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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화 (1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화

다음 날 아침, 마차 하나가 클레몬트 타운하우스 앞으로 도착했다. 사용인 하나가 마차에 박힌 인장을 보고 정문 문을 열어주었다.

젠트리라고 비웃음을 사더라도 가문 인장을 만들어놓은 것은 잘한 일이다, 라고 케이 하커는 생각했다. 뒤에선 비웃을지언정 하커 사의 인장을 보면 앞에서만큼은 모두들 존중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나.

클레몬트 타운하우스의 집사가 케이가 타고 있는 마차 문을 열었다.

“웬일이신지요? 오늘 방문 일정을 듣지 못했습니다. 공작 부부께서는 댁에 계시지 않습니다.”

“흠.”

케이는 그 말에 집사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공작 부부를 뵙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을 뵈러 왔네.”

케이는 짐짓 귀족처럼 집사에게 정중하게 요구하며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점잖은 체를 하는 것도, 제 약혼녀를 보러 이 아침부터 타운하우스에 방문하는 것도, 케이에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그냥 방문이 아니었다.

“가, 같이…… 피크닉이라도 갈까 해서.”

케이는 더듬거리며 말하며 제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 집사가 뒤에서 흉을 볼 거라고 여겼다.

‘젠장할.’

안 그래도 케이가 귀족 사교모임에서 테이블 매너를 실수할 때마다 그 동그랗고 커다란 인형 같은 눈으로 자신을 감시하는 엘리자베스가 이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비웃을지 몰랐다. 게다가 데이트 신청이라니.

‘열흘을 줄게, 케이 하커. 네가 날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시간 말이야. 넌 앞으로 매일매일 나와 저녁에 데이트를 할 거고, 우린 지금 같은 키스를 매일매일 나눌 거야.’

이건 마치 엘리자베스의 미친 제안에 동의하는 꼴이 아닌가.

게다가 클레몬트 공작은 약혼을 한 후에도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붙어 다니는 것을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공장에 자주 드나들자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귀족 사교 모임에서는 결코 함께 다닐 수 없게 케이를 불러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해해주게. 물론 엘리자베스가 자네를 무척 아끼는 것은 알지만, 그건 어린 아이가 장난감을 탐내는 것과 같은 마음이야. 하지만 자네와 자네 가문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순수한 마음과는 다른 마음이 섞여 있겠지. 어차피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내 딸은 자네의 것이야. 걱정할 게 무엇 있나. 그 전까지만 조금 체면치레를 해달라는 걸세. 자네에게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귀족들에게는 결혼 전까지 단둘이 대화 한 번 해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걸세.’

1년 전쯤 케이를 불러다가 했던 클레몬트의 말은 상당히 격식을 차린 협박이었다.

내 딸은 너 하기에 따라 결혼식 전까지 언제나 거둬갈 수 있는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케이는 클레몬트가 묘하게 자신의 신분을 깎아내리는 것보다도 공작이 자신의 딸을 당연하게 물건 취급하는 게 불쾌했다. 그 화법은 늘 제 공장 노동자들을 부품 취급하는 아버지 로버트 하커와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장 노동자들은 제가 보기에 아버지보다는 몇 백배는 더 인간적인 이들이었고, 엘리자베스 역시 인형처럼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그 안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생각의 강이 흐르는 여자였다. 특히 어젯밤, 학질이라는 말에 모두가 미리엄을 두고 도망갈 때 그를 혼자 받쳐 들고 떨어지지 않던 엘리자베스를 보며 케이는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저 여린 인간의 어디에서 저런 용기와 침착성이 나왔단 말인가. 그 침착성을 왜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발휘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신을 참아오고 있었던 건가.

케이 하커는 괜히 목이 타 자꾸만 헛기침을 해댔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희 아가씨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으셔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컨디션? 어디가 아픈가?”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어제 미리엄을 돌보다가 몸이 아프게 된 건가? 케이는 집사를 밀치고라도 집에 들어갈 것 같은 기세로 집사의 코앞에 서서 말했다.

“병문안이라도 하고 싶다고 해. 아님 내가 당장 의료원에 데려가도 좋아.”

