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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3화 (2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3화

“오랜만이요?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어요,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이 신사의 너스레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윌리엄 조쉬의 얼굴에 살짝 실금이 갔다.

우습다.

이 남자는 이때까지 이런 클럽에서 도박이나 하고 여자나 만나면서 자신을 난봉꾼이지만 사람은 좋은 귀족쯤으로 포장해왔다.

하지만 이제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었다.

교활한 이상주의자.

자신이 경멸하는 귀족, 왕족, 자본가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들과 잘 어울리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죽일 궁리나 하는 위험한 인간.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죠?”

윌리엄 조쉬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냥요. 이런 클럽은 윌리엄 경이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네요. 뭐랄까…….”

“……?”

“따분하잖아요.”

그 말에 윌리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윌리엄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조용한 데로 가면…… 보여줄 게 있어요. 당신의 내밀한…… 것도 보고 싶군요.”

“하!”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자리를 옮기시죠.”

윌리엄이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클럽 종업원에게 말했다.

“내실을 안내해줘요. 조용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 * *

윌리엄 조쉬와 함께 내실로 들어간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커튼으로 입구를 차단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윌리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여긴 내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곳이라 이 복도 앞으론 내가 말해두면 사람이 잘 다니지도 않아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윌리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발코니로 가서 도박을 이어가는 남자들을 엿봤다.

그녀는 윌리엄이 이 내실에 데려온 게 여자들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동지들. 그 잘난 아나키스트들. 이들 중 또 몇이 그런 비밀을 숨기고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품 안에서 구깃하게 접어둔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어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무슨…….”

“조용한 데로 오면 보여줄 게 있다고 했잖아요. 이게 그거예요. 윌리엄 경.”

윌리엄 조쉬의 얼굴에 핀 당혹스러움은 무시하고 그녀는 직접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서류 봉투 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계약서를 조쉬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

“내가 클레몬트 공작가에서 훔쳐온 계약서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쉬는 겨우 정리했던 표정을 다시 구겼다.

“공작가에서 훔쳐왔다구요? 당신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예요. 그 공작가의 딸이라구요. 그런데 왜 이걸 거기서 훔쳐왔죠?”

조쉬가 느끼하게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라는 아버지의 소유물을 훔쳐오면서 덤으로 가지고 나왔어요.”

“가출했다는 말을 어렵게 하는 군요. 하지만 왜 그랬죠? 결혼이 하기 싫어서인가요? 그런 거라면 더 쉬운 방법이 있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

조쉬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내민 계약서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행동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을 관망하며 이 남자가 유지해왔던 바람둥이라는 가면이 가면만은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윌리엄 조쉬가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 친밀한 사이를 여럿 만든 것은 단순히 외로움이나 성적인 끌림을 위한 것은 아니리라.

사랑을 담보로 한 관계는 때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 않나.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내 모든 세계를 내보이게 만들지 않나.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그랬듯이.

그러니 윌리엄 조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들로부터 이 빌어먹을 혁명가가 얼마나 많은 유용한 정보를 빼왔을지 알 만한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쉬에게서 제 손을 빼오며 다시 조쉬의 눈앞에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공장 명의 이전 계약서.]

계약서 상단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타운하우스에 갇혀 있을 때 바다를 건너온 상아 손잡이를 부수고 2층 제 방에서 바로 건너에 있는 아버지의 서재로 간 것은 이 계약서를 탈취하기 위함이었다. 하녀에게 들키기 직전에 엘리자베스는 계약서를 네 번이나 접어서 속옷 안에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가 공작가에서 빼온 이 계약서는 일종의 덫이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끌 덫.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그 덫을 공작가에서 빼온 것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었다.

스스로를 구하고.

케이 하커, 그 개자식이 대체 제 인생에 어떤 짓을 한 건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클레몬트 공작이 여드레 후면 하커 사 소유의 제철 공장의 명의를 이전받기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여기에 하커 사 이름만 있지 않다는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계약서 하단부의 서명에서 K처럼 보이는 이니셜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진지한 얼굴로 조쉬를 올려다보았지만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있어야할 조쉬의 얼굴은 그녀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러죠?”

“아뇨. 음…… 뭐랄까…….”

조쉬는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여유롭게 웃었다. 이 미소가 정말 여유에서 오는 것일지 아니면 여유를 가장한 채 머릿속으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일지는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게 궁금하죠? 당신은 공녀고, 이 계약서대로 공장이 생긴다면 공작가의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 좋은 건데요. 여기 계약서 조항대로 결혼으로 효력이 생기는 계약이라는 게 유감스럽지만 나는 유부녀도 상관없어요.”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목소리에 담긴 나른함에서 그의 의표를 읽었다.

과거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자본가의 아내이자 왕족의 딸이 아니었다면 자신을 동지로 삼았을 것이라는 말.

조쉬는 지금 그녀를 그저 자본가의 예비 아내이자 왕족의 딸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왕립 학술원의 경비병이 그랬던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커튼 자락을 꽉 쥐었다.

“상관이 있죠. 왜냐하면 이 공장에서 폭탄 테러에 유용할 위험한 무기들이 생산되고 있다는 정보를 내가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랑도 상관이 있을 걸요?”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쉬의 얼굴에서 여유가 조금 사라졌다.

“폭탄 테러요? 그건 너무 과장된 소식이 분명해요, 엘리자베스 양. 그리고 그렇다고 한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말입니까?”

