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7화
식사 내내 대화를 이끌어간 것은 로버트 하커였다.
프란시스는 대화에 참여할 의지가 없어 보였고 켄드릭은 대화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로버트가 그걸 용납하지 않는 눈치였다.
케이는 대화를 방해하려는 듯 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방해를 방해했다. 케이가 끼어들어 빈정거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교묘하게 닥치게 만들었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만 해도 케이는 잠시 말을 잃고 헤맸고 그러면 그 사이에 대화는 원래 흘러가야 할 곳으로 다시 흘러갔다. 하지만 기어코 로버트 하커가 켄드릭이 이번에 노스리오든에 차릴 사무실에 대해 엘리자베스에게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 케이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물원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함께 가시죠.”
케이의 태도에 로버트는 껄껄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의 반응이 의외라고 여겼다. 결혼하고 나서 몇 번 만났던 그녀의 시부는 귀족적 매너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고 지금처럼 케이가 귀족의 매너를 어기면 경기를 일으켰다. 그런데 지금의 관대한 모습은 왜일까?
“아무래도 우리 아들이 우리 공녀님과 둘만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구나. 그래서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저택에 공녀님을 모신 거겠지?”
로버트는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 물었다. 질문은 분명 케이를 향했으나 로버트가 바라본 것은 엘리자베스였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잠시 몸이 굳었다.
로버트가 자신이 케이의 저택에 머문다는 것을 알아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는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신혼 생활을 할 때에도 그녀가 접시 몇 개를 어디에서 얼마 주고 샀는지까지 전부 이미 알고 있는 채로 혹시 돈을 허투루 쓰는 것은 아닌지 추궁하곤 했다. 로버트 하커가 케이의 저택에 제 사람들을 심어 뒀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걸리는 것은 로버트 하커의 말이 단순히 그가 엘리자베스의 거취를 알고 있다, 는 것을 표명한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미혼의 귀족 여성이 외간 남자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꼬투리 잡히고 싶지 않으면 노스 리오든에 차리려는 사무실 운영에 도움이 되어야 할 거라는 협박이었다.
사실 지금 엘리자베스에게는 그런 치졸한 협박이 너무 치졸해서 놀랍기는 해도 별로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척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로버트 하커가 이걸로 공작가를 협박하려고 클레몬트 공작가에 말을 넣으면 상황이 복잡해질 테니까.
“부끄럽네요. 그런 소식을 미리 들으셨다니. 그보다 켄드릭 하커 씨, 아까 말씀하신 노스 리오든에 차릴 향수 가게 위치가 어떤 분의 건물이라고 했죠?”
엘리자베스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로버트 하커가 미소를 지었다. 켄드릭은 후식으로 나온 타르트를 다 씹지도 않고 얼른 대답했다.
“멜버릭 후작님이요.”
“아, 제가 후작부인과 친분이 좀 있어요. 부인께 말을 잘 해놓지요.”
“감사합니다! 제수씨!”
켄드릭의 호칭에 홀로 서 있던 케이 하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저는 식사도 거의 다 했으니 식물원을 한 번 구경해도 될까요?”
엘리자베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 있다간 또 어떤 협박을 당할지 몰랐고, 그 협박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 협박에 굴하는 척 늘어놓아야 할 거짓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속이 좀 안 좋기도 했고.
하인이 말했다.
“식물원이 아직 좀 찹니다. 마구간지기에게 중앙에 불을 피워두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불이 충분히 식물원 티 테이블 근처를 데우면 공녀님을 모시러 오지요.”
그때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진 켄드릭이 하인의 말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며 식물원 산책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엘리자베스가 켄드릭을 말릴 새도 없이 켄드릭이 먼저 자리를 떴다. 켄드릭은 꼬냑을 조금 과하게 마신듯 살짝 비틀거렸다.
로버트 하커가 프란시스에게 함께 식물원에 가지 않겠냐고 물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프란시스는 표정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식사가 마무리되자 엘리자베스는 잠시 굳었다. 케이는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무슨 말이라도 할듯 바라보다가 켄드릭의 뒤를 따라 나갔다. 로버트는 프란시스에게 먼저 식물원에 가라고 말한 후,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뒤쪽 계단으로 사라졌다.
담담한 표정의 프란시스가 식물원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의 옆을 지날 때였다.
프란시스의 귀걸이가 엘리자베스의 앞에 떨어졌다.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가 동시에 몸을 숙였다. 프란시스가 조금 더 빨랐고 엘리자베스가 느렸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긴 드레스 소매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손목을 처음 보았다.
생각해보니 케이의 새어머니 프란시스를 본 것은, 그녀의 생애를 통틀어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은 오늘이었고 또 한 번은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예쁘게 화장된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
프란시스가 파리한 안색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손목에 난 가느다란 자상을 보았다는 것을 눈치 챘다는 눈빛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남의 비밀을 훔쳐본 것 같은 기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케이를 사랑하니?”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그 첫 마디가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나도 그랬단다. 하지만 내 생각에 여자들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결혼해야 해. 결혼은 남자의 인생을 구속하기에 좋은 장치가 아니지만 여자의 인생을 망치기엔 좋은 장치거든.”
말을 마치고 나서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프란시스가 자신을 스쳐지나가고 나서야 프란시스의 말이 제 손목에 난 자상에 대한 ‘설명’이라는 사실을 엘리자베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였다. 프란시스가 다이닝 룸을 나서자마자 식물원으로 향하는 중문 근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
뭔가가 깨지는 소리였다.
“꺄악!”
