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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8화 (1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8화

창문 밖에는 클레몬트의 인장을 건 마차가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케이 하커를 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케이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으려는 그를 말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크고 뜨거웠다. 케이는 여전히 화난 얼굴이었다.

“클레몬트에서 사람을 보냈어. 그냥 내가 여기 없다고 하고 돌려보내. 마차가 가고 나면 나도 여길 떠나면 되잖아.”

아버지는 모욕을 당하고 참을 사람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하는 사람한테 모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않는다.

상대가 국왕 폐하였다면 그분이 타운하우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뒀대도 무례하게 굴지 않았겠지만 지금 상대는 케이 하커다.

자본가의 아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지금의 케이가 절대 아버지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여기고 있었다. 아니, 이 남자는 아버지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 케이 하커는 이제 자신의 남편이 아니다.

“어디로 가려고?”

케이는 자신의 손을 잡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윌리엄 조쉬. 그 사람이라면 분명 당분간 지낼 곳을 알아봐줄 거야. 심지어는 아버지가 납득할 만한 교외 별장에 가 있게 해줄 수도 있고.”

윌리엄 조쉬는 자신을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그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케이의 표정은 도리어 사나워졌다.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랑 거취 문제를 논의하게 둘 생각은 없어. 그건 날 우습게 만드는 일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엘리자베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대로 문을 열고 집사에게 곧 내려가겠다고 말하라고 했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가 화난 눈으로 케이를 불렀다.

“미쳤어? 넌 공작가를 상대로 공녀를 훔쳐온 사람이 될 거야.”

“아니. 넌 공작가의 물건이 아니야. 그러니 내가 널 훔쳐올 수도 없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채로 말했다.

“이 집에 있고 싶나? 아님 조쉬인지 뭔지 하는 그 개 같은 자식이 마련해준 거처에 있고 싶나?”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개 같은 자식은 너뿐이야, 케이 하커. 언제나.”

“그 말은 이 개 같은 자식의 집에 있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문틀에 기댄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만 부탁하겠어. 이 개자식아.”

“말해. 귀여운 공녀님.”

케이가 비꼬듯 대답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내가 직접 말하게 해줘. 아버지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 * *

엘리자베스가 케이와 함께 내려가자 응접실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클레몬트 타운하우스의 하녀, 캐런이었다.

그녀는 레본의 이웃나라 선더렌 출신으로, 선더렌에서는 쫄딱 망하긴 했어도 2대 전에는 자작의 칭호를 받은 적이 있는 집안의 딸이었다. 그 사실 때문에 어머니는 캐런에게 타운하우스의 모든 관리를 전적으로 맡겼다.

그저 캐런이 선더렌 출신의 귀족이라는 이유로.

선더렌은 레본보다 신분사회를 강력하게 유지하는 나라로 레본의 많은 귀족들은 선더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캐런은 어머니의 허영을 부추기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고 빚더미에 오른 타운하우스의 규모를 축소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머니는 캐런이 선더렌 식 발음으로 어머니의 시중을 들면 만족스럽게 웃었다. 캐런은 그런 어머니의 믿음을 바탕으로 미치처럼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미치가 공작의 신임을 바탕으로 공작의 권력을 한 줌이라도 나눠가진 것처럼 굴듯 캐런은 어머니의 권력을 나눠가진 듯 굴었고, 또 어머니는 캐런을 통해 선더렌의 귀족이 된 것처럼 굴었다.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 그게 공작 부부와 공작 부부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의 본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마지못해 인사하는 캐런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케이 하커 씨. 공작께서는 무척이나 분노하신 상태십니다. 집주인이 잠시 출타해 계시느라 집안을 살피지 못하시는 사이 집안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사용인들을 위협하고 우리 아가씨를 납치해 가시다뇨!”

캐런의 말에 케이는 콧방귀를 뀌며 캐런의 앞에 있는 응접용 소파에 엘리자베스가 앉도록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가 앉자 케이 역시 그 옆에 앉았다. 케이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서 있는 캐런을 오만하게 바라보자 캐런의 표정이 당혹으로 굳었다.

“서 있을 건가? 그럼 서 있든지.”

캐런의 대답 따윈 기다리지 않았다. 캐런은 그런 케이를 노려보며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요? 결론만 말합시다. 지금 내 저택에 오기로 한 왕진 의사가 있어서 시간을 오래 빼줄 수가 없어.”

케이는 무릎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한 손은 소파에 걸친 채로 캐런을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내쫓을 기세에 캐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다, 당장 아가씨는 저와 함께 가도록 해주시고 공식적인 사과를 하셔야죠!”

캐런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케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케이는 그 말에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렇다는데?”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캐런을 보았다.

화장이 짙어 멍 자국이 거의 가려지긴 했지만 분명 캐런도 자신의 얼굴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캐런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걱정 어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비단 캐런만의 문제일까. 그저 자신을 클레몬트 소유의 귀중한 물건으로 여기는 클레몬트의 모든 이들의 문제였다.

“나는 클레몬트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캐런. 그건 나의 자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케이가 사과할 이유는 없다고 봐.”

엘리자베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캐런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가씨. 지금 저는 케이 하커 씨와 얘기하는 중이에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깨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왜 내 거취에 대해 케이 하커와 얘기를 한다는 거야?”

“그야 마님이 그러라고…….”

엘리자베스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넌 마님이 아니야. 그렇지?”

처음으로 엘리자베스가 그녀에게 싸늘하게 대답했기 때문에 캐런은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얼른 감정을 수습하며 자신과 클레몬트 공작부인과 자신의 관계를 내세웠다.

