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2화
케이가 먼저 펍으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엘리자베스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자 펍 입구에 도착한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마차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우리 공녀님은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야지. 미리엄은 아마 또 주변에서 부추기는 대로 퍼마시다 쓰러진 걸 거야. 술 취한 남자의 난동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상관없어.”
“……너…….”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펍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봤던 미리엄의 상태가 영 마음에 걸렸다. 황달, 구역, 오한, 발한. 두통. 자신은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지만 유증상자를 내버려두고 도망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구경꾼들이 미리엄을 둘러싼 원을 뚫고 들어갔다. 미리엄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펍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앰버가 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옆에 앉아서 미리엄의 머리를 짚었다. 아까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갑작스러운 고열.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단서를 발견하고 머릿속으로 저도 모르게 엘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이 발열기라면— 열이 순간적으로 40도 이상 오르면 뇌나 심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열을 내려야 해요. 옷을 벗기고 찬 수건으로 몸을 씻겨요.”
그러나 그녀의 말에도 주인장과 몇몇 구경꾼이 멍하니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럴 땐 움직일 사람을 지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앰버에게 주며 적셔올 것을, 주인장에게는 얼음을 줄 것을, 다른 구경꾼들에게는 옷을 벗길 것을 요구했다.
“뭐하는 거야.”
다들 어버버하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뒤에서 케이가 나타났다.
케이는 싸늘한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잖아. 이봐, 조엘. 네가 책임지고 내일 미리엄을 데리고 공공의료원에 가. 지금은 미리엄을 데리고 집에 가고.”
케이가 미리엄의 옷을 벗기려는 조엘이라는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리엄은 학질이야.”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이들이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조엘이라는 남자도 우물쭈물하다가 후다닥 미리엄에게 손을 뗐다. 얼음을 가져다주던 주인장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학질이라고?”
“나 먼저 집에 가겠네!”
모두들 웅성거리는 것을 본 케이가 미리엄의 이마에 손을 대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미리엄은 학질이 아니고 단순 감기야. 식중독일 수도 있고.”
“식중독이나 감기는 이렇게 갑자기 열이 오르거나 황달을 동반하지 않아. 내일 모레쯤엔 분명 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지금은 학질, 즉 말라리아 원충이 미리엄의 적혈구를 파먹고 있는 것이다. 48시간 정도가 흐르면 원충은 다시 미리엄의 몸 속 어디론가 숨어들어 미리엄은 또 멀쩡해질 것이다. 그러나 원충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나와 활동할 것이고, 그때는 복막염 증상이 추가될 수도 있었다. 아니, 당장 지금이라도 복막염으로 이어진다면— 아까 언뜻 미리엄이 감기를 꽤 오래 앓았다는 얘기를 들은 걸로 봐선 예후가 좋지 않았다.
앰버가 곧 찬물에 적셔온 손수건을 내밀자 엘리자베스가 그것으로 얼른 미리엄의 뜨거운 이마를 식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주인장이 호통을 치기 전에는 말이다.
“미안하지만 이 녀석을 내 가게에서 당장 내보내줘야겠어.”
주인장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내보낼 순 없어요. 근육통이 심해서 걷기도 힘들 거고, 무엇보다 열을 좀 식히고…….”
그때 주인장이 얼음이 담긴 통을 소리가 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위압적인 행동에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을 했다.
“당장 나가!”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상황 파악을 했다. 퀴닌이 나오기 전까지 학질은 마마만큼이나 무서운 질병이었다. 전염병인데다 치사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 학질은 생각만큼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아니다. 특히나 치사율이 높은 열대성 학질은 일반 학질보다 전염성이 약한—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려고 할 때, 케이가 옆에서 그녀를 막았다.
“학질은 무슨. 미리엄이 많이 취했나보군.”
“하지만—”
“앰버. 내 마차로 옮기는 걸 도와주겠나?”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앰버를 보고 말했다.
“마차로 옮기는 건 내가 도울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얼른 뒤에서 말했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앰버가 나란히 미리엄을 옮기는 것을 보며 그저 남겨진 채 뒤를 쫓아야만 했다.