그리고 하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프란시스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그녀는 결코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달려가기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 화려하고 밝고 멋있는 저택을 벗어나 어둡고 습한 로킨트 골목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표정.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녀 표정의 그녀를 섬뜩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서둘러 중문을 향해 걸어갔다.
* * *
식물원 문 앞에서 엘리자베스가 발견한 것은 환한 불빛 아래, 식물원 유리에 튄 피였다. 붉고 찐득거리는 그것은 로버트 하커의 밝고 화려하며 초록빛으로 가득한 식물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엘리자베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런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케이 하커였다.
그런 케이의 아래에는 깨진 도자기 파편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잔뜩 흘리고 있는 케이는 조금도 흥분한 얼굴이 아니었고 오히려 흥분한 것은 반쯤 깨져나간 도자기의 주둥이를 쥐고 있는 켄드릭 하커였다.
“이 벼룩 새끼가. 감히 네가 우리 아버지가 주는 돈을 받아 처먹으면서 나한테 그 따위로 말해? 오늘 오후에 있던 일도 내가 간신히 참아 넘어가줬는데, 감히 공녀님도 모자라 하인들 앞에서 나한테 불손하게 굴어? 우리 집안이 아니었다면 공녀님과 결혼은커녕 네가 지금 옷이나 입고 있을까? 이 초겨울에 거리에서 추위에 떠는 로킨트의 수많은 거지들처럼 내몰리고 싶은 거냐? 엉?”
켄드릭 하커는 시뻘게진 얼굴로 케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을 쏟아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하녀에게 케이는 도자기 파편을 치울 생각하지 말고 부엌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말리려다가 몇 대 얻어맞은 듯 바닥에 주저앉은 마구간지기를 부축하다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는 손목에 난 상처를 부끄러워한다기보단 지긋지긋해하는 것 같았던 프란시스처럼 지긋지긋한 표정이었다.
왜.
왜 하필 너야.
그런 표정.
그런 표정으로 케이가 켄드릭에게 말했다.
“어차피 귀족들을 위한 향수 가게니 뭐니 해도 귀족들은 평민이 하는 향수 가게에는 오지 않아, 켄드릭. 바보 같은 짓이야.”
케이의 말에 켄드릭이 다시 길길이 날뛰면서 케이의 허벅지를 발로 찼다. 케이는 살짝 뒤로 밀리는 것 같았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틀거리며 뒤로 나자빠질 뻔한 것은 켄드릭이었다. 그걸 본 케이는 얼른 켄드릭의 팔뚝을 잡아서 켄드릭의 몸이 파편 위로 쏟아지지 않도록 지지했다.
“더러운 사생아 새끼. 감히 어디다가 손을 대는 거야.”
켄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얼른 제 손을 빼고 식물원 유리에 몸을 기댔다.
켄드릭은 정신없이 취한 듯 엘리자베스가 뒤에 서 있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너랑 난 다르다고. 넌 평생 그저 사생아새끼지만 나는 하커 가문의 장남이야. 우리 아버진 곧 경 칭호도 받으실 거라고, 이 벼룩 새끼야. 이 지저분한 벼룩 새끼. 피도 존나 많이 흘렸잖아. 더러워, 씨발 새끼. 감히 우리 집에 이런 더러운 피를……. 다시 저 마구간지기의 헛간으로 돌아가고 싶냐? 로킨트 저택에 있으니까 네 신세를 잊었지, 엉?”
엘리자베스가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으로 그곳에 서 있을 때, 언제 왔는지 모를 로버트 하커가 뒤에서 그녀에게 낮게 읊조렸다.
“세상에. 놀랐겠구나, 새아가.”
엘리자베스가 흠칫 뒤를 돌았다. 그러자 거기엔 이 모든 상황을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관조하는 로버트 하커가 서 있었다.
제 저택의 화려한 정원을 구경시켜줄 때처럼, 피 흘리는 케이와 짐승처럼 구는 켄드릭을 보고도 그저 ‘우리 집은 원래 이렇게 생겼단다’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엘리자베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원래 남자 형제들이란 좀 과격한 법이다. 이해를 바란다. 아가. 대신에 오늘 부탁한 것은 잊어버리도록 해. 우리 켄드릭은 아직 사업에 뛰어들기에는 성정이 불같구나.”
엘리자베스는 부드럽게 웃고 있지만 케이의 안위는 전혀 살피지 않고 단순히 이 장면을 덮기 위해 협상 조건만 수정하는 로버트 하커를 보면서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켄드릭에게로 걸어가 그가 떨어뜨린 반파된 도자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돌부리 쪽에 세게 내려쳤다. 돌부리에 부딪혀 도자기가 더 산산조각이 났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로버트의 뒤쪽으로 걸어온 프란시스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았다.
“이게 뭐 하는……!”
켄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였다. 엘리자베스가 도자기 파편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어설프게 쥐고 켄드릭을 가리키며 케이에게 물었다.
“이 집에서 가장 값나가는 게 어떤 거야? 이 자식인가?”
그 말에 케이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뭐?”
“이 자식을 깨뜨려주고 나갈까?”
그 말에 로버트가 걸어왔다. 그 순간, 더 빨리 엘리자베스를 저지한 것은 케이였다.
“우리 집엔 값나가는 것 따윈 없어. 그냥 가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도자기 파편을 빼앗아 내던졌다. 날카로운 조각에 쓸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케이는 끈적거리는 손을 바지에 대충 닦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로버트 하커에게 살벌한 눈인사를 하곤 그대로 저택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