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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6화 (2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6화

“넌 날 사랑하지 않아. 지금은 내가 너한테 별스럽고 재미있어 보일지 몰라도 이제 곧 그 흥미가 떨어질 거야. 이 파혼 계약서를 내민 것 자체가 그런 뜻이야.”

“……지금 설마 내가 조쉬 경과 부정이라도 저질렀을 거라고 여기는 거야?”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이거야. 너는 널린 평민 변호사들을 두고도 귀족 출신의 변호사 나리를 찾아가는 사람이야. 너는 나한테서 흥미를 잃으면 곧 너의 세계로 돌아가겠지. 윌리엄 조쉬 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남자들에게로. 네 맘대로 말이야. 그럼 너의 남편인 나는 우스운 꼴이 되는 거야.”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다 일어나려고 할 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코트 칼라를 쥐었다.

“나는 널 사랑해.”

그녀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인두로 눈을 지진 것 같이 아팠지만 도무지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케이의 이 머저리 같은 모든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남은 생 내내 그를 미워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다른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여유 같은 게 없을 정도로 말이야.”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아.”

케이가 자신의 칼라를 꽉 쥔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손 안에 가두었다. 케이의 손은 뜨거웠고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케이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손을 데우려는 듯 매만졌다.

이렇게 그녀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서 그녀에게 제 온기를 나눠주려는 케이의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의미를.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내가 고민해보라는 거 고민해봤어? 정말 날 사랑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너도 널 속이고 있는 건지.”

엘리자베스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녀는 눈물을 보이는 게 싫어서 방으로 올라가버린다면, 그렇게 이 상황을 모면하려 든다면 더욱 자존심이 상할 것이었다.

“고민해봤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어떻게 확신해?”

“내가 생각할 때 사랑은 독점욕이야. 그런데 나는 널 독점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내가 만약에 너랑 첫날밤을 치르고 나면 나는 너한테서 도망치고 싶어질걸. 널 나만 안고 가지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입안에서 수많은 말이 맴돌았다.

방금 한 말은 아까 한 말하고 정면으로 배치되잖아. 그건 거짓말이야. 넌 내가 윌리엄 조쉬랑 잘까 봐 걱정하잖아.

그러나 이 모든 말 중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비논리적이고 비약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케이를 사랑하는 모든 이유가 비논리적이고 비약이듯이 케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이유가 비논리적이고 비약일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해볼래?”

케이는 뒷골목 무뢰배처럼 그녀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끌어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맞췄다. 조금도 신사답지 못한, 유혹적인 방식이었다.

“이 개자식.”

“싫다는 거지?”

“아니, 좋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는 그녀의 쏟아지는 몸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 살짝 뒤로 밀려나다가 순식간에 중심을 맞춰 그녀를 받아들였다.

케이는 소파 손잡이를 쥐고 제 양 팔 안에 그녀를 가뒀다. 그녀가 자신에게 쏟아지지 않도록, 자신이 그녀에게 쏟아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된 노동으로 훈련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목에 체중을 싣고 그가 자신에게 쏟아지도록 매달렸다. 하지만 그건 케이의 덩치에는 조금도 무리가 되지 않는 깃털 같은 무게였던 모양으로, 케이는 그 상태 그대로 엘리자베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케이의 입술과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빠짐없이 맞닿아 새어나갈 곳이 없어진 두 사람의 숨결이 거친 숨소리가 되어 응접실 안에 울려 퍼졌다.

케이는 먼저 입을 맞춰놓고 어설프게 구는 그녀의 등을 떠받치며 그녀의 입술을 탐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소파 손잡이를 잡고 두 사람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손을 더듬거려 잡고 그것을 제 앞섶으로 끌어당겼다. 케이의 손에 부드러운 살점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케이는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너 미쳤어?”

케이는 엉망이 된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이 개 같은 자식 때문에 인생을 망칠 셈이야?”

“이딴 걸로 인생이 망하지 않아. 그리고 확인해보라며.”

엘리자베스도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너랑 대화를 시도한 내가 잘못했어. 그냥 서명하고 현금이나 지불하면 그만인데. 내가 또 너한테 넘어간 거야.”

케이는 머리를 손으로 거칠게 빗어 넘기며 땅에 떨어뜨린 계약서를 집어 들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펜을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말리지 않았다. 당장 떠나야 한다면 떠날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공장 같은 건, 더 이상 관심 두지 않겠다. 윌리엄 조쉬에게 주어야 할 돈이 절약되니 반가운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퀴닌은 케빈 퍼킨에게 부탁해 만들어지는 대로 미리엄에게 전해주면 그만이다. 케빈 퍼킨이 퀴닌을 합성하는 건 그에게 불리할 게 전혀 없는 일이니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개 같은 자식이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알아낼 방법 같은 건 없다.

케이가 계약서에 K…… 라는 이니셜까지 적었을 때였다. 창 너머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객이 왔다는 뜻이었다. 이 시간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보며 물었다.

“왕진 의사가 오기로 했어?”

“아니. 미리엄은 일단 집으로 갔어. 아내가 집에서 돌보고 싶다고 해서 처방받은 약만 일단 챙겨줬어.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이 없는…….”

케이가 문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케이가 문을 열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케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엘리자베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내 아들! 오늘 식사 초대를 잊었을까 해서…….”

화려한 벨벳 코트에 실크로 장식된 톱햇과 지팡이, 그리고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셔츠, 베스트, 신사용 바지를 챙겨 입은 남자가 과한 몸짓으로 케이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로버트 하커.

