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1화
케이 하커가 제 품 안에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의 이름이 수놓아진 손수건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공장에 출근해 새로 나온 그들의 ‘발명품’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멜니아 서부 쪽에 있는 농장에서 목화를 가지고 서부에 있는 케이 공장으로 가면 겨우 이틀입니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이만한 목화를 공급받을 수 있는 위치가…… 쿨럭! 아이고 죄송합니다.”
열띤 토론을 하던 중 테시톤이 기침을 하다가 커피를 쏟는 바람에 종이에 커피 방울이 튀었다.
테시톤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찾았고 케이 역시 무의식중에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손수건이 걸리는 것을 느껴 그것을 꺼냈다. 그러곤 그것을 잠시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가 그것이 엘리자베스의 것임을 알아보는 데에는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때 테시톤이 케이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보곤 손을 뻗었다. 케이가 얼른 손수건을 뒤로 뺐다.
“……?”
“……?”
테시톤과 케이의 눈이 허공에서 만났다. 케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손수건이 아니라오.”
“그럼 뭡니까?”
“중요한 계약서요.”
그 말에 테시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계약서가 저렇게 부드러운 면으로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케이는 어떤 얼굴의 변화도 없이 손수건을 얼른 제 옷 안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곧 대머리 윌슨이 종이에 흐른 커피 얼룩을 제 소매로 쓱쓱 닦은 덕에 어색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케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발명품’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테시톤이 나가고 케이와 윌슨, 그리고 에드워드가 남았을 때, 윌슨이 케이의 어깨를 툭 쳤다.
“멜니아 인간들은 죄다 과하게 돈돈 거리는 경향이 있어.”
에드워드가 그 말에 케이 대신 대답했다.
“레본 인간들처럼 신사의 품격이니 뭐니 따져대면서 귀족을 끼지 않고는 사업 얘기 하나 못 하게 하는 것보단 낫죠. 효율적이잖아요.”
에드워드는 왼쪽 발을 절었는데, 7살 때 일하던 공장 톱니에 바지가 걸려 발목까지 갈려나간 탓이었다.
“효율만 따지지 의리나 신용에는 관심이 없잖냐.”
윌슨이 에드워드의 말을 반박했다.
윌슨은 40대부터 머리가 벗겨져서 50이 된 지금은 아예 대머리 독수리처럼 머리가 없었다.
“나는 손으로 목화를 처음 만졌을 때부터 방직, 방적기 산업에 몸 담았어. 효율도 좋지만 저 엄청난 양의 면화를 제대로 옮겨줄 인간이 필요해, 케이.”
윌슨의 말에 케이는 서랍 위에 두 다리를 쭉 뻗고는 윌슨에게 말했다.
“맞는 말이야. 테시톤은 돈 말곤 아무것에도 관심 없어. 하지만 지금은 테시톤만큼 멜니아 서부를 잘 아는 자를 구할 수가 없지. 애초에 여기까지 일을 진행시킨 것도 테시톤이잖나. 그가 면화 샘플을 가져오고 난 후에 그를 믿을지 말지 정해도 늦지 않아.”
케이의 말에 윌슨이 입맛을 다셨다. 그 사이 케이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에드워드가 그 옆에 자리 잡곤 물었다.
“아까 그건 뭐예요. 중요한 계약서라는 거?”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여자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레이스 손수건이었다구!”
그때 윌슨이 옆에서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럴 때만 죽이 잘 맞는 에드워드와 윌슨이 케이를 둘러싸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윌슨은 조금도 기죽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케이한테 그런 손수건을 쥐여 줄 여자라면 단 한 명 뿐이지.”
“알죠, 알죠. 그분. 로킨트 펍을 아주 휩쓸고 갔다면서요?”
에드워드가 씨익 웃으며 윌슨과 동시에 말했다.
“앰버 플래스!”
“엘리자베스 양!”
그러나 의외로 두 사람의 입에서 각각 다른 인물의 이름이 나오자 두 사람이 다 황당한 얼굴을 했다.
“엘리자베스 양이라뇨? 아, 그 약혼녀요? 에이, 그 여자 귀족이잖아요. 아주 콧대 높기로 유명한 클레몬트 가의 공녀. 당연히 앰버 플래스 쪽이죠.”
“예끼! 이놈아. 앰버 플래스라니. 케이는 약혼자가 있는 몸이야. 게다가 넌 펍에도 없었잖냐. 그날 펍을 휩쓴 건 앰버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양 쪽이었다.”
“그 귀족 아가씨가요?”
두 사람의 대화를 황당하다는 듯이 보고 있던 케이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관자놀이를 감싸 쥐었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지금? 만담하나? 아주 수다 삼매경에 빠져서 사업 따윈 어찌되어도 좋다는 거군. 이 사업이 잘 되어야 노동자 조합도 유지하고 그 빌어먹을 하원 놈들도 깨부술 수 있을 텐데? 윌슨, 에드워드. 효율이든 신용이든 돈이 있어야 유지가 되는 거야. 돈 없이 이루어지는 사업이 없고, 돈 없이 이루어지는 변화는 없어.”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와 윌슨이 민망한 듯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일에 사적인 이야기를 섞었다는 게 머쓱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케이가 담배를 철로 된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오늘 점심은 따로 먹을 테니까 알아서들 나머지 일 봐. 그리고…….”
케이는 재킷을 걸치며 뒤를 돈 채로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이 당분간 우리 집에 있을 거야.”
그 말에 두 사람이 벙찐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케이는 얼른 말했다.
