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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7화 (1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화

“무슨 일이야?”

엘리자베스가 케빈 퍼킨과 헤어진 후 마차에 도착했을 땐 케이가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뭐가 그냥인데.”

케이가 추궁조로 말하자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아까 미리엄의 진료를 본 의사의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아까 미리엄을 두고 헛소리를 한 의사의 명함이야.”

“이걸 왜 챙겼지? 감사 인사라도 하라고?”

케이가 피식 웃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의사가 괴저 환자의 절단 수술을 진행하면서 오른발 대신 왼발을 잘라놓았다더라고.”

케빈 퍼킨을 추궁해서 얻은 사실이었다.

“네가 아는 신문사가 있으면 그 얘길 전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엘리자베스가 담담하게 말하며 케이에게 명함을 건네주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복수를 하자?”

“복수라니. 공익을 위해 기꺼이 제보를 하자는 거지.”

환자를 무시하는데다 무능력하기까지 한 저런 의사를 엘이 보았다면 분명 리볼버를 꺼내 주저 없이 쏘았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답을 마친 엘리자베스가 마차에 도도하게 몸을 실었다. 그 모습을 보는 케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케이는 마차 문에 기댄 채로 물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간단해. 더 이상 나한테 상처 주는 사람들을 참아주지 않기로 한 거야. 내 아버지를 포함해서.”

그게 너라고 해도.

엘리자베스는 다음 말은 삼켰다.

케이는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품 안에 그 의사의 명함을 집어넣었다.

곧 엘리자베스와 케이, 그리고 미리엄을 실은 마차가 도개교를 달려 로킨트 저택에 도착했다.

로킨트 저택은 엘리자베스가 기억하는 그대로였지만 약간 달랐다. 케이가 독신으로 살고 있는 상태인 만큼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정원은 전생에서 엘리자베스가 기억하는 대로 화려한 분위기로 치장되어 있는 대신에 휑하다 싶을 만큼 몇 개의 관목뿐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서 두 사람의 신혼집은 늘 비싸고 커다란 나무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3층에 올라가지 않으면 주변 풍경도 잘 보이지 않았다. 케이는 그렇게 말하면 로킨트 스트리트의 매연으로 가득한 뿌연 풍경이 뭐가 좋으냐고 그녀를 비꼬곤 했지만 그녀는 로킨트 스트리트의 풍경이 보고 싶었다.

케이의 출근길이 보고 싶고, 그가 퇴근하는 모습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으며, 그의 세계에 소속된 기분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로킨트 스트리트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그녀는 결코 그의 세계에 소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이 집에 오기 전에 정원을 화려하게 채울 생각이었어.”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정원에 머무는 것을 본 케이가 말했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보았다. 그러자 케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로킨트에서 가장 화려하게 말이야. 귀족들의 타운하우스에 있는 것들처럼, 에드워드 3세께서 하사하신 크랜베리 나무 같은 건 절대 있을 수가 없겠지만.”

“화려한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엘리자베스의 눈에 익은 두 사람이 집 안에서 걸어왔다. 집사 콜린과 하녀 메리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보는 순간 너무도 반가워 저도 모르게 그들을 와락 껴안을 뻔했다.

미리엄의 상태를 본 집사 콜린이 그에게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도련님. 이 분은……?”

콜린이 미리엄을 부축하며 묻자 케이가 말했다.

“내 친구야. 마차를 내줄 테니 왕진 의사를 불러와, 메리. 급하게 볼 환자가 있다고 해.”

“네, 도련님.”

메리는 공손하게 대답하곤 엘리자베스를 슬며시 보았다. 케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곤 덤덤하게 말했다.

“이쪽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이야, 집사. 누군지는 설명할 것 없겠지. 당분간, 아니, 클레몬트 양이 원할 때까지 이 저택에서 머물 수 있도록 침실을 내어줘.”

“미리 만들어둔 부부침실에서 함께 지내시는 겁니까?”

콜린의 말에 케이의 덩치가 잠시 움찔했다.

“아니, 따로 만들어.”

“남은 방은 응접실 옆의 손님용 숙소인데 거긴 방이 좀 어둡습니다, 도련님.”

“그럼 내가 서재에서 자겠어! 엘리자베스에겐 내 침실을 내주면 되잖아!”

케이는 귓가가 시뻘게진 채로 소리 질렀다. 집사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집사의 한결같음이 참 신기했다.

전생에서 엘리자베스는 날선 케이의 목소리에는 늘 겁을 집어먹었는데 집사 콜린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재밌어하는 것 같기까지 했다.

집사는 미리엄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고 메리는 마차에 올랐다.

케이와 단둘이 남겨진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케이에게 물었다.

“서재가 있었어?”

신혼집으로 개조되고 난 후의 로킨트 저택에는 케이의 서재 같은 건 없었다. 케이는 책을 읽는 데에는 취미가 없다고 말했고,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믿어왔다.

그런데 실은 있던 서재를 없앤 것이었나? 대체 이 사람의 세계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더 있을까? 애초에 아는 게 있을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왜인지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뭐 그냥 말이 서재지, 책을 본다기보단 공장 업무나 처리하는 곳이야.”

“구경하게 해줘.”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어깨가 단단하게 굳었다.

“왜?”

서재를 보여달라고 했을 뿐인데 케이는 왜 당황할까? 알고 보면 그 서재에 수많은 혁명 서적이 꽂혀 있는 걸까? 귀족들에 대한 원색적인 욕과 귀족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이라도 걸어놓거나?

엘리자베스는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것에 어떤 강박도 없었고 무엇보다—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는 그 이름을 한 번 찾아보고 싶었다. 세계 화학사 같은 책이 있다면 거기서 찾아볼 생각이었고 보통 서재에는 인명사전 같은 게 있기 마련이었다.

