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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6화 (1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6화

“뭐야. 뭐 이런 꼬맹이가 어디서 약을 팔어!”

그때 엘리자베스의 옆에 서 있던 괴저 환자가 까마귀 탈 아래에 숨겨진 남자의 얼굴을 보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까마귀 탈 아래에 있던 남자의 얼굴은 ‘청년’도 아닌 ‘소년’에 가까운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희디 흰 피부에 엘프 같이 고운 얼굴.

엘리자베스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놈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뭐 하는 거예요. 환자들한테 함부로 약을 팔다니.”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놈을 몰아세웠다.

“아앗, 이거 놔요! 아니, 내가 믿을 만한 약을 만들어 팔겠다는 데 뭐가 문젭니까, 엉?”

그러자 소년은 꽤나 강단 있는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그 기세에 눌려 소년의 소매 끝을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어버렸다.

그 순간, 괴저 환자가 소년의 멱살을 쥐려고 달려들었고, 소년은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복도 끝으로 도망가버렸다. 분노해서 씩씩거리던 환자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거기서 그걸 놓으면 어떡해!”

엘리자베스가 환자의 기세 앞에 어버버하는 사이에, 뒤에서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약혼녀한테 볼 일 있나?”

키가 큰 케이는 엘리자베스보다 한참 위에서 환자를 노려보았다. 환자는 케이를 올려다보더니 헛기침을 하곤 중얼거렸다.

“아, 아니…….”

그는 잠시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쏘아보았지만 곧 대기실로 돌아갔다.

케이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마치 제 주인을 사수하는 번견처럼 충성스럽게 그를 노려보며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고 있다가, 그가 완벽히 그녀의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긴장을 풀고 물었다.

“뭐야?”

“어, 그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물음에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창가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달려가서 잡을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을 붙잡을 때 실수로 그의 옷에서 떨어진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곧 엘리자베스의 눈에 멀어지던 소년이 저쪽으로 돌아 병원의 다른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며 유리병을 품 안에 집어넣고 케이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미리엄의 차례는 언제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접수처에 있던 간호사가 미리엄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금방 소년을 만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을 했다.

* * *

“학질이요? 하지만 학질엔 치료약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환자는 전형적인 식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어요.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 앓는다는 얘긴 오히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공동생활을 많이 해서 그런 걸로 보는 게 더 적절하겠구요.”

의사는 커튼 뒤에 미리엄을 두고 엘리자베스와 케이에게 고개를 숙여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사실 공장 노동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 좁아터진 곳에서 살 비비며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죠. 더러운 병이 옮겨 다닌다고 해도 놀랍지 않아요. 그런데 저 환자랑은 무슨 관계가 있으십니까? 뭐 떼인 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아까처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의사도 벽에 던져버릴까 싶어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케이는 냉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평생 친구요. 자네 말대로라면 나 역시 같은 병에 옮는 게 당연하겠지만 나는 멀쩡하다오.”

케이는 굳어진 얼굴로 미리엄에게 주사약을 넣으려는 간호사의 손을 쳐냈다.

“진료는 엉터리로 받았으니 수납은 건너뛰어도 되겠군.”

케이의 말에 의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신사 분!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자신 있으면 하커 사로 진료비를 청구해. 그 대신 환자가 뚝뚝 떨어지는 건 감수해야겠지?”

케이는 의사에게 시계주머니 속에서 하커의 이름이 적힌 회중시계를 내밀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의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 치료는 집에 가서 하는 게 좋겠어. 미리엄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는 미리엄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머리맡에서 속삭였다.

“미리엄, 집으로 가요.”

미리엄이 힘겹게 눈을 뜨며 말했다.

“그러게, 비싼 병원 다 소용없다고 했지?”

그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 자네 말이 다 맞아. 내가 멍청했군.”

케이가 반쯤 몸을 일으킨 미리엄을 업다시피 해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간호사가 그런 케이를 말리려고 시도했지만 의사가 그런 간호사를 말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며 품 안에 있던 작은 유리병을 손에 꽉 쥐었다.

케이는 미리엄을 부축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 사이에도 미리엄은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학질은 상당한 근육통을 유발하는 질병이었다. 하지만 학질을 낫게 할 수 있는 자연의 치료제는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다. 금과 은보다 값이 비싸지만 케이 하커에게 의문의 비상금이 있으니 비싼 건 둘째 치더라도, 아버지가 저리 나오면 왕실을 통하지 않고서는 치료제에는 손도 댈 수 없다.

그럼 방법은 단 하나.

“빨리 내려와.”

케이는 꾸물거리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미리엄을 데리고 앞서서 가다가 멈춰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먼저 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방법은 단 하나—

화학적 합성 물질, 퀴닌의 합성 시기를 앞당기는 것.

엘리자베스의 눈이 병원 복도로 들어오는 햇빛을 만나 반짝거렸다. 마치 황혼 때 물 밖으로 튀어나오는 돌고래의 피부처럼 말이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눈을 보며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이봐. 왜 그러고 서 있…….”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옆을 돌아 로비에서 왼쪽 계단으로 몸을 틀었다.