* * *
케이는 앰버의 도움을 받아 미리엄을 마차에 싣고 로킨트 뒷골목 슬럼가에 그를 내려주었다. 그의 어린 아내가 미리엄의 상태를 보곤 놀라서 울먹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이 학질이고 의료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케이는 번번이 엘리자베스의 말을 막으며 그녀를 다시 마차에 태웠다.
“왜 말을 못하게 하는 거야. 미리엄은 학질이고 치료를 받지 못하면 길어봤자 한 달 안에 죽어.”
그것도 운이 좋을 때의 얘기다.
둘만 남은 마차 안에서 엘리자베스의 성난 표정에 케이는 콧방귀만 뀌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런 사실을 동네 아이들이 다 듣는데서 이야기할 순 없어.”
“그럼 대체—”
“넌 의사가 아니야. 간호사도 아니고!”
순간 케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고귀하신 공녀님이 심심풀이로 의학 서적 몇 권 들춰봤을지도 모르지만 넌 학질환자와 감기환자를 직접 본 적도 없겠지! 하지만 난 봤어! 난 가장 친한 친구 둘을 이 로킨트에서 학질로 떠나보내 봤다고! 그들이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어? 대답해봐. 아냐고!”
케이의 거대한 덩치는 마차가 도개교를 지나 클레몬트 공작 부부의 타운하우스에 가는 내내 덜컹거림에도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몰라.”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을 그저 고귀하신 공녀님으로 여긴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참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조소하며 말했다.
“학질 때문이 아니라 배를 곯다가 죽었어. 아무도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사람이 굶어서 죽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아나? 3주야. 무려 3주 동안 고통스러워하다 죽어야 하는 거야. 그게 한 달 동안 잘 먹으면서 감기인지 학질인지도 모를 병과 싸우는 것보다 훨씬 괴롭겠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눈 밑이 빨개진 채로 마차 밖을 보았다.
케이가 중얼거렸다.
“게다가 미리엄은 학질이 아닐 거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뜻이지. 내일 조엘과 같이 공공의료원에도 가볼 거고.”
공공의료원?
엘리자베스는 전생에서 공공의료원을 몇 번이나 겪어봤다. 환자들을 ‘못 배운 인간’ 취급하면서 정량화된 방식으로 대충 처방전을 써 갈기는 자들. 그런 자들이 제대로 진단을 할 수 있는가는 다음 문제로 치더라도 그들이 없는 약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학질. 말라리아의 치료제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퀴닌.
토닉워터의 원료 말이다. 그리고 그건 아직 화학적으로 만들어지지도 못했다.
물론 원료의 형태로 존재하긴 하지만 그건 교회가 종교의 이름으로 수급을 조절하고 있어 돈도 돈이지만 왕실의 인맥이 아니면 얻기가 어려웠다.
왕실의 인맥. 엘리자베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클레몬트 공작을 떠올렸다.
마차 창문 밖으로는 도개교 너머의 노스 리오든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에 대해, 쉐필드에서의 불쾌한 기억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건 정말 자신이 극적으로 조작한 기억이었을까. 아버지는 자신을 정말로 사랑했을까?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를 떠올리자 축축해지는 손바닥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 * *
엘리자베스가 터덜거리며 집사를 따라 들어가기가 무섭게 비비안 클레몬트가 엘리자베스의 눈앞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너 미쳤어? 대체 몇 시간 만에 오는 거야? 그것도 로킨트에 갔다가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얼굴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그리웠나? 엘리자베스는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눈과 입매를 살피며 제 감정을 점검했다. 여차하면 부모를 두고 도망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제 마음에 피어나는 그리움을 느끼며 그게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는 걸 알았다.
“네가 열흘 후에 하커인지 뭔지 하는 평민 놈팽이와 결혼한다 해도 넌 엄연히 왕실의 후손 클레몬트로 살아갈 거다, 엘리자베스. 아버지가 법원에도 압력을 넣어서 네 처녀 시절 성을 그대로 유지하게 한다고 했어. 가능하면 네 아들의 이름에는 하커 이름도 적지 못하게 할 거고! 그러니 제발 공녀의 품위를 지켜라. 우리가 지금은 비록 자본가들의 돈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지만 폐하께서 곧 우리 클레몬트를 돌봐주실 거다.”
