이내 건너편에 있는 마차에 박힌 하커 가문의 문양을 보곤 더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표정을 읽어내고도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기운 없이 말했다.

“재워줘요.”

“제정신이에요?”

조쉬는 그녀와 마차를 번갈아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엄청 사근사근하게 대답하는 척하면서 문 좀 닫아요. 숙박비만 좀 빌려주면 한두 시간만 있다가 갈 테니까.”

“하. 나한테 정보를 대가로 만 파운트를 준다고 했던 거 생각나긴 해요? 만 파운트는 어쩌고 숙박비를 빌리러 이 밤에 남의 집에 찾아오죠?”

조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과장된 몸짓과 환한 미소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곤 그녀를 정석적으로 에스코트해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들인 후 문을 닫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단숨에 무너지는 것을 보며 윌리엄 조쉬는 혀를 찼다.

“미친 짓이에요. 여드레 후면 결혼할 남자와 이딴 감정싸움을 하는 거 말이에요.”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느새 정문에 나온 해미쉬 집사에게 그녀의 코트를 받아주라고 말했다.

“감정싸움 아니에요. 우린 싸움 같은 거 안 해요. 그냥 저 자식이 일방적으로 개 같이 구는 거죠.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문 쪽을 노려보며 말하곤 해미쉬에게 코트를 내밀었다. 그리고 윌리엄 조쉬에게로 살짝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한테 협박당하는 중이잖아요. 재워달라고 해도 할 말 없으면서!”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코트를 접어서 가지고 올라가는 해미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윌리엄 조쉬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그래서 뭘 어떡하겠다는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위층으로 올라가는 해미쉬에게 말했다.

“2층에 올라가서 밖을 내다보고, 제가 타고 온 마차가 사라지면 말해줄래요, 해미쉬 씨?”

엘리자베스의 말에 해미쉬는 짧게 대답하곤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그녀의 예상과 달리 해미쉬는 바로 내려와 말했다.

“마차가 이미 사라졌는데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조금은 안도했고 조금은 섭섭해졌다. 공연히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빨리 치료를 받으러 갔다니 안도가 됐지만 그래도 바로 돌아가다니.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간파한 윌리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여기서 자요, 엘리자베스. 오늘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기엔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그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용 잠옷을 내올까요, 주인님?”

해미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힘없이 대답했다.

“사양이에요. 다른 귀부인들께서 입던 옷을 입고 싶진 않네요. 공연히 뒤숭숭할 거예요. 차라리 그냥 마부들이 입던 옷을 줘요.”

* * *

절대로 잠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엘리자베스는 의외로 마부 옷을 입고 2층 손님방에서 잠깐 침대 맡에 앉았다가 그 자세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속이 안 좋았던 탓에 이 타운하우스에 들어오자마자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서일 수도 있고, 그냥 오늘 내내 한 일이 너무 많았던 탓일 수도 있었다.

“힉……!”

그러나 자정쯤이 되었을 때 그녀는 거친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또다시 악몽을 꿨다.

깊은 숲속에 누워 있는 꿈이었는데 그 꿈속에서 그녀는 하늘을 보고 있었고 엘프처럼 잘 생긴 한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앞으로 몸을 숙이자 그 남자의 목에 걸린 쇠로 만든 목걸이가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는 그 목걸이 펜던트에 박힌 이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피해, 형!”

그리고 그 순간, 엘우드의 뒤편에서 번쩍거리는 불꽃이 날아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몸에서 힘이 하나도 없었던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몸은 엄청난 속도로 숲길을 뛰고 있었고 그녀의 손과 발에는 이상한 털이 자라나고 있었다.

흰색 털.

엘리자베스는 그 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도 전에 눈을 떴다.

속이 울렁거리는데 목이 탔다. 아까 온몸의 수분을 전부 게워냈기 때문이리라.

탈수 방지를 위해 물을 마셔야 한다. 그렇게 판단하고 2층 복도로 나왔다.

그때, 조쉬의 타운하우스 정면과 반대쪽으로 난 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기다랗고 검은 실루엣이 지나갔다.

“……저건……!”

엘리자베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층계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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