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화
어젯밤, 저 마구간지기가 벌벌 떨며 클레몬트 공작에게 내민 채찍으로 엘리자베스는 가축처럼 맞았다. 클레몬트의 이름을 달고 로킨트의 노동자들과 만났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학질이라고? 그 더러운 노동자의 병이 너에게 옮았을지 모르니 어서 소독을 해야겠구나!’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흥분한 눈 속에서 희열을 느꼈다.
이 세상에는 합법적이라고 여겨지는 폭력이 있다. 단죄, 그리고 제 소유물에 대한 화풀이.
아버지가 지금까지 내내 단죄의 탈을 쓰고 자신을 소유물로 여기며 화풀이를 해왔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아버지는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으며 그게 자신을 얼마나 속상하게 만들었는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그녀를 때리고 방치하다 저택에 가둔 채 나가버렸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 패듯 때렸다는 것도 황당했지만 그 폭행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아예 감금해버리는 데에 어머니, 그리고 사용인들이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동조한다는 것이 더 황당했다.
케이의 방문을 깨닫게 된 것은 그녀가 저택 2층에 있는 제 방에서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넋이 나가 있을 때였다.
그녀는 정원을 서성거리는 케이를 발견하고 제 방문 손잡이를 의자로 부숴버렸다. 바다를 건너온 상아 손잡이에 대해 아버지가 갖고 있던 자부심을 알고 있었기에 더 통쾌했다.
그녀를 붙잡으려는 하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엘리자베스는 곧바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막 문으로 들어온 집사가 문을 닫을 새도 없이 그녀에게 걸어와 언성을 높였다.
“아가씨! 근신 조치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케이를 만날 거야.”
“미치셨어요? 공작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만나실 수 없어요.”
“난 그의 약혼녀야.”
“두 분이 결혼하실 때까지 공녀님은 공작님의 슬하에 계신 겁니다.”
집사의 말을 듣고서 분명하게 알았다. 자신은 공작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집사와의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현관을 향해 뛰었다.
자신을 구해줄, 요란스럽고 건방진 자식을 만나기 위해.
* * *
엘리자베스의 손가락 욕에 마구간지기가 당황하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도도하게 케이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케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정문에 서 있던 마부에게 소리쳤다.
“가자!”
곧 마부가 달려와 마부석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당장 이 끔찍한 곳을 떠나고 싶었다. 어젯밤의 사건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기억이 조금도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맹목적인 분노는 그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냥개를 향한 화풀이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지 않겠다.
엘리자베스는 이번 생에서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이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이라는 사실에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젠장.”
“손가락 욕만큼이나 입으로 하는 욕도 잘 하네. 우는 것보다 마음이 들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엘리자베스는 따뜻한 케이의 입술이 제 이마에 닿는 순간 다시 욕을 질펀하게 쏟아내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 멀리서 집사가 달려오는 데 마차 앞을 마구간지기가 막아서자 케이는 제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꺼내어 창문 밖으로 던졌다.
“이거나 먹고 꺼져!”
동전 소리에 마구간지기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주우려고 움찔 뒤로 물러났고 그 틈을 타서 마부가 마차를 몰았다.
다행히도 대문이 열려 있었던 탓에 마차는 타운하우스에서 뛰쳐나온 집사와 사용인들을 따돌리고 리오든 시내로 달릴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깝쇼?”
마부석에서 마부가 묻자 케이는 제 품에 안겨 작은 새처럼 우는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가고 싶은 곳을 정해놨나?”
“아니. 갈 곳이 아무데도 없어.”
그 말에 케이는 가슴이 끔찍하게 아프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가려던 곳을 가지. 도개교로 가게! 하일 강변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으니까.”
“누구…… 누굴 만나려고?”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셔츠를 꼭 말아 쥐고 물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벌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클레몬트 공작.
그자가 정말 제 딸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귀족의 품위를 운운하던 자가?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추궁해 모든 사실을 알아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 마음을 꾹 누르고 대답했다.
“미리엄을 데리고 시내 병원에 갈 거야. 그 김에 네 상처도 보면 되겠군.”
“그럼 오늘은 나랑 같이 병원에 가고 싶어서 온 거야?”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케이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네가 징징거리는 게 듣기 싫으니까. 안심시켜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지.”
결국 내 말대로 하기로 했구나. 그럴 거면서 말을 그렇게 개같이 하다니.
“넌 언제나 좋은 말도 듣기 싫게 해. 케이 하커, 이 개 같은 자식…….”
엘리자베스의 욕지거리에 케이는 건방지게 웃었다. 그러곤 말했다.
“아까 그 도자기 말이야. 깨고 올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말해. 그럼 당장 마차를 돌려 그 집에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다 깨주지.”
엘리자베스는 그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헛소리. 네가 깨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둔 거야.”
“나도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깨지 않은 거야.”
케이 하커는 그렇게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다시 재킷을 걸쳐주며 마부에게 말했다.
“도개교에 가기 전에 에렌델에 있는 옷 가게에 들러.”
* * *
케이가 옷 가게에서 보통 노동자들이 봉급을 70년은 모아야 살 수 있는 드레스를 골랐을 때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미쳤어? 네가 면직 공장을 물려받은 건 겨우 한 달 전이라며. 그 한 달 만에 떼부자가 된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안 되면 로버트 하커 씨 댁으로 청구서를 보내면 되지.”
엘리자베스는 전생에서 유독 돈 문제에 깐깐하게 굴었던 제 시부를 떠올렸다. 케이 하커가 자신 때문에 그런 시부에게 잔소리를 듣게 하는 건 싫었다. 이제 공작가에서 케이 하커에게 무슨 악담을 퍼붓고 또 무슨 과한 요구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지체 없이 다른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행거로 걸어갔다. 그러자 케이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다시 자리로 돌려보내며 말했다.