비비안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드레스 자락이 구겨진 것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대체 어딜 돌아다니다 온 거야. 로킨트에 가면 하커 저택에만 잠깐 들렀다가 오기로 했잖니! 거긴 범죄자들 소굴이라고.”
엘리자베스는 비비안의 잔소리에 감성적이 됐던 마음의 한구석이 다시 딱딱해지는 것을 느꼈다.
“로킨트는 그냥 평범한 공장구역이에요. 공장이라면 북부에도 있잖아요. 쉐필드에서도 드물지만 있었구요.”
그때였다. 계단 위에서 엄한 목소리가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하지만 그런 곳은 국왕 폐하나 영주 같은 이들이 철저하게 감독하는 곳이지. 로버트 하커 같은 장사치가 분탕질을 치는 곳이 아니라.”
엘리자베스는 계단 위에 서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컬린 클레몬트, 아버지를 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 게냐?”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를 보자 산소가 부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너는 가문의 수치다!’
아버지와 관련된 나쁜 기억만, 격했던 훈육 과정만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죄송해요. 마차에 살짝 문제가 생겨서…….”
“문제가 생겼다 해도 들어와야 할 시간이 벌써 지났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이 늦은 시간에 로킨트에서 돌아오는 너를 보면 주변 귀족들이 나를 어찌 생각할 것 같으냐?”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층계참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기를 느끼며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녀의 뺨을 그러쥐었다.
“내가 회초리를 아껴 딸을 잘못 키운 아비라고 생각할 게야. 자식이 나의 위신을 다 떨어뜨려놓는 구나. 하지만 어릴 때처럼 너를 묶어놓고 때릴 수야 없지 않느냐?”
아버지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움찔했다. 그녀의 뺨에 와 닿는 아버지의 손길은 애정일까, 아니면 협박일까.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는 늘 딸이라도 잘 키우면 좋은 후계자가 될 거라고 했다. 그녀가 결혼 후에도 가문의 이름을 유지하게 만든 게 하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였다.
그녀는 늘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아버지의 수치였다. 그녀는 그 두 개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의 자랑이니 수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항해 책을 읽느라 가정교사가 지시한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면 그녀는 벽장에 갇히기도 했고 발가벗겨진 채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그게 평민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엘 선생을 따라다니며 알게 되었지만 모든 관계를 일차원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감금되거나 맞고 난 다음 날엔 꼭 맛있는 걸 먹이고 직접 피부에 약을 발라주었다. 이건 모두 아버지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 자신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지금 이렇게 아버지의 위신을 생각하는 것도 전부 가문과 가문의 후계자가 될 자신을 위한 것이리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이건 사랑이야.
나는 아버지의 자랑이야.
그러니…… 참아야 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가문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아버지는 이 사실을 이해하셔야 한다. 지금 아픈 평민이 있고, 그가 클레몬트 공작과 이 나라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도우셔야 한다. 그게 왕족, 귀족에게 남은 품위와 의무다.
가난한 왕족이 부유한 평민에게 빌붙어 사는 시대. 이 시대 속에서 왕족이 그들의 품위와 의무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왕족은 어떻게 되는가.
‘그의 딸도 하커 사의 재산으로 엄청난 사치를 누렸다던데, 그런 주제에 사회주의는 무슨!’
‘공작? 웃기고 있군. 언제 적 귀족이야!’
허울뿐인 신분이 군중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방패인지 엘리자베스는 처참히 깨닫지 않았나.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아, 아픈 사람이 있었어요, 아버지. 학질에 걸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도와주시면 하, 하커 사에서 무척 고마워할 거예요. 케이의 친한 친구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버지의 선의에 감동해 클레몬트를 우러러 볼 거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묘해졌다.
“학질? 누가 학질에 걸렸지? 하커의 비즈니스 파트너인가? 아니면 리오든 남부 귀족?”
“아뇨. 로킨트의 노동자요.”
“네가 누굴 만났다고?”
“로킨트…….”
엘리자베스가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뺨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난간을 쥐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손이 단숨에 미끄러졌다.
엘리자베스가 푸른 눈으로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말해봐라. 네가 누굴 만났다고?”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제 몸에 새겨진 폭력의 기억을 그 어떤 조작도 없이 끌어올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