“……클레몬트에는 가문 전용 의사가 있습니다.”

“그럼 병문안은?”

그 말에 집사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해보였다. 평소의 케이였다면 이 정도 반응에 금방 돌아섰을 테지만 케이는 굽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집사는 더 이상 제 선에서 거절하긴 무리라고 여긴 듯 엘리자베스에게 물어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가 사라지고 케이는 혼자 남아 거대한 타운하우스의 정원 앞에서 괜히 서성거렸다.

국왕의 사촌이라는 클레몬트의 정원은 역시 품위가 있었다. 분수, 연못, 관목과 키가 큰 나무들이 잘 정돈되어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나열되어 있었다. 로버트 하커가 만든 로킨트 저택은 온갖 황금 조각상과 비싸 보이는 나무들로 치장되어 화려했지만 이런 질서와 조화, 그리고 품위가 부재했다. 마치 아무리 비싼 신사복을 입어도 그 안의 평민의 피를 숨길 수가 없는 자신처럼.

케이 하커는 초조해하다가, 자신의 초조함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없어 분노하기 시작했다.

집사가 사라진 지 조금 시간이 지나자 케이 하커는 슬그머니 저택의 정원을 가로질러 문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릴 생각으로 황동 문고리를 잡아당겼을 때였다. 그가 잡아당긴 문고리를 따라 문이 스르르 열렸다.

“……?”

문이 안 잠겼었나.

“왜 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미치? 말 돌리지 마요. 밖에 있는 사람은 내 약혼자라구요! 난 이 집의 물건이 아니에요. 미치가 돌봐야 하는 아버지의 도자기 같은 게 아니라구요!”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문장을 내뱉고 있었다. 케이는 귀족들의 예의 같은 건 따질 새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얇은 슈미즈차림의 여자가 케이의 품으로 부딪혀 왔다. 케이가 본능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그러쥐었을 때,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클레몬트 양.”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를 아드득 갈아 물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엘리자베스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뺨 아래에는 검게 물든 멍 자국이 선명했다. 달리느라 엉망이 된 그녀의 슈미즈는 앞섶이 거의 풀어헤쳐져 있었는데, 거기엔 분명 마부들이 쓰는 채찍 자국이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눈이 뒤집어진 케이가 구둣발 그대로 타운하우스에 침입하려는 순간 엘리자베스가 그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도망가자. 내 탈출을 도우면 너에게 뭐든…… 뭐든 줄게,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터진 입술로,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입술의 상처는 방금 난 것으로 보였다.

설마 사용인들이 그녀의 입술에 상처를 내진 않았을 거고 그녀가 스스로 깨물어낸 상처일 것이다.

케이는 분노로 거칠어진 숨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누가, 누가 이랬지.”

엘리자베스는 붉은 눈동자로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상상하는 그 사람.”

그 말에 케이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웃고 있었지만 결코 웃는 게 아닌 얼굴이었다.

케이가 말했다.

“이대로 갈 순 없지.”

케이가 현관에 있는 케인을 들었다.

그러자 현관으로 타운하우스의 사용인과 집사가 걸어왔다. 그들은 케이가 몇 번 보았던 대로 귀족들의 사용인다운 품위와 오만함으로 무표정을 일관했으나 낭패다, 라는 감정이 슬며시 비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집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얼굴로 케이에게 말했다.

“하커 씨. 죄송하지만 타운하우스에 오늘은 다른 손님을 들일 수 없다는 주인님의 말씀이…….”

“저 도자기, 저번에 방문했을 때 클레몬트 공작께서 소중한 물건이라 하신 게 생각나는군. 상당히 고가로 대서양 너머에서 가져왔다고 말이야.”

케이의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집사가 어리둥절해 있을 때, 케이는 거침없이 그를 밀치고 자신이 가리킨 벽난로 위의 도자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아니, 아니야.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건 그쪽이 아니라 계단 위에 있는 도자기라고, 이 바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그제야 그 의미를 알아들은 집사와 사용인이 몸을 던졌지만 역부족이었다. 케이는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집사와 사용인의 움직임을 흘려내고 그대로 층계참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시큰한 몸을 감싸쥐고 신발장에 기댄 채로 케이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미친놈…….”

