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5화
엘리자베스는 잠시 그 말이 주는 의미를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엘리자베스는 잠깐의 침묵을 케이 하커가 자신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으로 오해할까 봐 얼른 말했다.
“안 돼. 가출하라고? 어디로 가더라도 결국 공작가가 날 찾아낼 거야. 리오든 슬럼가의 싸구려 여관방을 전전하면 모를까…….”
엘리자베스는 거기까지 말을 잇다가 윌리엄 조쉬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전처럼 또 그를 협박해 방을 얻어 볼까? 꽤나 매혹적인 방법이었다. 혁명가들과 회귀 초장부터 얽힌다는 게 아주 찝찝하다는 점만 빼면.
하지만 윌리엄 조쉬의 비밀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만으로도 왜인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확실한 돈줄을 쥔 사업가처럼 말이다.
“싸구려 여관방? 그런 곳이라면 너는 분명 5분도 못 버티고 뛰어나올걸. 그런 데선 쥐랑 같은 이불을 덮어야해.”
5분도 못 버티고 나오진 않았다. 밤새 한숨도 못 자서 그렇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로킨트 저택에서 지내라는 거야. 내가 있는 공장에서 저택이 가까우니까 나는 이미 그쪽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고…….”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경계심까지 깃들었다. 덤덤하게 말하던 케이가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 왜 생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고양이를 주시하는 생선가게 주인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어?”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나한테 흥분할 수는 있다며.”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케이에게서 자신의 드레스 리본을 뺏어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케이는 헛기침을 했다.
“그건…… 그건…… 그냥…….”
“그냥 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리본을 다시 풀어서 제대로 묶었다. 케이의 손에 엉망이 되었던 드레스 장식이 제대로 돌아왔다. 그 상태로 엘리자베스가 돌아서자 짙은 남색 드레스가 엘리자베스의 하얀 몸을 더욱 희고 아름답게 강조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네가 헛된 꿈을 꾸지 않길 바라니까 하는 말이었어.”
케이는 그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라는 인상을 엘리자베스에게 심어줄까 봐 얼른 덧붙였다.
“게다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하는 짓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움찔하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본능 말이야. 그게 나한테 반응하기는 한다는 뜻인 거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의 눈은 동그랗고 그 안에는 누가 그려놓기라도 한 것 같이 또렷한 파란 눈동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눈을 치켜뜰 때마다 그녀는 세련된 가게에서 파는 인형처럼 보였다. 어린 케이 하커가 백화점 옆에 있는 포목점에서 심부름을 갔다 오는 길목에 놓여 있던 귀족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상점 같은 곳에서나 파는 인형 말이다. 그런 인형 같은 눈으로 본능에 대해 말하자 케이는 자신이 더더욱 추악한 인간처럼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질문은 어린 귀부인이 하기엔 적절치 못해 보이는군.”
엘리자베스가 보기에, 케이가 신분을 언급하며 자신을 비꼰다는 것은 그가 궁지에 처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본능의 끌림을 느낀다고 해서, 또 엘리자베스를 도의적으로 그녀의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빼돌려주었다고 해서, 그게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켈토로 함께 가고 싶어했다는 뜻도 아니고. 무엇보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케이가 결혼 전부터 꽤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상태였다.
케이의 비밀.
그 모든 것을 알기 전엔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적도 연인도 아니었다.
“어쨌든, 로킨트 저택에서 지내는 것도 곤란해. 아버지는 내가 약혼자와 너무 오래 있는 걸…….”
“불편해한다는 거로군. 아무리 제 딸을 나에게 주기로 했기로서니 더러운 가문의 소속물로 여기지는 말아라. 그런 거지.”
엘리자베스의 말을 막고 케이가 비꼬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급격하게 두 사람 사이에 다시 건너가기 힘든 강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케이가 먼저 이어 말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상관이 있나? 널 이렇게 만든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싫어? 왜?”
“그런 건 아니야. 난…….”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를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버지가 미워.”
그 말에 케이가 만족스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버지를 기분 나쁘게 하고 싶다면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도자기를 깰 게 아니라 널 그 집에서 빼와야 해. 단언컨대 그 집에서 가장 소중한 건 물 건너 온 도자기 따위가 아니라 너니까.”
“뭐?”
“그렇잖아. 귀하기로 보나, 쓸모 있기로 보나, 아름답기로 보나 거기서 가장 소중한 건 네 쪽이었으니까 도자기가 아니라 널 들고 나른 거지, 나도.”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한순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때까지 가족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을, 케이 하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 건방진 자식에게서 가장 먼저 듣게 되다니.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멍청했던 자기 자신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줄도 몰랐던 그때의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했던 것은 자연의 순리 같은 것이었으리라.
현재를 사는 인간이 과거에 대해서 쉽게 논평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므로 후회는 얼마나 편하게 인간을 지배하는가.
그때였다.
점원이 땀범벅이 된 얼굴로 아래층에서 내려와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말한 덕에 엘리자베스는 감상적인 기분에서 빠져나왔다.
“부인, 신사 분께서 가장 좋은 걸로 찾으라고 해서 오래 걸렸네요. 이게 요새 나온 화장품인데 아주 인기가 좋아요!”
점원의 손에는 온갖 종류의 화장품이 들려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뭘 가장 좋은 것까지…….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았고 그는 늘 그렇듯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상처는 왜 나신 거예요?”
