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22화 (2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2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그녀의 이름을 들은 루이 니콜라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던 루이 니콜라스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국왕의 사촌! 그 클레몬트 공작님의 따님 말입니까?”

“예, 맞아요.”

“국왕의…… 사촌?”

그 말에 얼굴이 굳어진 것은 케빈 쪽이었다. 케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른 책상에서 나왔다. 그런 케빈의 손에는 검고 끈적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가 들려 있었다.

케빈과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케빈의 표정은 한 마디로 ‘망했다.’였다.

“그런데 이 누추한 곳까진 어쩐 일로…….”

루이 니콜라스는 평소 케빈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무척이나 정중하고 ‘사람’다운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하다가 말을 멈추고 케빈의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보았다. 케빈이 얼른 플라스크를 감춰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루이의 표정은 딱딱해졌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케빈에게 말했다.

“케빈! 또 내 허락 없이 내 연구실에 들어와 내 플라스크로 내 재료를 사용했구나!”

루이는 케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케빈은 마치 집 안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렸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달팽이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목은 그의 셔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그게요…… 교, 교수님…… 유황가루 약간만 교수님의 재료로 썼습니다. 나머지는 얼마 전에 실습 차 갔던 농부의 뒷마당에서…….”

“아아, 시끄럽다! 당연히 내가 해놓으라던 실험도 완성하지 않았을 테지?!”

루이 니콜라스는 케빈의 변명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윽박지르며 아까 그 책상에 있던 백조 목 모양의 플라스크를 가리켰다.

“그걸 어, 어떻게 하루 만에 완성합니까!”

“헛소리 마라. 내가 기록해놓으라고 한지가 일주일이 지났어!”

“통제 변인에 의한 유의미한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니까요? 솔직히 이 실험은 실패입니다, 실패.”

케빈의 말에 루이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아이고……’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탄식을 삼키며 둘의 싸움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엘 선생 밑에서 조수로 있으면서 배운 절대적 진리는 이것이었다. 과학자 놈들이란 자존심이 더럽게 세다.

곧 루이가 케빈의 앞으로 가서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연구실 출입 금지다, 케빈!”

그 말에 케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루이의 얼굴은 단호했다.

“뭐 하냐! 당장 나가!”

“교, 교수님……!”

케빈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곤 싱긋 웃으며 루이에게 말했다.

“니콜라스 교수님. 제가 아버지의 전언을 전하기 전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와도 될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케빈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쫓겼을 때, 화장실에 간다던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연구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본 케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뭡니까!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요.”

“그게 당신이 하는 일이에요?”

케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교수들의 연구실이 주르륵 버티고 있는 복도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 복도에 있는 교수들은 전부 하는 일이 있는데, 그녀는 없었다. 그게 다소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저 교수들처럼 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래요. 원래 왕족, 귀족들은 하는 일이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잘나셨군요!”

케빈은 콧방귀를 뀌며 자신의 짐을 잔뜩 담은 상자를 들고 복도를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따라갔다.

케빈은 그런 그녀를 힐끔 거리며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요. 이젠 날 협박할 것도 없어요. 어차피 난 방금 쫓겨났잖아요. 당신이 보는 눈앞에서!”

“왜 어젯밤 오지 않았어?”

“왜 반말이에요?”

“나보다 한참 어린 너한테 존대를 계속할 순 없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귀족들이란.”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그리고 로킨트의 사람들에게 내내 이런 빈정거림을 들어왔다. 그들은 그녀가 친절하게 해도, 무례하게 해도 그녀의 언행이 전부 그녀의 신분에서 온 오만함이라는 듯이 굴었다.

어차피 욕을 먹을 거라면 이제는 맘대로 하겠다. 그게 이번 생에서 그녀의 결론이었다.

“온도의 문제가 아니야. 시간의 문제지. 저온 살균에는 시간이 필요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뭐요?”

“루이 니콜라스가 시킨 실험 말이야. 그거 저온 살균에 관한 실험이지?”

“그걸…… 어떻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백조 목을 가진 플라스크를 보자마자 알았다. 루이 니콜라스가 하던 실험은 저온 살균에 관한 실험이다. 이 실험 과정에서 케빈 퍼킨이 루이의 눈 밖에 나 그의 연구실에서 쫓겨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다.

자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의 충돌이 촉발된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케빈이 쫓아낸 후 루이는 저온 살균법의 핵심은 온도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험에 성공해 이 나라의 유명한 부자가 된다.

“실험 도구랑 실험지를 보고 때려 맞췄어. 이 온도, 이 시간으로 실험을 해봐. 아마 될 거야.”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상자에 들어 있는 펜과 종이로 자신이 아는 저온살균의 시간과 온도를 적었다.

그러자 케빈이 못 미덥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야…….”

난 미래에서 왔으니까.

그렇게 말할 순 없다.

“난 시골에서 왔으니까. 농부들이 웬만한 화학자보다 많은 화학적 지식을 알고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잖아. 우리 장원에서 포도주 농장을 했었거든.”

그 말에 케빈이 납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농부들은 농작물의 보존과 발효를 위해 최적의 시간과 온도를 아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수치화, 계량화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지만 당신도 화학이나 수학에 관심이 있나 보군요? 이렇게 온도나 시간을 정확히 계량해봤다니.”

케빈이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종이를 가져가려는 케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왜…….”

케빈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이 종이, 가지고 싶어?”

그 말에 케빈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지금 또 협박하는 거예요?!”

“이번엔 거래라고 하자.”

“젠장할!”

케빈이 말하자 복도를 지나가던 몇몇 남자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케빈이 목을 움츠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녀석을 협박하는 걸론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럴 땐 채찍이 아니라 당근이 필요했다.