“그러니까 앰버 플래스니 뭐니 그 정신사납고 느끼한 여자 얘긴 그만해. 대체 왜 그 여자 얘기가 내 앞에서 자꾸 나오는 거야?”
케이가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로 사무실 문을 박참과 동시에 두 남자가 그의 뒤를 졸졸 쫓기 시작했다.
“누가 어디에 있다고 지금?”
“그 말은 결국 그 손수건을 네 품 안에 고이 넣어준 분도…….”
신이 난 두 사람이 막 떠들려는 때, 누군가가 케이의 방직공장 안으로 들어왔다. 철제 계단을 내려오던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 * *
왕립학술원의 모든 것이 엘리자베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일단 올라오는 돌계단에 쓰여 있는 표어부터가 그랬다.
[후세를 위하여.]
책에서 본 그대로였다.
엘리자베스가 왕립학술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릴 적 책을 통해서였다. 엘리자베스가 아는 유명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전부 왕립학술원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었고 학술원에서 배운 학생이었던 그들은 나중에는 그곳의 교수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가장 먼저 로비로 들어가 자신을 안내하기 위한 경비원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을 무시한 채로 계단참에 있는 청동 판에 적힌 교수실 명단을 훑어보았다. 모두 엘리자베스가 1년 후쯤 여러 과학 책이나 역사책에서 이름을 본 적이 있게 되는 사람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이름을 경이와 함께 훑어보며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저들 중에 내가 아는 화학자가, 역사가가, 물리학자와 생물학자가 있을지도 몰라.’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 경비병이 물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공녀님. 어떤 분을 찾아오셨나요? 혹시 공작가의 심부름으로 오신 거라면 레이디께서 힘들게 계단을 오르실 것 없이 제가 대신 물건이나 서신을 전하겠습니다.”
그 말에 환희로 벌어졌던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꾹 닫히며 제자리를 찾았다.
그제야 엘리자베스는 주변이 다시 보였다. 신사용 바지와 베스트, 재킷을 입고 안경을 썼으며, 톱햇을 눌러쓴 교수들.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조수나 학생으로 보이는 이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뒤에 선 이 경비병까지.
이들은 모두 남자였다.
엘리자베스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청동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 내렸다.
여기 어디에도 여자의 이름은 없었다.
‘역사는 여자의 이름을 쓰지 않아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앰버 플래스에게 했던 말을 어렵사리 기억해냈다. 흥분에 빠진 나머지 잠시 기억에 묻어놨던 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민망해진 얼굴로 경비병에게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직접 전해야 하는 물건이 있어서요. 할 말도 있구요. 저는 니콜라스 교수님의 방을 찾아왔어요.”
그 말에 경비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 그분에게 전할 것이라면 제가 직접…… 사실 그분이 방문객에게 그리 친절한 분은 아니라서요.”
경비병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로 보아 니콜라스 교수의 성깔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었다. 괜히 예기치 않은 불청객을 데리고 들어갔다가 경비병까지 혼난 일이 몇 번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해야 하는 말은 반드시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한테는 친절하실 거예요. 저희 아버지와 매우 가까우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아버지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 말에 경비병의 눈이 동그래졌다.
컬린 클레몬트. 그는 국왕의 사촌이었다. 그의 재정상태가 얼마나 허술하든 그런 것은 적어도 ‘왕립’학술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 그러시군요. 그분의 연구실은 2층에 있습니다. 2층이라면 레이디의 다리에도 무리가 되지 않을 법한 거리네요. 생각해보니까.”
경비병이 서둘러 엘리자베스를 안내했다. 엘리자베스는 미소를 띤 채 경비병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마음은 아까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지나가는 남자 지식인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거나 괜히 복도 책장에 꽂힌 유명한 학자의 저서를 살펴보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자신이 살아볼 수 없는 삶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건 위험한 꿈을 꾸게 하는데다가 종래에는 그녀의 삶을 파멸로 이끌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눈앞에는 초췌하던 앰버 플래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 매혹적인 입술이 했던 말이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울렸다.
자신이 남자라 해도 자신이 아니라 앰버를 고르리라.
엘리자베스는 씁쓸한 마음으로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니콜라스 교수의 연구실 앞에 멈춰 섰다.
똑똑. 경비병이 노크를 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노크하던 경비병이 안 되겠다는 얼굴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학회에 가신 모양인데요, 어쩌시겠어요? 다른 날 다시 오시겠어요? 아니면, 아, 아마도 이 학회에 가신 거 같은데 점심쯤엔 돌아오실 거예요. 어떡하실래요?”
경비병이 책상에 놓인 학회 포스터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보곤 기다리겠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엘리자베스는 플라스크와 스포이드, 알코올램프가 가득한 실험실의 책상과 유리 찬장을 바라보았다. 그 중 백조 목처럼 생긴 플라스크가 하나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지금 루이 니콜라스가 하는 실험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즈음의 루이 니콜라스는 꽤나 혁신적인 공법을 하나 발명해낸다. 그걸 사람들은 나중에 니콜라스 공법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 공법 덕에 니콜라스는 부자의 반열에 오른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모든 게 쉬워 보이는 감정과 동시에 모든 대단한 미래가 결국 치열한 현재를 쌓아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쿵!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바라보고 있던 책상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그 위로 빼꼼, 한 소년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소년은, 아니, 케빈 퍼킨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사색이 되어서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요? 진짜 온 거예요?!”
그때였다. 연구실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루이 니콜라스가 들어온 것은. 엘리자베스는 놀란 루이의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른 품 안에서 유리병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누, 누구…….”
“안녕하세요!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 저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라고 합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