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화
* * *
“설마 지금 그걸로 날 찌르려는 거예요?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걸 본 사람이 무척 많아요.”
엘리자베스가 차분하게 말하며 [조나단]이라는 조쉬의 필명이 적힌 빨간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조쉬는 손가락을 화려하게 이용해 잭나이프를 돌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럴 리가요. 그냥 약간의 위압감을 조성해보는 겁니다, 엘리자베스 양.”
“감히 이 나라의 공녀를 상대로요?”
공녀, 라는 말에 조쉬의 눈동자에 경멸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변죽 좋은 귀족 신사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진짜 눈빛을 본 기분이 들었다.
신도 주인도 없다.
아나키스트들의 구호다.
하지만 동시에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이제 더 이상 공녀, 귀족, 왕족, 이런 신분을 내세워 무기로 삼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에는 자신의 신분이 케이에게 주는 열등감 때문에 늘 몸을 움츠리고 살았다. 케이와 케이의 사람들에게 속하고 싶었으니까. 신분에 기대어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이용하려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도리어 공녀 신분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지금 그녀는 자신의 핏줄과 신분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제 그녀는 그것을 무기처럼 휘두르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크큭……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애초에 왜 내가 그걸 썼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얌전한 공녀님의 내면에 자리한 장난꾸러기 기질을 발견한 것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만, 공녀님의 장난질이 과해지니 점점 재미없어지는군요. 논리도 빈약하구요.”
엘리자베스는 빨간 책을 열어 몇 가지 단어를 가리켰다.
“당신이 주필로 있는 신문에서 읽은 단어들이에요. 맞아요, 증거 따위는 없죠. 전 그냥 이걸 보고 찍은 거예요.”
진짜 증거는 전생에서 그의 집에 들어가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지금 이 자리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 진짜 증거는 그의 집에 있는 원고들과 그의 집에 드나들던 밤손님들이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하하, 겨우 단어 몇 개 말인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자꾸 엄한 사람을 몰아붙이면 당장 클레몬트 가문에 정식 서한을 보내 가출한 공녀를 데려가고 공식 사과를 하라고 하겠습니다.”
조쉬는 뒷골목 양아치처럼 칼을 휘두르면서도 말투만은 신사의 것을 유지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며 발코니로 다가가 도박 테이블 옆에 서서 여전히 조쉬를 기다리고 있는 조쉬의 집사, 해미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 하나. 엘리자베스가 가져오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가지고 있는 증거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기억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당신 말고 당신의 동지들을 팔아넘기는 거예요.”
“동지라뇨. 그게 무슨—”
“칼몽 여관. 노스웨스트. 해미쉬.”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그제야 조쉬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조쉬의 잭나이프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그 잭나이프가 단숨에 자신의 외경동맥을 노리고 날아오는 상상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너한테 그 정보를 말해준 게 누구지?”
“그게 알고 싶어? 그렇다면 계약서부터 봐. 윌리엄 조쉬.”
엘리자베스는 잭나이프를 쥐고 있던 조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힘이 다 빠진 그의 손에서 잭나이프를 받아들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계약서와 관련된 모든 자들의 정보가 필요해. 이 계약서에 서명한 K라는 자부터, 제철 공장이 이때까지 철광석을 공급받던 광산의 소유주, 제철 공장에서 나온 물건이 유통되던 활로까지 전부 다. 폭탄 테러를 주동했다면 사회주의자일 가능성이 크겠지. 당신이라면 그런 혁명가들을 잘 알 테고.”
잭나이프를 들이대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조쉬가 코웃음을 쳤다.
“사회주의자? 난 사회주의자가 아니오.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헷갈리다니 이런 빨간 책까지 찾아보는 당신답지 않은 짓이군. 게다가 솔직히 클레몬트 공작가가 사회주의자와 결부될 일은 없는 데다가 공작가가 몰래 무기를 만들어 판다고 해도 왕실에서 그걸 꼬투리 잡을 일은 없을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조쉬의 말이 맞다.
클레몬트와 사회주의를 연결시킨 건 비단 신문만이 한 일이 아니다. 신문이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추리로 국왕의 사촌이 공개재판장에 선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게 맞다. 공개재판이라는 연극을 흥행시키기 위해 저널리즘이 이용된 것이다.
그렇게까지 국왕의 사촌을 궁지에 모는 일을 하커 사 혼자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가설 하나를 완성시켰다. 지금 확인이 필요한 가설은 다음과 같았다.
6개월 후 일어날 클레몬트 공작의 처형에는 왕실이 개입되어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 가설을 확인할 실험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 실험의 주체는 바로 눈앞에 있는 정보에 강한 혁명가가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이 계약서에 대해서 알아보겠다는 대답으로 들리는군요. 맞나요? 윌리엄 경.”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던 잭나이프를 빨간 책의 등 중앙에 꽂았다. 조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하지만 채찍과 함께 당근도 주겠어요. 제대로 된 정보를 물어온다면 당신에게 1만 파운트를 현금으로 지불해주죠. 혁명에도 돈이 들지 않나요? 나는 돈 없이 이 나라가 변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걸요.”