“상관이 있죠. 내가 왜 굳이 이 클럽에 와서 당신에게 법률적 자문을 구하겠어요? 당신이 돌아가신 자작으로부터 막대한 몫을 상속받아 지난 8년간 떵떵거리면서 노는 동안 법률 공부를 좀 해서 변호사라고 젠 체를 하며 여자를 꼬시고 다니기 때문에? 아뇨. 내 이유는 훨씬 더 간단해요. 당신이 내가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하든 당신이 그걸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윌리엄 조쉬는 영악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런 영악한 인간도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은 내실에 걸린 액자로 향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엘리자베스 클레—”

“내가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친밀한 사이에서만 상대의 비밀을 빼올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 이라면 누구나 상대의 비밀을 하나쯤은 알게 된다. 지금의 엘리자베스처럼.

“아나키스트 조나단 씨.”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조쉬를 위한 특별 내실에 걸려 있는 화려한 액자로 걸어갔다.

그녀라면 비밀은 시선을 끄는 액자 옆에 둘 것이다. 바람둥이라는 화려한 가면이 조쉬의 정체를 숨겨주었듯이 화려함은 주위를 어둡게 만든다.

그녀는 액자 바로 아래에 있는 책장 끄트머리에 유일하게 책 이름이 뒤집힌 책을 꺼내들었다. 그건 예상대로 아나키스트를 위한 불온서적이었다.

그녀가 그 책을 치켜드는 순간 윌리엄 조쉬는 품 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당신은 정말 변한 게 없군요. 이 못돼 처먹은 혁명가 자식아.”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 * *

“켄드릭.”

철제 계단을 내려오던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새햐안 신사용 바지에 짧은 검은 재킷, 거기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톱햇을 쓴 남자가 그의 공장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켄드릭 하커.

누가 보면 행세깨나 하는 귀족쯤으로 여길 행색을 한 저 남자는 그의 이복형이었다.

“넌 내가 왔는데 내려와서 냉큼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케이는 그 말에 삐뚜름한 표정을 지으며 철제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그러자 켄드릭이 얼른 K라는 이니셜이 적힌 제 톱햇과 재킷을 벗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케이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고는 방직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척척하게 젖은 바닥에 그대로 팽개쳤다.

“이 새끼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켄드릭이 그걸 보더니 후다닥 제 외투와 톱햇을 집어들었다.

“이게 얼마짜린 줄 아냐?! 죽고 싶어?”

켄드릭은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노려보았지만 함부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켄드릭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참을성은 케이에게 얻어맞은 전력 때문만이 아닌 듯싶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왔길래. 케이는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켄드릭이 씩씩거리는 걸 보며 코웃음을 쳤다.

“여기 노동자들은 다들 외투나 모자는 땅바닥에 벗어둬. 저 바닥이 옷걸이라고 할 수 있지.”

케이는 턱짓으로 공장 바닥에 외투와 모자를 깔고 앉아 식사를 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켄드릭 쪽으로는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며 온갖 재료가 곤죽이 된 스프를 먹고 있었다. 케이가 관리하는 방직 공장은 배식이 훌륭한 편이었지만 교대를 맞추려면 스프 속 재료의 식감은 포기해야 했다.

그걸 본 켄드릭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랑 저들이랑 같냐?”

“뭐가 다른데? 우리나 저들이나 귀족들한테 붙어사는 평민이라는 건 다름없어, 켄드릭.”

케이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윌슨과 에드워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생산라인으로 돌아갔다.

켄드릭이 대답했다.

“우린 이제 공작가의 사돈이 될 집안이라고.”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는 거야?”

“클레몬트 공작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몰라? 국왕의 사촌이잖냐.”

그 말에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엘리자베스의 멍든 얼굴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가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순간에도 꺼지지 않는 태양 같은 위엄과 기품이 있었다. 켄드릭이나 자신에게는 절대 없는 위엄과 기품 말이다. 그건 결코 핏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케이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어 성냥불을 붙이고 공장 밖으로 나갔다. 켄드릭이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그 공녀가 네 저택에 와 있다며? 나 좀 만나게 해줘라.”

“엘리, 아니— 그 귀족 아가씨가 내 저택에 와 있다고 누가 그랬지?”

케이는 머릿속으로 제 저택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로버트 하커의 끄나풀이 있다면 저번 계절에 고용 계약을 새로 체결한 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집사에게 그들의 계약서를 꺼내달라고 해야 하리라.

“그게 중요하냐? 중요한 건 내가 이번에 노스 리오든 쪽에 향수 가게를 하나 차리려고 하는데 그 여자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거야. 이제 사돈이 될 사이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 여자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결혼하면 남편 집안에 귀속되는 거야. 그 여자도 우리 가문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거지. 그런 이유 때문에 아버지가 클레몬트 공작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제철공장까지 넘기는 거 아니겠어?”

“제철공장?”

케이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의 공장 중 하나가 클레몬트에게 두 사람의 결혼을 담보로 넘어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제철공장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케이가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그의 손끝에서 담배가 타들어갔다.

“살살 꼬드겨봐. 그 콧대 높은 공녀가 네 꼬드김엔 넘어가 약혼에 결혼까지 했잖냐. 능력 좋아, 우리 동생.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손끝에서부터 케이의 머리로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비법이 뭐야? 그 여자를 유혹한 비법.”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해?”

“혹시 모르지, 그 여자가 너한테 질리면 그땐 내 매력으로라도 우리 집안에 잡아둬야 할지도. 크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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