그곳에는 다른 병동의 다른 진료 대기실이 있었다. 뒤에서 케이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진료 대기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맨 뒷자리에 앉아 또 다른 환자들에게 약을 팔고 있는 까마귀 탈을 쓴 소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뚜벅뚜벅 그 곳으로 걸어가 소년의 뒤에 섰다.

소년은 엘리자베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떠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이 품 안에서 K. P.라는 글자와 함께 작은 문양이 새겨진 유리병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곧 기척을 느낀 소년이 슬쩍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뭡니까, 예? 대체 왜 나를 쫓아다니는…….”

“케빈 퍼킨.”

“…….”

소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흥정을 하고 있던 환자가 무슨 일이냐는 듯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물 흐르듯 일어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결코 뛰지 않는 총명한 소년의 뒤를 따라가 복도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소년에게 말했다.

“니콜라스 교수님에게 찾아가서 당신의 이 제조약을 보여드려도 괜찮을까요? 케빈 퍼킨!”

그 말에 소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케빈 퍼킨.

엘리자베스는 그의 이름을 엘의 입에서 한 번, 그리고 세계 화학사라는 책에서 한 번 보았다. 책에서는 얼굴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이제는 미래가 된 과거의 일이다.

왜냐하면 아직 케빈 퍼킨은 왕립학술원의 정식 회원이 아니라 교수의 조수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학질의 유일한 합성 치료제 ‘퀴닌’의 최초 제조자 케빈 퍼킨은 아직 열일곱 살짜리 애송이로, 니콜라스라는 깐깐한 교수 아래에서 제조식 몇 개를 훔쳐서 불법으로 약을 팔아먹으며 근근이 먹고 사는 상태인 것이다.

“케, 케빈 퍼킨이라니 사람 잘 못 봤어!”

소년은 더듬거리더니 얼른 반대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

“네,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더라구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소년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소년을 따라 걷다가 우뚝 멈춰 서서 말했다.

“이 유리병을 보는 순간 당신이 케빈 퍼킨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제조약을 파는 건 불법일 뿐만 아니라 교수의 제조식을 훔친 것이라, 니콜라스에게 K. P.라는 머리글자와 왕립학술원의 인장이 박힌 이 유리병을 가지고 가 사실을 고해바치면 당신이 평생 염원하던 왕립학술원의 회원이 되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요원해질 텐데요. 케빈.”

그 말에 케빈 퍼킨, 이 영악한 세계적인 화학자의 고개가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끼긱거리며 엘리자베스 쪽으로 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앞에 유리병을 내밀었다. 케빈이 그걸 낚아채려는 듯 한 발을 계단 위로 딛자 엘리자베스는 유리병을 쏙 제 가슴 안으로 넣었다.

“대체 나, 나에 대해 어, 어떻게 아는 거요?”

케빈 퍼킨은 까마귀 탈을 벗어들었다. 그러자 케빈 퍼킨의 땀에 잔뜩 젖은 검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엘리자베스가 그의 얼굴을 본 건 조금 더 후의 얼굴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엘프 같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의 미모를 감상했다. 엘만큼이나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이 해주었던 수많은 얘기들을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왕립학술원의 고지식함에 대한, 또 그 고지식함 앞에 지쳐간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얘기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흔들곤 했다. 왜냐하면 엘이 들려주는 그런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결국, 기어코, 자신의 발견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냈고 그리하여 세상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앰버와 조쉬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 신념이라면, 그 지식인들의 방식은 연역적 추론과 통제된 실험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후자에 더 관심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즐거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케빈 퍼킨의 이야기였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쪽에선 사실 기발하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의 재능은 그쪽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삽질 말이야. 마치 광부가 광산을 캐듯 이놈 자식은 화학식이 주어지면 그걸 만들 때까지 집착하는 그 광기가 살벌했어. 그게 그 녀석이 소 뒷걸음질 치다가 퀴닌을 제조하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

엘리자베스는 엘의 말을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케빈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았냐구요? 난…….”

이건 엘리자베스의 추론이었다.

엘 박사는 케빈 퍼킨과 왕립학술원의 지식인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엘이 한 얘기 중에는 퍼킨을 실제로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그의 성격과 연구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케빈 퍼킨과 엘은 같은 탈을 애용한다. 그 말은 엘이…….

실제로 퍼킨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추론의 성패는 지금 확인해보면 된다.

“난 당신과 똑같은 탈을 쓰고 다니는 뒷골목의 의사를 알아요. 별칭은 엘. 실제 이름은…….”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케빈 퍼킨이 홀린 듯한 눈빛으로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우드 밀. 당신 엘 선생을 알아?!”

케빈 퍼킨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흥분을 숨겼다.

엘 박사의 본명을 알아낸 것이다. 이제 엘의 실체에 대해, 이 시간여행과 엘우드의 행방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애써 무뚝뚝한 표정으로 케빈에게 내려갔다. 그러고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케빈의 얼굴에 대고 분명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네, 알아요. 케빈. 오늘 밤, 로킨트 스트리트에 있는 케이 하커의 저택에서 만나죠. 오늘 오지 않으면 내일 아침 니콜라스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가겠어요. 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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