“지금부터 화합물을 하나 만들 거야. 그거에 성공하면, 너에게 오천 파운드와 엄청난 명성,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너의 거지같은 스승으로부터 탈출해서도 먹고 살 방법이 생기는데, 할래?”

“이런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엘리자베스는 이 엘프처럼 생겨서 입은 걸걸한 소년에게 처음으로 호감이 생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만들어요? 나한테는 연구실도 없는데?”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으며 제 손에 들린 종이를 내밀었다.

“지금 가서 루이 니콜라스에게 싹싹 빌어. 그리고 루이의 실험이 성공적일 거라고 속살거리면서 내가 말한 대로 실험을 진행해. 그럼 연구실을 쓸 수 있을 거야.”

케빈이 씨익 웃으며 종이를 얼른 받아들었다.

“네!”

“그 전에 하나 묻자. 엘우드 밀 선생은 어디에 있니, 지금?”

그 말에 신나서 연구실로 돌아가려던 케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엘우드, 그 인간이 날 찾는 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젯밤에 안 간 건데……?”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었다.

왜 케빈 퍼킨이 엘우드 밀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한 걸까? 이 둘이 아는 사이라고 해도 그 말이 케빈이 엘우드의 위치를 안다는 뜻은 아닌데.

이건 명백한 논리 구조의 오류였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스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뒤덮였다.

“아니, 내가 그 삼촌한테 돈을 조금 빌린 게 있거든요……. 안 갚아도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서 다 써버렸는데, 이제 와서 돈 갚으라는 건 줄 알고…….”

* * *

엘리자베스가 도박장에서 돈을 탕진한 사람 같은 얼굴로 학술원 정문을 나왔을 때였다. 메리가 그녀를 보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얼른 댁으로 가시죠? 옴니버스 기사는 가버렸어요. 마차를 잡을게요.”

“아니, 변호사 사무실을 들러야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메리의 얼굴이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토비에게 말했다.

“켄터베리 홀 옆에 있는 올라운드 클럽으로 가자.”

“클럽이요?”

그 말에 메리의 얼굴은 이제 무섭게 바뀌었다.

“거기에 내가 찾는 변호사 분이 자주 출몰하거든.”

“누군지 몰라도 내일 그분 사무실로 가셔서 만나시죠.”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토비에게 말했다.

“거기가 여기에서 머니? 마차를 타야 할까?”

“저희 같은 자들이야 걸어서 가는데, 마차를 구해올까요?”

“아니, 아니야. 그럼 안내해. 나도 걸어가겠어.”

토비의 대답에 메리가 토비를 노려보며 토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토비는지지 않고 메리의 리본을 잡아당겼다.

엘리자베스는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앞세우고 걸어가며 생각했다.

엘우드 밀. 그자가 어디에 있는 걸까?

이제 엘리자베스가 엘에 대해 알아낸 것은 이름뿐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신문에 엘우드 밀을 찾는다고 광고라도 내야 할까? 미래에서 온 당신의 조수가 당신의 치료제를 필요로 한다고?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꾸었던 악몽을 떠올렸다.

몰록에게 공격받던 순간, 그 끔찍한 고통이 재현되는 악몽이었다.

깨어나고 나서도 엘리자베스는 등이 아파와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거울에 비춰 보니 그녀의 등에는 클레몬트 공작이 매질한 곳 아래로 혈관이 이상하게 도드라진 부분이 있었다.

몰록에게 공격받은 곳이리라.

6개월.

엘리자베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토비는 부지런히 엘리자베스에게 길을 안내했다.

도로가 발달해 지름길이 많은 데다 건물이 죄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리오든 북부답게 올라운드 클럽은 왕립학술원에서 금방이었다. 올라운드 클럽과 켄터베리 홀이 함께 있는 솔치노 스트리트의 모습을 본 메리가 엘리자베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가씨. 여긴 너무 번잡한 곳이에요. 특히 미혼의 여성이 다니기엔요.”

메리가 투덜거리는 소리마저 대낮부터 취해서 돌아다니는 부유한 평민들, 한량 같은 귀족 남성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솔치노 스트리트는 완벽하게 양분되어 있었다. 저 끄트머리에는 켄터베리 홀을 중심으로 평민만 출입하는 술집이 모여 있었고, 초입에는 커피 하우스와 올라운드 클럽 같은 남자 귀족들이 출입하는 곳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두 곳 다 건물 사이 골목마다 담배를 피우는 남녀가 얽혀 있다는 점은 동일했다. 메리는 그런 솔치노 스트리트를 걸어가며 내내 어머, 세상에, 신이시여 같은 한탄을 뱉었고 토비는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귀족의 숨겨진 욕망과 평민들의 일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이 번잡한 골목보다 더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도 메리와 마부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혼자 클럽에 들어갔다. 여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경비의 말에는 동전으로 응답했다.

돈이란 얼마나 편리한가.

엘리자베스는 1만 5천이라는 돈이 그녀에게 주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 케이에게 돈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케이 같은 자본가가 운영하는 공장의 회계에도 예상 수입이라는 게 있다지 않나.

왁자지껄한 클럽에 들어가기 무섭게 모든 신사들이 그녀를 주목했다.

귀족 남자들만 출입하는 클럽에 그녀의 존재는 당연히 화젯거리였다. 그녀는 수군거림을 느끼며 주저 없이 이 클럽에서 가장 붐비는 곳, 도박장 근처로 걸어갔다.

도박을 하려고 테이블에 모여 앉은 남자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자, 그 중앙에 있던 한 남자 역시 패에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곧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 교활한 인간.

엘리자베스는 전생과 달라진 것 없는 남자의 행동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윌리엄 경. 오랜만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