점원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케이를 보자 엘리자베스가 홀랑 대답했다.
“우리 집에 아주 못돼 처먹은 사촌 동생이 살고 있는데, 그 녀석이 저를 골탕 먹이려다가 팔꿈치로 쳤어요.”
“아이고, 못된 놈이네요!”
“그러게요. 돌아가면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려 주려구요.”
그 말에 케이가 소리 내어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정말 좋겠군.”
* * *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도개교 근처에 도착했을 땐 미리엄이 아내의 부축을 받아 서 있었다.
미리엄은 어제보다는 살짝 나아 보였지만 여전이 안색이 핼쑥했다.
열이 나는 게 좀 나아지자 이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고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반증하듯 미리엄이 덮은 아내의 숄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케이는 미리엄을 부축해 마차에 실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꽤나 감쪽같아졌기 때문에 마차에 탄 미리엄은 그녀의 상처를 눈치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왜 이렇게 늦어? 켈록. 빨리 병원 가서 감기약 처방 받고 오후에 출근해야 하는데!”
미리엄의 말에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여보. 오늘은 제발 쉬어요. 당신이 공장에서 잘린대도 뭐라고 하지 않겠어요.”
“걱정 하지 마세요. 부인. 미리엄의 병가처리는 이미 제가 해두었으니까 하루 정도 병가 내는 걸로 공장에서 잘리지 않을 겁니다.”
케이가 제법 든든한 말투로 그의 아내에게 말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조금 놀라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미리엄의 아내는 시내에서 품삯 받은 일을 보기로 하고, 케이, 엘리자베스, 미리엄을 태운 마차가 리오든 시내의 병원에 도착했다.
“사립 병원? 이런 곳에 올 필요가 뭐 있어. 그냥 개인 의원에 찾아가면 그만이야! 자본가랍시고 돈 지랄하는 게야!”
미리엄이 꽥꽥 소리를 질러댔지만 케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닥쳐, 미리엄. 넌 감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거위 같은 목소리가 문제야. 이번 기회에 의사 선생한테 성대를 잘라버리라고 하든지 해야겠군.”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의 과격한 의사소통 방식에 놀랐지만 이내 적응했다. 두 사람은 병원 계단을 걸어 진료 대기실에 도착하는 내내 끊임없이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리엄이 켈록거릴 때마다 케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챙겼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미리엄에게 물을 좀 먹이고 와야겠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혼자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몇몇 환자들이 또 자리했다.
엘리자베스는 복도 밖으로 분주하게 걸어 다니는 간호사와 의사를 보며 엘과 함께 했던 지난 1년을 떠올렸다. 생에서 가장 힘들고 보람찬 나날들이었다.
엘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으로선 신체 반응이 거의 없어 잘 실감이 나지 않지만 시시각각 자신의 몸은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걸 치료할 방법은 엘의 치료제뿐이다.
또 지난 1년간 느꼈던 활기를 다시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감금당해 매질을 당하는 어젯밤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아끼는 것들로 둘러싸인 이 클레몬트 공작가를 벗어나 엘의 조수로 살아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1년 6개월만 살 수 있대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엘은 자신에게 분명 다시 엘의 조수가 되라고 했다. 그 약속이 진심이었다면 꼭 엘리자베스도 엘을 찾으면 그의 조수로 다시 일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엘부터 찾아야 했다.
엘은 자신이 어디에 있을 거라는 얘긴 해주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해주려는 순간에 시간여행으로 넘어와 버렸다.
하지만 엘이라면 분명 빈민구제원이나 공공의료원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까? 몰록에게 물린 사람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그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를 툭툭 쳤다.
“치료제를 구하슈?”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까마귀 마스크를 쓴 사람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크게 떴다. 까마귀 마스크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그녀는 그런 사람을 인생에 한 명 만나보았다.
“……다, 당신은…….”
“아, 맞소. 맞소. 리오든에서 제일 가는 의원. 소문 들었구만?”
엘리자베스는 장난스럽고 능글맞은 목소리를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알다시피 이런 사립 병원이라는 게 덤터기만 씌우고 어디 제대로 하나 고치는 것 봤소? 전에는 병원에서 괴저에 걸린 남자의 오른 다리를 잘라내주기로 해놓고 왼 다리를 잘라낸 적도 있다우.”
까마귀 마스크를 쓴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그의 명성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기고만장한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유언비어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가 쓴 탈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는데도.
“정말요?”
그때였다.
엘리자베스의 옆에 있던 환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얘기에 끼어들었다. 환자의 손에는 노란 고름이 묻어난 붕대가 감겨 있었다. 괴저에 걸린 것 같았다.
환자가 관심을 보여주자 곧 까마귀 마스크를 뒤집어 쓴 남자가 신나게 사립 병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결론은 자신에게서 치료제를 사라는 것이었다.
“나에게서 치료제를 사면 단돈 3페니에 드리지. 사립 병원에서처럼 기다릴 필요도 없지요.”
그제야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의 목소리가 엘에 비하면 너무 어리고 장사치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슬그머니 환자를 꼬셔서 일어나려는 남자를 따라 일어났다.
그럼에도 확인을 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복도까지 남자를 뒤따라 가다가 환자를 앞질러 남자의 복면을 벗겨버렸다.
“이게 뭐 하는……!”
그러자 남자의 엘프처럼 곱디고운 피부가 드러났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