엘리자베스는 안절부절 못 하는 하녀와 집사를 보며 붉어진 눈으로 씨익 웃었다. 케이가 그대로 케인을 들고 올라가 클레몬트 공작의 도자기를 산산조각내기 위해 케인을 치켜드는 순간 집사가 경악한 눈으로 소리쳤다.

“하커 씨! 당장 가택침입으로 경찰을 부르겠어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요! 주인님께서도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래? 공작께서 아끼시는 거라니 더 탐이 나는군!”

케이는 케인을 바닥에 쾅 소리 나게 쳤다. 요란스러운 소리와 케이의 거친 움직임에 집사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달려갔다.

엘리자베스는 공작의 권위를 등에 업고 자신을 감금하려 들던 이가 보이는 약한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 치가 갖고 있던 권력의 파편이란 게 얼마나 얕은가. 엘리자베스 역시 공작의 딸이라는 이유로 클레몬트의 권력을 나눠가진 듯이 여겼지만, 그건 전생에서 보았듯 손쉽게 산산조각날 수 있는 것이었다.

케이는 답답한 보타이를 끌러 함께 던지고 신사복답게 격식을 차려 입은 베스트의 단추는 뜯어버렸다. 그러곤 케인을 집사 앞에서 치켜들었다.

“안 돼!”

집사가 소리치며 그에게로 달려들자 케이가 케인을 내던지며 그대로 달려드는 집사의 멱살을 틀어쥐고 그를 벽으로 쾅 소리가 나게 몰아붙였다.

“크흑……!”

집사의 셔츠깃을 틀어쥐자 집사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정말 후회하실 텐데요……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가만히 있지 않을…….”

그걸 보며 케이는 비릿하게 웃었다.

“후회? 내가 도자기를 깨면 나야 이깟 도자기 값쯤 물어주면 그만이지만 넌 아닐걸. 넌 날 막지 못한 죄로 네가 그리 충실하게 따르는 주인한테 반쯤 곤죽이 되겠지. 클레몬트 공작에게 목숨을 빌어야 할 거야. 하일 강에서 떠다니다 악어 밥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니 후회라는 말은 내가 아니라 너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그 말에 집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케이가 콧방귀를 뀌며 집사를 내던지듯 그의 멱살을 놓았다. 벽에 부딪힌 집사가 쿨럭거렸다. 케이는 그 모습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집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하나 더. 너는 내가 도자기를 깨면 경찰을 부르겠지만, 나는 네가 내 약혼녀를 감금하면 경찰을 부르지 않아. 다른 방법을 쓰지. 하커 사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을 듣지 못했나? 미스터 미치?”

이제 집사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케이는 곧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집사의 표정을 보며 하커 가문이 힘깨나 쓰는 조직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소문을 처음으로 감사히 여겼다.

케이는 집사가 당하는 것을 보곤 제게 덤벼들 생각도 하지 못하는 하녀를 노려보며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곤 슈미즈 차림의 제 약혼녀에게 자신의 재킷을 벗어서 입히고 문을 뻥 차서 열어버렸다.

그러고는 제 약혼녀와 함께 정원을 걸었다.

신사복이 엉망이 된 케이와 엉망이지 않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엘리자베스는 일직선으로 마차로 향했다. 그러자 곧 뒤에서 정신을 차린 집사가 외쳤다.

“아가씨를 잡아!”

집사의 외침에 케이의 말을 보고 있던 마구간지기가 얼떨떨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한 눈에 봐도 전투를 치르고 온 듯한 이 집의 방문객과 잠옷차림의 공녀는 마구간지기를 당혹스럽게 하기 알맞았다.

“아, 아가씨. 이, 일단 옷을 갈아입으시고…….”

마구간지기가 그녀의 슈미즈 차림에 눈 둘 곳을 몰라 하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재킷을 케이에게 돌려주었다.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그녀는 마구간지기에게 손가락 한 개를 들어 그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핏발이 선 눈으로.

그건 리오든 식으로, ‘나는 한 손가락만으로도 널 죽일 수 있다’라는 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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