“농담이야. 나한테도 돈 있어.”
“무슨 돈?”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의 비상금에 훈수 놓지 마. 비상금을 탈탈 털어 쓰더라도 네가 로킨트에서도 지금처럼 호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은 조치할 테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앰버의 말을 들으면 레지스탕스와 케이의 관계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말은 케이가 그때부터 레지스탕스의 돈줄이었다는 거고, 케이에겐 그 정도 자금이 있었다는 뜻이다. 대체 어디서? 무슨 돈이 나서?
엘리자베스는 결혼 생활을 6개월이나 하면서도 케이의 마르지 않는 돈에 의문을 가진 적이 많았다. 면직공장을 하나 물려받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케이가 갑자기 로버트 하커에 버금가는 저택을 지어 자신에게 주고 그 저택에 귀족들의 정원과 똑같은 정원을 만들어 매달 수많은 고정비를 지출해가며 유지했던 것은 의문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그저 케이가 시부에게 손을 벌렸을 거라고 여겼다. 그랬기에 근거리에 살던 시부네 저택에 갈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또 불편했다. 그래서 경 호칭이 귀족원에서 승인이 미뤄지는 것, 사교계에서 하커 사를 중요한 모임에는 초대하지 않는 것 따위를 놓고 엘리자베스를 쉼 없이 괴롭혀대도 고분고분하게 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케이 하커가 시부에게 받은 돈으로 레지스탕스를 지원한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고 나오시죠.”
엘리자베스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점원이 엘리자베스에게 드레스를 자꾸만 권했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이 탈의실에 들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점원은 잠시 다른 드레스도 골라오겠다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케이는 응접용 의자에 앉아 엘리자베스를 기다렸다. 그는 초조하게 구두를 바닥에 통통 쳐대다가 턱을 긁는 둥 산만하게 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클레몬트 공작은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굴었지?”
“……그런 식?”
장막 속의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더 초조한 듯 다리를 떨며 물었다.
“그래. 그런 식.”
“그런 식이 뭐야?”
“널…….”
케이는 말을 하려다가 짜증이 치밀어 한숨을 내쉬었다.
“날 때리고 가두는 거 말이야?”
“……그래.”
“몰라.”
“뭘 몰라.”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자꾸 말을 돌리는 것에 짜증이 나서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일까? 그녀 역시 클레몬트 공작처럼 품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귀족이라서일까? 맞아도 참고 침묵하는 게 품위를 지키는 방법이란 말인가?
“모른다고.”
그 순간, 커튼이 걷어졌다.
걷어진 커튼 안에서 엘리자베스는 남색의 물결치는 드레스를 입고 머리만 정돈한 채로, 거무튀튀해진 한 쪽 뺨을 드러내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망가졌음에도 전혀 망가지지 않았고, 상처투성이였음에도 아름다웠다.
케이는 몸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짓을 당해왔던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인지하지 못할 때부터 이런 짓은 늘 있었으니까. 그게 폭력이라는 걸 알아차린 게 오늘이라 나도 차근차근 생각해보고 있어. 하지만 생각해볼수록 답은 하나야. 계속. 내내. 쭉.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나한테 이래 왔다는 거.”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거울 앞에 섰다.
엘리자베스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았다. 엉망진창이 된 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멋진 드레스를 보던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로 시선을 옮겨 말했다.
“이건 나한테 과분해. 이제 나한테 돈 쓸 거 없어. 우리 아버지가 오늘 있던 일로 너한테 파혼을 들먹이면서 과한 요구를 할 거고, 그땐 파혼이든 뭐든 네 맘대로 하면서 나한테 쓸 돈으로 자유롭게 사는 게 나을 거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짜증스럽게 드레스에 달린 리본을 다시 풀려고 하자 케이가 그걸 막아서며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뚝뚝하게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거대한 리본을 다시 묶고 말했다.
“뭐가 과분하다는 거지. 공녀님은 이런 드레스가 옷장에 가득할 거면서.”
그렇지 않다.
그건 명백한 오해였다.
세수가 줄자 장원을 야금야금 팔아치우며 사치를 일삼다 장원을 몽땅 잃고 수도로 온 클레몬트 가문에게 남은 건 이제 허울만 멀쩡한 타운하우스뿐이고 그마저도 반은 은행의 것, 또 반은 사채업자의 것이었다.
케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결혼한 이후의 일이었다. 케이는 그걸 알게 되자마자 아버지를 설득해 클레몬트 공작의 빚을 반 이상 갚아주었고, 제철 공장 역시 공작가문 앞으로 돌려주었다. 그게 얼마나 하커 가문 앞에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는지, 엘리자베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케이는 공작가의 빚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래를 마쳐 시원하다는 듯이 집에 더 들어오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우리는 보통 부부들과 달라, 라는 케이의 말 뒤에 우리의 결혼이 거래였으니까, 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그녀의 결혼이 공작가의 빚을 탕감해주었으니까. 그녀의 결혼이 하커 가문을 이용했으니까.
그건 곧 그녀가 케이를 이용한 것이니까.
파혼을 하든 안 하든, 이번에는 그런 열등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이번엔 진실을 미리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말하기도 전에 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망치게 해주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엘리자베스는 당황했다. 급한 마음에 뱉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랬지…….”
하지만 막상 케이의 말을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파혼?
엘리자베스가 당황하는 사이 케이가 리본을 다 묶고 무덤덤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집에 가지 마. 오늘 밤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