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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0화 (2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0화

그러나 케빈 퍼킨은 그날 밤 찾아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메리의 발소리에 잠에서 깼다. 메리는 케이에게 아침을 준비했다는 말을 하러 올라온 듯했다.

엘리자베스는 침울한 케이의 얼굴이 보기 힘들었지만 왕립학술원으로 달려가 니콜라스 교수든 케빈 퍼킨이든 누구와라도 담판을 지으려면 식사를 해야 할 성 싶었으므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하시면 식사를 올려다 드려도 되는데요.”

엘리자베스가 빗질조차 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으로 식당에 내려오자 메리가 살짝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식사 준비를 마친 말끔한 정장차림의 케이를 힐끔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메리. 식사를 두 번 차리는 건 귀찮잖아요.”

빈민 구제원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뼈저리게 느꼈다. 식사는 다 같이 모여 한 번에 해야 하는 것이다.

메리가 식기를 마련해주는 사이에 엘리자베스는 나이트가운 자락을 단단히 동여매고 케이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엉망이 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왜.”

“아니, 그 머리 말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서둘러 빗질은 물론이요 평소처럼 달군 집게로 띄우지도 못한 머리를 손으로 다급하게 가렸다.

“그거 원래 아침에는 그렇게 차분한 거야?”

“……아침이 아니라 원래 내 머리는 이렇게 차분해.”

그녀의 말에 케이가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왜 평소엔 메두사처럼 머리를 띄우고 다닌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발끈해서 말했다.

“메두사라니. 머리카락이 너무 가라앉아 있으면 예쁘지가 않잖아.”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빵을 덥석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테이블 매너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네가 말하는 예쁘다는 것의 기준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누가 봐도 이쪽이 더 예쁘잖아. 안 그래, 메리?”

케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엘리자베스의 잔에 홍차를 따르던 메리가 움찔했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에게 도와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메리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꺾어놓았다.

“그렇긴 하죠.”

“…….”

“물론, 어떻게 하셔도 아름다우세요. 그렇죠, 도련님?”

메리에게서 질문이 되돌아오자 케이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빈정거렸다.

“그냥 둬요, 메리. 저 남자는 제 칭찬이 하기가 싫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평소에 도련님이 얼마나…….”

“메리, 그만. 식사 준비나 빨리 하지. 이 귀족 아가씨 격식에 맞춰 드시려면 한 세월 걸릴 테고 나는 조금 있으면 공장에 나가야할 시간이야.”

케이의 발끈한 듯한 말에 메리는 군말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하려던 뒷말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급격하게 몰려오는 허기 탓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쓰러질 것 같은 기분에 얼른 빵을 찢어 하나는 입안에 넣고 하나는 스프 안에 퐁당 담가 스푼으로 찢었다. 테이블 매너는 개나 줘버린 행위였다.

케이는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케이의 웃음을 눈치챈 엘리자베스는 눈을 치켜떴다.

자기도 테이블 매너를 지키지 않았으면서 나를 탓하려는 것인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에게 말했다.

“파혼 계약서는 오늘 노스 리오든에 가는 김에 아는 변호사한테 들러서 법적 자문을 좀 받아올게.”

그 말에 버터를 듬뿍 바른 빵을 한 입 크게 물던 케이는 빵을 입에 문 채 엘리자베스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서명하지 않을 거니까.”

예상한 반응이었다.

“시간은 아직 8일이나 남았으니까 고민해보다가 말해.”

“고민 끝났어. 서명 안 해.”

케이는 단호하게 대답하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듯이 옆에 있던 신문을 펼쳐 얼굴을 가려버렸다.

“설마 1만 5천 파운트가 아까워서 그러는 건 아니지?”

엘리자베스의 자극하는 말에도 케이의 신문은 조금도 치워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다른 화제를 꺼냈다.

“질문이 있어.”

“안 해.”

“그 질문 아니거든.”

“…….”

“왜 내가 언급한 책은 전부 서재에 사 모아놨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그제야 케이가 신문을 눈가까지 내렸다. 그러더니 잠시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을 바라보다가 신문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케이는 손가락을 틱틱거리며 초조한 티를 냈지만 엘리자베스는 물러서지 않고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말들을 이해해보고 싶으니까.”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려 수프 접시만을 바라보았다. 심통 난 어린 아이 같은 태도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그렇게 너한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그럼 그냥 두지. 왜 날 이해해보고 싶었어? 흥미도 없었다면서.”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책. 그리고 자신.

엘리자베스는 교묘하게 덫을 놓듯 말하는 스스로를 경멸스럽게 여겼다. 케이는 그런 덫을 걷어차듯 손쉽게 말했다.

“넌 내 아내가 될 사람이야. 널 이해해야 너랑…… 함께 할 수 있어.”

하지만 처음에 자신만만하던 표정과 달리 문장을 끝맺을 때 케이는 뻔히 아는 덫에 걸린 사람처럼 표정을 살짝 굳혔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난 이제 날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할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윌리엄 조쉬 같은 남자 말인가?”

“그 얘기할 줄 알았어. 하지만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날 사랑하니까?”

“못돼 처먹었구나, 너.”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화난 표정으로 보자 케이가 시선을 돌렸다.

스스로가 썩을 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노스 리오든에는 가지 마. 괜히 갔다가 클레몬트 가문 사람들한테 납치라도 되면 어쩔 거야? 네 말대로 공작은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야.”