그러더니 그는 말을 멈추고는 응접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케이는 제 아버지를 알았다.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목소리부터, 없었던 초대를 만드는 행위, 거기에 시선을 옮기는 타이밍까지. 이 모든 것이 연극적으로 계산된 것이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케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로버트 하커가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얼른 귀족다운 매너를 지키며 그에게 인사했다.

“아버님. 오랜만이에요.”

“그래, 아가. 오랜만이다. 내가 바빠지니 자주 못 봐서 아쉬웠는데 여기서 다 보는구나.”

로버트 하커가 즐겁게 웃었다. 그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제 발로 기어들어온 행운을 바라보던 그 음흉한 미소. 케이는 그런 그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내가 켄드릭에게 케이와 저녁 식사를 하게 꼬드겨 오랬더니 이 녀석이 싫다고 했다지 않니. 그래서 내가 직접 왔다, 아가. 그런데 이제 보니 이 녀석이 저택에 이런 귀한 보배를 숨겨놓아서 못 온 거로구나.”

로버트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케이를 보았다. 경멸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저 녀석은 자신을 절대로 보배로 여길 리가 없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매너를 잊지 않았다.

“제가 뜻하지 않았더라도 가족 식사를 방해했다면 유감이에요, 아버님. 무례를 용서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그 말에 로버트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있다마다. 오늘 우리 가족 식사에서 그 아름다운 미모로 실내를 환하게 밝혀주렴. 곧 가족이 될 사람들끼리 안면도 트고 좋지 않겠니?”

케이가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왔을 때였다. 엘리자베스가 먼저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님.”

* * *

“뭘 믿고 좋다고 한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해 마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케이는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담담했다.

“아버님이 날 클레몬트 공작가에 팔아넘기기라도 하실까 봐? 그러실 이유가 없잖아. 나한테 초대를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사실 명분은 전부 위장이다. 엘리자베스에게는 로버트 하커가 어떤 인간인지,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팔아먹은 제 시부의 속내를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계산이 있었다.

계약서에 적혀 있던 K라는 자. 제철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신식 무기들. 그런 비밀을 품고 있는 로버트 하커는 어떤 인간일까.

“명분이라, 역시 귀족들은 불편하게 사는군. 그냥 파혼할 남자의 가족들과 식사하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넌 여기 오지 않았어도 돼. 뒷일은 내가 알아서 했을 거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화려하게 장식된 로버트 하커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케이의 로킨트 저택 역시 엘리자베스가 본 어떤 귀족의 컨트리 하우스나 타운하우스에 뒤지지 않는 잘 꾸며진 정원과 연못, 저택 정문, 외관을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로버트 하커의 저택은 케이의 저택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외관은 마치 저택을 성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선더렌의 태양궁에서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한 듯한 정원에는 이 나라에서는 흔히 찾아보기 힘든 희귀 수목이 여러 종류 심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어둠이 완전히 내리깔렸는데도 로버트 하커의 저택 내부와 정원 곳곳이 대낮처럼 환했다.

로버트 하커의 저택에 와본 것은 이번이 세 번째지만 앞에 두 번은 모두 낮에 왔기에 엘리자베스는 밤의 저택에 모습에 살짝 감탄하고 있었다.

그 감탄을 눈치챈 듯 로버트 하커가 말했다.

“이번 여름에 가스등으로 집 안과 밖의 등을 모두 교체했단다. 어떤 사람들은 가스등이 너무 밝아서 싫다고들 하지만 나는 이게 쏙 맘에 드는 구나. 어두운 것은 마음을 답답하게 해. 밝은 빛은 마음속도 환하게 만들지!”

로버트 하커가 껄껄 웃으며 손을 활짝 벌렸다. 그렇게 말하는 로버트 하커의 뒤에서는 화려한 집안의 모습이 반짝거렸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역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하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는 가스등이란 단순히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라고 여겼다. 가스등에 쓰이는 석탄은 그레이트 레본에서는 흔한 재료였지만 가스등 자체는 아직 보급이 많이 되지 않아 비싼 등이기도 했다. 그런 가스등을 이 거대한 저택의 내외부에 깔아버린 로버트 하커의 재력, 그것이 그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케이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로버트가 거대한 정원을 가로질러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 3명이 세 사람의 외투를 받아들었다. 가족식사에도 에스코트할 하인들을 철저하게 교육시키다니. 요새는 귀족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매너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매너가 어쩐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하인의 손에 제 외투를 맡겼다. 그리고 다이닝 룸까지 안내를 받았다.

붉은 카펫과 화려한 샹들리에, 그리고 하커 사의 문양, 로버트 하커의 초상화로 꾸며진 다이닝 룸에는 차분하고 생기가 없는 얼굴을 한 프란시스 하커 부인과 왜인지 입술이 찢어진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켄드릭 하커가 서 있었다.

“아이고, 공녀님이 함께 오셨네. 이것 참 영광입니다.”

켄드릭 하커는 엘리자베스가 들어오자마자 얼른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그것이 켈토에서 온 사업가들이 자주 한다는 악수임을 알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그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것을 케이가 저지했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야. 약혼자가 있는 여자한테 악수를 권하는 건 실례야. 켄드릭. 못 배워먹었어도 그 정도 예의는 있어야지.”

케이의 말에 켄드릭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엘리자베스가 얼른 켄드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예의라는 건 정해진 규칙이 아니라 서로 맞춰가는 거야. 반가워요, 켄드릭. 케이의 형님은 오늘 처음 보네요.”

엘리자베스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걸 본 케이의 표정은 점점 더 어긋났고 로버트 하커의 표정은 환해졌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는 단 한 사람, 로버트의 부인인 프란시스가 하녀장에게 말했다.

“손님이 배가 고프겠어요. 접시 간격을 좀 줄이고 식전주와 스프, 식전빵을 함께 준비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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