“학질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고 싶어.”

“그런 의학 책 없어. 백과사전이 있긴 하지만…….”

“그런 거면 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끙,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다행히도 케이의 서재에는 귀족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 내지는 무시무시한 무기나 혁명 서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추위를 피할 벽난로와 휑한 바닥에 놓인 복실복실한 카펫, 그리고 오래된 책상과 책꽂이 하나가 전부였다. 왜 이걸 케이가 보여주기 싫어했나, 싶을 정도였다.

“급하게 짐을 옮기느라 갖출 걸 갖추지 못했어.”

“……안 물어봤어.”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책꽂이 쪽으로 걸어가자 케이는 성큼성큼 먼저 책꽂이 쪽으로 걸어가더니 후딱 두꺼운 백과사전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거야. 사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다리가 달달달 떨리는 걸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고마워…….”

엘리자베스는 그 책을 받아들고 다시 책꽂이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케이가 그 앞을 막아섰다.

“왜.”

“아니, 사전보다 자세히 쓰여 있을 법한 책이 있는지 좀 보려고!”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이는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벽 쪽으로 비켜섰다. 그러곤 괜히 창밖을 보며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누가 봐도 어미를 잃은 새끼 양 같은 초조함을 드러내며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행동을 애써 무시하며 책꽂이로 걸어가 책을 살폈다.

왜 그러는 거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책꽂이를 눈으로 쓸었다. 그리고 곧 그곳의 책들이 대부분, 아니, 거의 다 자신이 읽은 책임을 알아보았다.

사실 이곳의 책들은 꼭 자신만 읽은 책은 아닐 것이었다. 귀족의 사교 모임에서 필수 서적으로 일컬어지는 책들이었다. 미술, 음악, 조각에 대한 얕고 넓은 지식을 기술해 놓은 책들.

엘리자베스가 그닥 흥미롭게 여기진 않았지만 매를 아끼지 않는 가정교사 덕에 그 안의 내용은 외우고 있는 책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왜 이 책들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케이는 귀족의 사교 모임에 필요한 지식을 익히면서, 동시에 그것을 익히는 자신의 모습을 창피해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아는 케이의 성격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귀족을 경멸하는 케이 하커.

그러나 가문의 이권과 자신의 강요에 못 이겨 귀족과 결혼한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책 중 그나마 화학사와 연관된 책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재미없는 책들을 읽느라 고생했나보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재미가 없진 않아. 그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걸어와 초조한 표정 그대로 그녀 앞에 놓인 책상에 앉았다. 늘 그렇듯 품위 따위는 개나 줘버린 행동이었다.

“흥미가 없는 거지.”

“그게 그거야,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대답하곤 화학 관련 책을 집어 들어 가지고 나가려다가 문득 멈춰 섰다. 책을 꽉 쥐자 딱딱한 표지가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어왔다. 가슴 속에서 답답함이 일었다.

그녀는 그 답답함을 터트리듯 거친 몸짓으로 뒤로 돌아 말했다.

“왜 그냥 싫다고 말하지 않았어?”

“뭐?”

“사교 모임 같은 거 말이야. 싫은 티는 냈어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나는 네가…….”

나와 함께 하는 것 자체만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귀족을 혐오하는 줄은 몰랐어. 네가 혐오하는 걸 강요해온 나를 같이 혐오하는 줄은 몰랐어.

사실 엘리자베스는 2년 전 자신의 생일날 케이 하커와의 약혼을 요구할 때만 해도, 케이 하커의 경멸 어린 표정을 볼 때만 해도, 자신과의 약혼이 케이 하커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다. 그레이트 레본은 귀족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기 팍팍한 곳이니까.

케이 하커가 자신과 결혼해 귀족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케이 하커에게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가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이기적인 계산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게 그런 그레이트 레본 그 자체를 깨부수는 것이었다면, 그걸 알았더라면, 엘리자베스는 그를 자신과의 약혼으로 묶어 그를 괴롭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닌가. 알았더라도 자신은 이 이기적인 짓을 강행했으려나.

스스로의 선택에 자신이 없어서 엘리자베스는 더 화가 났다. 그 화가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케이 때문인 척하려고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날 거절하지 않았어? 네가 날 그렇게 싫어하는지 몰랐어. 약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거절했다면, 그랬다면 난…….”

“갑자기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난 널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아.”

“그래,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엘리자베스는 소리쳤다.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케이 하커가 자신을, 아버지와 똑같은 귀족으로 보고 혐오하며 죽음으로 내몰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면, 도무지 참아지지가 않았다.

“네 말대로 넌 날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겠지. 그저 내가 너한테 가장 쓸모 있고 아름답고 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 내 말은 너는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거야. 나를 억지로 떠맡은 물건처럼 여길 거였다면 차라리 나를…… 나를……!”

그 순간이었다. 케이 하커의 눈이 살벌하게 변했다. 순식간에 책상에서 내려온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코앞까지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넓은 보폭으로 걸어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성난 얼굴로 말했다.

“난 너를 물건으로 취급한 적 없어.”

대체 왜 화가 난 얼굴이야. 화는 내가 났는데.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랬다면 네가 한 번이라도 언급한 책들을 전부 사모아서 이 책꽂이 안에 처박아 두지도 않았겠지. 네가 지껄이는 수많은 레본의 예술가에 대한 고상하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 말이야.”

뭐? 이 책들이 전부 나 때문에 산 거라고?

케이 하커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본 케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 방을 나가려고 했다.

“잠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손님이 왔습니다.”

그 말에 케이의 걸음이 멈췄다.

손님? 케빈 퍼킨이 약속시간보다 이렇게 이르게 왔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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