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9화
캐런은 모욕이라도 당한 얼굴로 사라지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캐런에게 뭐라고 덧붙이려는 케이를 엘리자베스가 막았다.
곧 메리와 왕진 의사가 도착했다.
“미리엄 씨부터 진찰하고 아가씨의 상처를 보여주는 게 좋겠네요. 괜찮으시죠?”
메리는 화장이 지워진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흘끗 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값싼 동정심도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메리가 좋았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케이의 저택에 있는 콜린과 메리에게는 미치와 캐런에게는 없는 진중함이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리는 미리엄에게 의사를 안내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곧 엘리자베스와 케이만이 응접실에 남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엘리자베스였다. 그녀는 케이로부터 가장 멀찌감치 떨어진 소파에 앉아서 케이를 보며 말했다.
“화해하자.”
침묵을 깬 말에 케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럴 땐 화해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화가 나긴 났다는 뜻이다. 서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미안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사과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그러곤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뭐가 미안하지? 내 집에 교양서적이 있으면 전부 귀족을 흉내 내기 위한 걸 거라고 생각한 것? 아니면 날 네 아버지와 동급으로 취급한 것? 것도 아니면 소리 지르면서 짜증부리다가 막상 하녀가 건방지게 구니까 날 이용해먹은 것?”
케이가 조목조목 따질 때마다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티가 다 나는 데도 평정심을 유지하느냐고 꾹 눌러 참고 있는 얼굴이 케이 눈에는 퍽 귀엽게 보였다. 그래서 케이는 그녀를 더 놀려주기로 마음먹고,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고 거기에 기댄 채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아주 인상적이었어. 문란해 보이려고 날 이용해먹은 거 말이야.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잖아. 날 유혹하는 줄로.”
케이의 말에 끝내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녀가 소리쳤다.
“알겠어! 미안해! 미안하단 말이야! 전부! 전부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불타오를 것처럼 붉었고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손으로는 들고 있던 손수건을 케이 쪽으로 내던졌다. 그 모습에 케이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그 손수건을 들어올렸다.
엉망으로 화장품 물이 든 손수건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이건 메리에게 세탁을 부탁해야겠어.”
“그러던지.”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케이 하커는 왜 자신을 궁지에 모는 걸 좋아할까. 그러나 케이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는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케이를 어색하게 돌아보았다.
“넌 내 아버지와는 달라.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야.”
“맞아. 그러니 나를 유혹하려 들었겠지.”
“장난치지 마!”
엘리자베스는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잠시 씩씩거리던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곤 미리엄의 방으로 올라간 왕진의사의 기색을 살폈다.
아마 한참 걸릴 것이다. 적어도 이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할 거라면 말이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며 놀리는 것을 그만둔 말투로 말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목소리에 담긴 싸늘함에 엘리자베스가 몸을 움츠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 평생 쉐필드에서 귀한 공녀로 살아오신 분이 펍에서 서민들이나 추는 춤이나 추고, 학질에 걸린 노동자를 직접 치료하려고 하고, 또 나를 유혹하려 들고.”
“그만 해.”
엘리자베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으나 케이는 여전히 뚫어지게 엘리자베스의 옆모습을 보았다.
값비싼 드레스로 몸을 휘감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는 케이에게는 익숙하고 또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차분한 금발과 새하얀 옆 얼굴, 그리고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는 분명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뺨에 난 울긋불긋한 상처와 그녀가 보여준 알 수 없는 모습들은 케이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케이가 아는 엘리자베스는 자존심이 강하고, 그 자존심을 꺾느니 차라리 자신의 인생을 망치려고 구는 여자였다. 그게……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절대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의 엘리자베스는 자존심을 지키려고 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케이를 놀랍게 했고 또 불안하게도 만들었다.
“왜 그렇게 변했어? 갑자기.”
“몰라. 그냥 갑자기 변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날 사랑하지 않는 것들은 사랑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는 그녀가 말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들에 자신이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를테면 너 같은 사람 말이야. 이젠 널 사랑하지 않아야겠어.”
“감정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야.”
케이는 스스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의 저급함에 할 말을 잃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노력하면 어려운 것도 결국 할 수 있어. 열흘을 준다는 말은 다 취소야. 우리 파혼하자.”
* * *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케이 하커에게 도움을 청한 것, 이번 생에서도 케이 하커와 지독하게 얽히기로 한 것 말이다.
캐런이 이 집에 찾아왔을 때 알게 되었다.
케이 하커가 마련한 두 개의 배편 중 하나가 자신의 것이었다 해도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과거라고 믿어왔던 이 빌어먹을 현재 때문에 케이 하커는 곤란해질 것이고, 그럼 케이의 미래는 전부 변할 것이다.
애초부터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를 시험해서 그와 함께 제 가문을 구할 게 아니라, 치료제를 구해서 엘과 함께 리오든을 떠날 궁리부터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엘리자베스는 시간여행을 하고부터 자신이 벌인 모든 일이 후회스러웠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응접실에 있는 책상으로 걸어가 그 밑에 있는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왔다. 이 집의 구조를 전부 꿰고 있는 사람 같은 행동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파혼 계약서를 적자.”