“그래도 마님이 안 계시면 제가 마님의 대리인이죠. 게다가 아가씨를 함부로 납치해가는 건!”

“그건 아니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계시지 않다면 내가 그 집의 대리인이야, 캐런.”

엘리자베스는 캐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납치는…….”

그러고는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처녀 시절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가지고 있다가 결혼식에 가지고 들어가는 게 레본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어머니가 이 손수건을 엘리자베스에게 직접 수놓아 선물해주었다.

‘행복하게 살아라, 엘리자베스. 여자의 인생은 아버지로부터 결정되어 남편과 자식으로 마무리 되는 거야. 너는 시작부터가 옳았으니 끝도 좋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말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게 그 사람의 인생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 말을 악담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게 잘못이었나.

엘리자베스는 손수건을 들고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그 덕분에 얼굴이 약간 따가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가씨! 그게 무슨 추접한 짓인가요. 마님이 보시면 분명 부끄럽게…….”

“분명하게 얘기하지, 캐런. 납치는 이게 바로 납치야.”

엘리자베스는 제 얼굴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 짙은 화장품이 손수건에 묻어나며 얼굴에서 사라져, 상처가 잘 드러났다. 그걸 본 케이의 표정이 굳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고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가두어놓는 거.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걸 납치라고 부르지. 네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사이에 미치와 함께 나를 납치했잖아.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면서 말이야. 그리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 캐런. 어머니와 너의 관계는, 그 좋은 관계는 내가 단번에 끝내줄 수 있어. 타운하우스의 재정 관리 상황 하나만 건드리면.”

“제가 타, 타운하우스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엘리자베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랬다고 해도 상관없어. 어머니는 사람을 잘 믿지만, 그만큼 잘 의심하는 사람이야, 캐런.”

엘리자베스의 말에 캐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울긋불긋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캐런을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권력을 이용해 사용인들을 짓누르려고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권력을 남용하는 귀족처럼 보이는 게 너무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좋은 사람이 돼라. 그리고 그건 너 혼자만 알고 있어라. 그걸 인정받으려고 드는 순간 피곤해져.’

엘 선생이 엘리자베스에게 한 말이었다.

캐런은 ‘재정 관리’라는 말을 회피하듯 얼른 저자세로 엘리자베스의 걱정을 하는 척 했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하커 씨와 같이 있는 건 아가씨의 평판에 결코 좋지 않답니다. 아무리 약혼을 했다 해도 결혼식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이 집에서 지내는 건…….”

엘리자베스는 캐런의 말을 막았다.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평판에 좋지 않겠지, 캐런. 잘 된 일이야. 아버지의 평판은 예상보다 훨씬 더 고평가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평판은 포기하셔야 할 거야. 납치된 약혼녀가 사실은 엄청나게 문란한 여자라고 소문이 날 테니.”

“아가씨! 문란이라뇨!”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그의 무릎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라 사실 그녀가 남자의 무릎에 앉았다기보다는 허공 의자에 앉은 느낌이었음에도—

“……아가씨!”

캐런은 기절초풍할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살짝 놀란 표정을 재빨리 숨겼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단박에 깨달은 케이는 그녀를 제 품안에 기꺼이 껴안았다. 케이가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를 당긴 탓에 그녀가 잠시 허공에서 버둥거렸지만 케이가 더 꽉 그녀를 껴안는 바람에 그건 멈춰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케이의 얼굴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있었다. 두 사람의 코가 닿았다.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렸다. 그의 어깨 봉제 선만 꽉 쥔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케이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가 뗐다. 그러곤 캐런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러며 엘리자베스의 금발을 손으로 살살 꼬았기 때문에, 그녀의 온 몸으로 간질거리는 감각이 타고 흘렀다.

“그럼 주인님과 마님이 가만 계시지 않을 거예요!”

캐런은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함께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케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먼저 자초한 일인데, 방금의 접촉은 아주 기분이 요상망측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그의 손에서 벗어난 것을 다행스레 여겼다.

“가만히 안 기다리면? 사람을 시켜 이 집에 쳐들어와 날 끌고 나갈 거야? 클레몬트의 평판을 얼마나 실추시키려고? 이제 난 성인이야. 법적으로 성인이 된 자식에게는 부모가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친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케이에게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다.

“만약 납치 운운하면서 하커 사에 편지를 보내 위로금이라도 달라고 요구하면 당장 결혼도 다 깨버릴 거야. 문란한 소문을 다 안고 나는 결혼도 안 하고 노처녀가 되어 클레몬트의 수치가 되겠지.”

“아가씨,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으시다면…….”

캐런이 눈가가 시뻘게져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뿌리치며 말했다.

“내 말을 단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해, 캐런. 네가 본 것까지 전부 말이야.”

캐런의 눈에 절망감까지 깃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거짓 감정이란 걸 알았다. 캐런은 제 마음마저 제게 유리한 대로 바꾸는 사람이었다.

클레몬트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건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자신도 그러지 않았나.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믿는게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겼으니 그렇게 믿어온 것이다.

엘리자베스 앞에서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짓는 캐런에게 뒤에 앉아 있던 케이 하커가 말했다.

“그래. 내가 얼마나 난봉꾼 같아 보였는지 정확하게 전하게, 미스 캐런. 나는 공작님의 따님을 한 입에 꿀꺽할 양아치라고.”

케이는 건들거리며 캐런을 노려보았다.

“이제 시간이 다 됐군. 내 집에서 꺼지게. 미스 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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