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5화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두 사람의 약혼이 성사되고 케이가 클레몬트 공작과 로버트 하커 앞에서 엘리자베스 앞에 무릎 꿇고 청혼한 날은 엘리자베스의 20살 생일날이었다.
그날 클레몬트 공작은 국왕 소유의 사냥터를 빌려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공작은 그곳에 하커 사의 사장인 로버트 하커와 그의 부인, 그리고 두 아들을 초대했다. 타운하우스에 모인 모든 귀족들은 하커 가문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로버트 하커와 그의 가족들이 크고 작은 예의범절 실수를 할 때마다 얼른 시선을 마주치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면서도 귀족들은 로버트 하커 옆을 떠나지 않았다.
농노들이 장원을 떠나 도시 노동자가 되어가는 시대. 물론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사업 수완이 좋은 귀족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부자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지만 농노를 거느린 장원의 수입만으로 게으르게 영화를 누리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재정 파탄을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씀씀이를 줄이지 않았고 도리어 가지고 있던 장원을 소위 지주라고 하는 이들에게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장원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거렁뱅이 귀족들, 그게 바로 로버트 하커를 경멸하면서도 그의 옆에 붙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드는 이들의 정체였다.
케이는 그들의 속내를 전부 꿰뚫어 보면서도 그 잘난 귀족 사회에 편입되고자 발악하는 로버트 하커의 가식적인 미소를 바라보며 자리를 나왔다.
담배를 피우고 맥주나 실컷 마시며 미리엄과 포커나 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할 때, 숲으로 향해 가는 작은 불빛을 보았다. 오일 랜턴을 들고 있는 금발의 여자.
케이는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고 그 불빛을 따라 숲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불빛을 따른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불빛이 사라졌다.
케이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근처 수풀에서 엘리자베스가 몸을 불쑥 들이밀었다.
“숲으로 왔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편지…… 때문에 온 거지?”
엘리자베스의 광대 위에 떠오른 홍조가 오일 랜턴의 불빛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케이는 알지 못했다.
엘리자베스가 편지라는 말을 하자 오늘 아침, 아버지의 서재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전에 없이 서재로 케이를 불러 오늘 공작의 파티에서 잘 처신할 것을 당부하며 그에게 이미 봉투가 열려 있는 편지 한 통을 그의 품 안에 안겨주었다.
‘크큭, 벼룩도 키워놓으니 쓸모가 있단 말이야. 엘리자베스에게 환심을 사놓으라고 했더니 그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려놓았구나. 여자들이란 원래 자존심을 다치는 게 무서워 인생을 망치는 작자들이야. 그 공녀 년은 지금 네가 갖고 싶어서 눈이 시뻘건 게야.’
벼룩.
그게 아버지가 케이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앞으로도 공녀 년의 혼을 쏙 빼놓아라. 너도 밥값은 해야지. 그년은 우리 집안의 보배가 될 게야, 케이.’
그러나 그 아침에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기뻐야 하는 일이었을 텐데도 그는 오히려 불쾌해졌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징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며 안겨준 편지 역시 흉조의 상징 같아 열어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에 온 건 편지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엘리자베스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로버트 하커 씨께서 나에게 오늘 원하는 걸 뭐든 하나 주실 거라고 했어. 그래서 생각한 게 하나 있는데…….”
그녀는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케이는 제 삐뚤어진 코며, 이상하게 생긴 얼굴 같은 걸 그녀가 비웃고 있는 것 같아서 온 몸이 뜨거워지고 이 뜨거워진 몸뚱어리를 어디론가 숨기고 싶어졌다.
“그게 바로 너야. 케이 하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뜨거워졌던 케이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니. 편지 안 읽었어? 널 좋아해, 케이 하커! 나랑 같은 마음이라서 숲으로 찾아온 거잖아. 물론 아버지가 달가워하지 않으시겠지만 아버지는 로버트 하커 씨를 좋아하니까 분명 그분 말씀이라면 고려해보실 거야, 그래서…….”
‘앞으로도 공녀 년의 혼을 쏙 빼놓아라. 케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웃던 로버트 하커의 표정을 떠올렸다.
케이의 얼굴이 단숨에 망가졌다.
풀어헤쳐진 편지처럼,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카펫이나, 피기도 전에 져버린 장미처럼.
그의 마음도 망가졌다.
케이가 말했다.
“편지 안 읽었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말을 멈췄다. 그녀가 적잖이 당황한 듯 눈을 또르륵 굴리는 사이 케이가 그녀의 오일 랜턴을 낚아채 들고 파티가 이어지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왜?”
“읽기 싫어서. 불태웠어.”
케이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 안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고, 또 그 내용을 아버지가 읽을 거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케이는 분명 그 편지를 불태웠을 것이었다.
“……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케이는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멈춘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오일 랜턴을 아래로 비춰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네 마음은 가짜야. 넌 그냥 내가 널 무시하니까 그게 기분이 상한 거야.”
겨우 그딴 이유로 네 인생을 망치지 마,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에 이 거대한 파티장에서 그에게 내내 쏟아졌던 경멸의 눈빛과 목소리를 가득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서 날 소유하고 짓밟아놓고 싶은 거지. 넌 공녀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한테 평민은 그냥 이런 숲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같은 거겠지. 그러니까 나를 생일 선물로 달라는 둥 헛소리도 할 수 있는 거고. 하지만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려줄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난 물건이 아니야. 네가 날 가질 수 있는 일은 절대 없어. 그러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우리 아버지 앞에서 할 생각 하지 마.”