“내 아버지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야. 귀족들의 타운하우스가 몰려 있는 노스 리오든 한가운데에서 날 납치했다간 그분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거야. 그리고 하커 사 안장이 박힌 마차가 아니라 옴니버스를 타고 갈 테니까 눈에 띌 일도 없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뭘 타?”

“옴니버스.”

옴니버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부유한 평민이나 가난한 귀족이 타는 조금 질이 나은 옴니버스. 그리고 노동자들을 수송하는 질이 떨어지는 옴니버스.

그러나 로킨트에 오고가는 옴니버스는 주로 노동자들을 수송하는 닭장처럼 밀도가 높고 마차 천장과 마차 양 옆과 뒤에도 노동자들이 매달려 타는 위험한 다인승 마차였다.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더러운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닭장 같은 마차에 엘리자베스를?

“미쳤군. 그냥 나랑 같이 가.”

“출근 안 해도 되나 보지. 어제 공장 일을 쉰 것 때문에 오늘도 밤을 샌 것 같던데.”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포크로 살짝 어두워진 케이 하커의 눈 밑 그늘을 가리켰다. 음식이 묻은 포크로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일은 전생에서도 해 본 적 없는 짓이었지만 어쩐지 케이 하커랑 있으면 필요 이상으로 행동이 걸걸해졌다.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케이 하커가 늘 더 막장으로 굴었으니까.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에 살짝 민망한 듯이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사실 케이의 눈 그늘이 짙어졌다고 케이의 얼굴이 못 봐주게 생긴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케이는 평소에 하얀 얼굴에 치켜올라간 눈꼬리, 푹 파인 아이 홀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눈 그늘이 살짝 더해지니 오히려 그의 예민해 보이는 얼굴이 더 매력을 발휘했다.

‘재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가 애초에 그에게 반한 이유의 반 정도가 그의 얼굴 때문이라는 것은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절대 비밀로 가져갈 것이다.

“대신 혼자 가지 않을게. 마부 아이를 빌려줘. 메리랑 셋이서 다녀올 테니까.”

* * *

케이는 출근 시간까지도 고집을 꺾지 않았지만 곧 공장의 실무자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마부를 불러주었다. 그러면서 녀석과 메리에게 두둑한 팁을 주고, 엘리자베스를 반드시 오전 안에 데려오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마부, 메리와 함께 저택을 나서 옴니버스가 정차하는 곳에 가서 섰다.

“지금쯤이면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태우고 빈 차로 돌아가는 차들이 많을 거예요, 마님.”

엘리자베스는 저번 생에서도 보았던 귀여운 마부 소년의 똑 부러지는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아직 그녀는 마님도 아닌데 이 녀석은 마님이라고 잘도 불렀다.

“옴니버스로 출근하는 이들이 많니?”

“아뇨. 그렇진 않아요, 마님. 대부분 마차 삯이라도 아끼려고 들죠. 대부분이 여기 숙소에서 살고 있구요. 그래도 가끔 급한 일이 있을 땐 다른 지역에 들렀다가 로킨트로 오느라고 타죠. 하지만 로킨트에 워낙 공장이 많은 탓에 옴니버스가 자주…….”

마부 소년은 그렇게 말하다가 어느새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는 옴니버스를 발견하곤 재빨리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흔들었다.

“마님! 빨리 손을 흔드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가버린다구요!”

소년의 말에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서둘러서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흔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엘리자베스가 품 안에 있던 제 이름이 적힌 손수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는 그 손수건을 다 세탁했는지 메리에게 물으려다가 관두고 맨손을 내밀어 마차에게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보였다. 다행히도 곧 마차가 멈춰 섰다.

“탈 거유?”

마부의 표정을 보아하니 마부 소년의 말을 듣지 않고는 타지도 못했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예! 타요!”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 * *

세 사람을 태운 옴니버스는 리오든 북부에 있는 왕립학술원 근처에 정차했다. 엘리자베스는 마부에게 넉넉히 품삯을 챙겨주고 점심쯤에도 한 번 여길 들러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마부는 동전 개수를 세어보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합죠.”

마부 소년, 토비는 옴니버스 마부에게 준 액수가 너무 많다며 투덜거렸다. 엘리자베스는 토비에게 누구에게나 하루 정도는 행운이 깃들 필요가 있는 거라고 말하며 토비에게도 동전 몇 개를 주었다. 그러자 토비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린 아이에게 너무 후하게 구는 건 애 버릇을 나쁘게 들이는 거예요.”

메리가 그걸 보곤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역시 과거에는 어린 아이들에겐 매를 들거나 무섭게 해야 훈육된다고 믿으며 살았지만 엘은 다르게 말했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에게보다 더 후하게 대해야 하는 법이다. 어린 아이들은 일종의 약자야. 조그마한 녀석들에게 매를 들거나 고된 노동을 시키고 돈도 주지 않는 건 곧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악습이다. 폭력에 길들어 자란 아이들은 폭력에 길든 어른이 되니까.’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매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 엘의 말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메리. 여기서 잠시 기다려요. 내가 아는 분께 인사를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여길 들렀다가 변호사 사무실을 가자구요.”

“하지만 아가씨. 도련님이 오전 중에 아가씨를 꼭 로킨트 저택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메리의 말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의 발걸음은 이미 석고로 조각된 학자들의 흉상이 늘어선 왕립학술원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금방 올게요!”

엘리자베스가 홀랑 경비병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토비와 메리 앞을 경비병이 막아섰다.

“여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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