* * *
엘리자베스가 다시 도개교를 건너 로킨트 스트리트로 돌아오자 주변에 황혼이 깔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윌리엄 조쉬와의 대화가 길어지기도 했지만 마차를 잡는 게 어려웠다. 로킨트 스트리트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차가 별로 없었던 탓이었다. 보통 삯의 1.5배를 쳐주겠다고 말한 후에야 마차를 잡자 메리와 토비도 죽상으로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성심성의껏 말렸던 그들이 혼날까 봐 걱정이었다. 일을 그렇게 사랑하는 케이 하커가 정말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기 위해 점심 때 퇴근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재수 없게도 그 만약에 걸리고 말았다.
엘리자베스가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뛰다시피 하여 저택에 돌아오자 대문 앞에 허리 주름이 없는 펑퍼짐한 코트를 입고 조끼도 없이 셔츠를 풀어헤친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케이가 그녀를 맞이했다. 엘리자베스는 막 다 피운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새로운 담배를 문 케이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버렸다.
“도, 도련님.”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자마자 뒤따라오던 메리와 토비도 케이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걸 본 케이가 코웃음을 치더니 기다란 다리로 몇 걸음 만에 그녀를 따라잡아 돌려세웠다.
“일찍도 다니는군.”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안 그래도 삐뚜름한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는 그의 표정을 말이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공격하려 들 때면 매번 짓던 비틀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왜? 자신이 조금 늦게 왔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그의 표정을 본 자신이 어느새 주눅 들었다는 걸 깨닫고 심술이 났다.
결혼생활이 자꾸만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 걸 볼 때 느끼던 불안감이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케이는 그녀의 남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지독한 담배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일부러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정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좀 늦었어. 변호사하고 얘기가 생각보다 길어지더라고.”
케이가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뀌는 게 들렸다.
“그래서 우리의 파혼 계약서에 문제는 없다던가?”
“응, 없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보폭을 넓혀 단숨에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렇게 나오니 별 수 없이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그녀의 뒤에 있는 메리와 토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게.”
케이의 말에 메리는 찝찝한 눈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토비는 고개를 숙이고 얼른 마구간으로 걸어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둘만 남자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계약서를 가지고 응접실로 가자.”
그렇게 말하고 케이가 성큼성큼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먼저 걸어가는 케이를 멍청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케이가 먼저 계약서 얘기를 꺼낸 것이 단순히 그녀를 비꼬기 위함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의 말은 그게 아니라고 들렸기 때문이었다.
“왜?”
“서명하게.”
케이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정문을 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서명을 한다고? 오늘 아침까진 절대 안 한다고 했잖아.”
엘리자베스는 밝은 곳에 들어가 있다가 깜깜한 어둠 속으로 나온 사람처럼 더듬거리는 기분으로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외투를 벗지도 못하고 정문 앞에 서서 장갑만 벗어 들고 가만히 있자 케이가 응접실 소파에 앉아 그런 그녀를 보다가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보다 두 뼘은 커다란 케이는 그녀에게서 장갑과 서류봉투를 빼앗아들었다. 장갑은 응접실 테이블에 두고 서류봉투는 직접 열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윌리엄 조쉬가 검토해준 두 사람의 파혼 계약서뿐으로, 클레몬트 공작의 공장 명의 이전 계약서 서류는 없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속옷 안에 다시 구깃하게 접혀 들어가 있었다.
케이는 파혼 계약서를 초조한 얼굴로 다시 읽어내리더니 옆에 있는 펜을 집어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모르게 당장이라도 그걸 막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케이가 펜으로 계약서 한 곳에 줄을 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만 오천 파운트는 너무 적어. 2만으로 하지.”
“왜?”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케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겨우 1만 오천 파운트로 파혼을 깼다고 하면 하커 가문의 명예에 금이 가. 우리 가문은 그레이트 레본이라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호 집안이라고.”
“아니, 그거 말고.”
엘리자베스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차마 케이의 소파에 걸어가진 못하고 벽난로 근처에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왜 갑자기 그 계약서에 서명하기로 했어?”
“그게 왜 궁금해? 파혼하자고 한 건 너고, 난 네 말을 들어주기로 한 거야. 그것도 웃돈까지 얹어서. 뭐가 문제지?”
케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셔츠의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헤쳤다. 그는 조금 초조해 보였고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그가 이렇게까지 빨리 서명하고 싶어 하는 이유도,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자신의 마음도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는 나랑 파혼하기 싫다고 했잖아.”
하지만 갑자기 케이가 마음을 바꾼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과거에는 분명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물건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한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행동이 불러온 사소한 변화가 매개체가 되어 그의 변화를 촉진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의 결혼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걸까?
엘리자베스가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본 케이가 펜과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케이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를 엘리자베스는 익숙하다고 느꼈다. 살짝 삐뚤어진 콧날을 마구잡이로 구기는 저 오만하고, 그래서 매력적이었던 표정. 저건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를 궁지에 몰 때마다 케이가 짓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네가 나랑 파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더 이상 우리 공녀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이야. 고귀하신 분인데, 나랑 약혼을 하고 싶다고 하든,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든, 심지어는 파혼을 하고 싶다고 하든, 다 들어드려야지. 이 하찮은 평민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엘리자베스가 순간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평민이니 귀족이니 하는 말로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는 케이의 말을 들으니 올라운드 클럽에서 느꼈던 잠깐의 자유로움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휘발되는 기분이 들었다.
“잊었어? 너와 내 약혼은 전부 네가 원하던 거였잖아. 나 같은 놈의 마음 따윈 네 안중에도 없었고.”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어둑해진 방 안에 벽난로의 불빛이 만들어낸 음영이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