케이는 홱 돌아서서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러자 이내 뒤에서 타닥거리는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그를 스쳐지나갈 거라고 여겼지만 그녀는 그 대신 엘리자베스는 헉헉거리며 케이를 추월해서 그의 앞에서 섰다. 그의 진로를 막고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케이에 대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어디서 주워왔는지 알 길 없는 나뭇가지를 던졌다.
“내 편지를 불태웠다고? 이 나쁜 자식. 착각하지 마. 넌 이 나뭇가지보다도 못한 놈이야!”
엘리자베스는 엉망이 된 얼굴로 소리 질렀다. 그녀의 손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케이의 셔츠 깃에도 나뭇가지에서 묻어나온 흙이 묻었다.
“네 의견을 묻는 게 아니었어. 그래. 그러는 게 아니었어. 어차피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건데.”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케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케이를 앞질러 파티장으로 뛰어갔다.
그날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하커에게 달려가 말했다.
케이를, 저 건방진 자식을 자신에게 달라고.
케이 하커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따라갔다가 그 장면을 지켜보며 경멸스러운 눈으로 로버트 하커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 발로 걸어온 행운이 기특하다는 듯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는 제 아버지를.
“제 아들과 결혼하고 싶다구요? 아하하, 아가씨. 청혼은 남자가 먼저 하는 것이랍니다. 이리 와라, 내 아들.”
로버트는 기둥 뒤에 서 있던 케이를 또 아들이라고 불렀다. 벼룩이라는 말 대신에 말이다.
이제 제 아버지한테 자신이 벼룩이었듯이, 이제 제 아버지는 그녀에게 벼룩이 될 것이었다.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 *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20살 생일날 보았던 것처럼 음영 진 케이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식이 어떤 식인데?”
“네 마음은 없고 내 마음만 가지고 내 태도만 가지고 얘기하는 식. 나는 지금 네가 왜 파혼하고 싶은지를 묻고 있잖아.”
그 말에 케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와 그런 게 왜 중요해졌지, 우리 귀여운 공녀님한테?”
케이가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내어 한 모금 털어 넣었다.
과거로 돌아온 후 짧은 시간동안 케이가 위스키를 마시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펍에서도 케이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결혼하고부터 케이는 매일 같이 공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내어 입부터 축였다. 마치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너한테는 언제나 네 마음만 있었잖아.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 마음 같은 건 궁금해하지 말고 나한테서 달아나는 게 어때?”
케이는 그 밤에 20살이 된 꼬마숙녀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흙을 잔뜩 묻혀놓고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던 그날과 같은 얼굴로 서 있었으나, 이번에도 어둠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두 사람은 서로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니 케이는 이번에는 그 어둠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날 사랑한다는 말은 네가 너 자신에게 하는 수많은 거짓말 중 하나야. 속치마로 가짜 엉덩이를 만드는 귀부인들처럼 넌 널 속이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귓가에는 케이가 전생에서 했던 말이 웅얼거렸다.
또 다시 이렇게 파멸에 이른단 말인가. 진실이란 조금도 알지 못하고, 그저 거짓과 경멸로 점철된 대화로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한단 말인가.
케이와의 파혼이 문제가 아니었다.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길에서 리오든의 많은 마차들이 앞에 난 도랑을 보면서도 앞서 달려간 마차들이 만든 궤적을 이탈하지 못해 그리로 달려가듯, 그녀의 인생이 전생의 궤적을 똑같이 따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마차만 다를 뿐, 같은 길을 따라, 같은 도랑에 빠지는 것.
그게 지금 두 사람의 관계였다.
“나는 너한테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도 널 사랑해왔어. 누군가를 사랑하면…… 당연히 그 마음을 보답 받고 싶어져. 하지만 보답 받지 못한다고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야.”
그저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공동을 안고 살아가야 할 뿐.
어린 엘리자베스가 쉐필드에서 매일 지평선 앞에 앉아 있던 것처럼,
전생에서 엘리자베스가 저택 3층에서 로킨트 스트리트를 한없이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녀는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찬장으로 걸어간 케이를 노려보며 천천히 걸어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내 마음이 너한테 중요하지 않다면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너의 그 하찮은 믿음이 이제와 너한테 중요해진 이유도 있겠지.”
엘리자베스는 실험하는 화학자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견해는 최대한 뒤로 빼고 감정적인 감상은 자제하며 케이를 추궁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해도 전과는 다른 실험 결과를 얻고 싶었다. 엘리자베스는 ‘자기 자신’이라는 변인을 통제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나름대로 차분하게 케이를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했는데 케이는 조금도 궁지에 몰리지 않은 얼굴로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러더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삐뚜름한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를 들고 물었다.
“이걸 가지고 어디에 갔다 왔지?”
“……변호사한테.”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윌리엄 조쉬는 변호사 길드에 속한 정식 법조인이었다.
“거짓말. 윌리엄 조쉬한테 갔다 왔잖아. 사업차 공장에 들렀던 귀족한테 들었어. 클럽 앞에서 널 배웅하는 윌리엄 조쉬를 봤다고.”
“윌리엄 경은 변호사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넌 내 말을 안 듣잖아. 일찍 오라고 했는데도 네 맘대로 날 기다리게 하고 그 재수 없는 자식한테 다녀왔다는 말도 네 입으로 하지 않잖아.”
케이가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소파 손잡이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케이의 완력에 그녀는 앉은 소파째로 케이를 향해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