“싫어.”
“왜 싫어?”
엘리자베스는 케이는 언제나 제 말에 순순히 따라온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참을성을 기르려고 노력했다.
“나랑 파혼하고 윌리엄 조쉬인지 뭔지 하는 잡놈한테 가려고? 널 그렇게 둘 순 없어. 그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는데, 너를 안전하지도 못한 곳으로 가게 할 수 없어. 널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나를 물건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어.”
“그래도 협상 불가야.”
케이는 옆에 있는 유리 재떨이를 들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곤 오만한 자세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냥 위로금 차원으로 공작가에 얼마쯤 줘버리면 돼. 어차피 넌 아흐레 후면 이 저택에서 살게 되고 그때까지 클레몬트 공작의 상심한 마음은 돈으로 보상하지. 물론 네 아버지를 엿 먹일 방법은 그 후에 구상하고.”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움찔했다.
아버지를 엿 먹일 가장 큰 방법을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 운명이 그를 처형장으로 데려가도록 그냥 두는 것 말이다.
“돈이 남아도나 봐.”
“그래. 난 어차피 로버트 하커의 아들이야. 여기저기 눈먼 돈을 갖다 바치려는 자본가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놈들 나한테 빚을 못 만들어서 안달이야. 그렇게 하면 내 아버지도 함께 엮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 멍청한 놈들.”
케이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건방짐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알았다.
전생에서도 케이는 꽤나 순종적인 아들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마저 돈을 아끼는 냉철한 사업가였다. 그러니 아버지를 내세워 돈을 융통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케이의 출처를 알 수 없는 비상금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케이가 클레몬트 가에 위로금을 지불해 입을 닥치게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는 그 부분을 얘기하려는 것이었다.
“얼마나 줄 건데? 아버지, 아니, 클레몬트 공작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궁금해?”
“당연하지.”
“뭐 글쎄. 대충 2만 파운트 정도로 하지.”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었다. 2만 파운트는 웬만한 시골에서는 저택을 살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적은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지 않아. 하지만 조금 깎자. 1만 오천.”
그 말에 케이가 웃었다.
“통이 작네. 어차피…….”
케이가 더 말을 하기 전에 엘리자베스가 서슴없이 펜을 들어 종이에 적었다.
[파혼 계약서.]
“뭐하는 거야?”
케이가 그것을 빼앗아들려고 하자 엘리자베스가 몸을 틀어 그것을 막았다.
“1만 오천. 그 돈은 나한테 줘. 내가 받아갈래.”
엘리자베스의 파란 눈이 예쁘게 반짝거렸다. 그걸 보는 순간 케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이 이상한 여자가 지금 뭐 하는 걸까.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진지했고, 심지어는 좀 오싹하기까지 했다.
“대신에 여기에 별첨 조항을 쓰는 거야. 이번 사건과 관련된 위로금은 나한테 현찰로 지불했다고. 그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중 계약이니까 나중에 국왕폐하가 중재하러 와도 다시 돈을 달라고 할 순 없다?”
“맞아. 그냥 나만 미친 공녀로 소문이 나고 말겠지. 하지만 그땐 아무 상관없잖아. 나는 무려 1만 오천 파운트를 가지고 이 도시를 떠나 자유롭게 살고 있을 텐데.”
그 말과 엘리자베스의 눈빛을 보며 케이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여자의 머릿속에 굴러가는 자신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엄청난 생각들 속에 이제 자신은 없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는 정말로 이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케이는 갑자기 가지고 있던 든든한 옷과 방패를 전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최고의 복수야, 케이 하커.”
하지만 왜 그렇게 느낀단 말인가.
그녀가 보여주는 마음은 언제나 케이에겐 제 심장을 찌르는 창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왜.
* * *
“학질이 맞아요. 몇 가지 증상을 들어봤을 때 그렇습니다.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황달까지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내출혈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길어야…… 한 달로 봅니다.”
의사는 엘리자베스와 똑같이 말했다. 학질의 증상을 완화할 수는 있어도 학질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없다는 얘기도.
엘리자베스는 밤에 미리엄의 곁에 와서 울며 간호하는 그의 아내를 보며 당장이라도 아버지를 찾아가 다시 사정하며 빌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런다고 아버지가 약을 구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집에 좀 가. 친구네 집에 놀러와서까지 마누라가 잔소리하면 내가 좋겠어? 학질이라니 잘 됐군. 그것도 곧 죽는다니 말이야. 그 동안 마누라 잔소리 덜 듣고 부자 친구 집에 신세도 지고 말이야!”
갑자기 몸이 씻은 듯이 나아지기 시작했다는 미리엄이 멀쩡해진 얼굴로 메리가 가져다준 음식을 먹고 허세를 부렸다. 그 모습을 본 그의 아내가 방을 뛰쳐나갔다. 곧 문 밖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도 고개를 돌렸다.
이제 약을 만들 희망은 오로지 단 하나.
케빈 퍼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