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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1화 (1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화

엘리자베스는 제 시선에서 사라지는 케이를 보며 플로어를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미리엄이 어디선가 나타나 잽싸게 그녀의 파트너 자리를 채어갔다.

앰버는 순순히 엘리자베스의 손을 그에게 내주었고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을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뜨겁고 건조했다.

“케이가 어디로 간 거죠?”

엘리자베스가 묻자 미리엄이 뒤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둬. 원래 성격이 개차반이잖아. 분명 아가씨가 이 펍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게 질투 나서 저러는 걸 거야.”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옆에서 춤을 추는 앰버를 보았다. 이 펍 남자들의 시선은 내 쪽이 아니라 저 쪽에 고정된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여자인 제 가슴마저 흔들리게 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케이가 바라보다가 나간 것은 앰버 쪽일까? 아니면 제 쪽일까?

이제 엘리자베스는 왜 앰버가 전생에서 그토록 케이와 자주 접촉했는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지였던 것이다. 서로의 신념을 나누며 같은 미래를 꿈꾸는 동지.

그것은 그 둘이 진정한 친구라는 뜻도 되지만 마음을 깨닫지 못한 잠정적 연인관계였다는 뜻도 된다.

엘리자베스는 적어도 두 사람이 자신 몰래 육체적 관계를 맺는 사이가 아니었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본 앰버는 그 정도로 신의가 없는 여자가 아니었고, 앰버가 그런 여자였다면 케이가 그녀와 큰일을 도모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케이가 앰버에게 빠져들고 또 그녀를 켈토에 데려가고 싶어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앰버는 혁명가이고, 로킨트의 스타이며, 하층민의 대변자니까.

마치 케이처럼.

엘리자베스가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미리엄이 갑자기 기침을 거세게 하더니 뒤로 살짝 물러났다.

“미리엄?”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미리엄이 기침을 쉼 없이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또 감기인가? ……아가씨, 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고 무대를 내려왔다. 미리엄의 손은 뜨거웠고 눈은 이상할 정도로 노랬다.

“미리엄, 속이 울렁거리나요?”

“그건 아무래도 진을 많이 마신 탓이겠지. 어지럽고 추워. 머리도 아프고 땀도 살살 나는 것 같은 게, 내일 공장 나가기 전에 탈이 나겠는 걸. 감기에 한 번 지독하게 걸린 뒤로 2-3일에 한 번씩은 꼭 끔찍하게 아프다니까.”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의 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황달, 구역, 오한, 발한. 두통.

엘리자베스는 이럴 땐 보통 엘을 불렀다. 엘이 미리엄을 진찰했다면 어떤 병명을 진단했을까. 몇 가지 병명이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중에서도 미리엄의 손에서 느껴지던 건조하고 뜨거운 피부의 감촉을 떠올리면—

아니.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엘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조차 아니다. 그녀가 섣불리 진단을 내리는 건 엄연히 월권이었다.

“미리엄. 당분간은 일을 좀 쉬는 건 어때요? 이런 상태로 일을 나가면 몸이 낫질 않을 거예요. 내일 일을 쉰다면 내가 왕진 의원을 불러줄게요.”

“무슨 소릴. 그럼 나는 당장 내일부터 굶어야 하는데. 게다가 로킨트 공장에서 일하는 건 다른 데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거야! 이 놈들이 안식일이라고 일을 일찍 마치고 펍에 와서 노는 거 좀 봐!”

미리엄이 벌컥 화를 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모두 하커 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하루에 14시간씩 일하고 얼굴엔 유제를 묻히고 사는 리오든의 하층민들. 하커 사가 아무리 최고급 대우를 제공하는 리오든의 공장이라고 해도 하커 사도 결국 다른 공장들처럼 노동자를 기계 부품쯤으로 여긴다. 그런 사측에 대고 노동자가 아프니 빠지겠다고 말한다면 하커 사는 일말의 책임감도 없이 그를 다른 부품으로 교체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질색하며 바 자리로 돌아가는 미리엄을 말리려다가 눈으로 케이를 찾았다. 케이는 어디에 있지?

엘리자베스는 다급해지는 마음으로 로킨트 거리에 나섰다. 그러나 막상 안개가 자욱한 로킨트 거리에 나서자 로킨트의 모든 하층민들이 자신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 자신에게 환호성을 내지르던 이들과는 또 다른 이들이었다.

일을 하고 시원하게 회포를 푸는 노동자들과는 달리 일할 기력도 없어 보이는 이들. 뒷골목에 쌓여 있는 썩은 과일을 집어먹고 길바닥을 제 집처럼 여기는 이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욕망과 불쾌함, 그리고 경멸의 시선이 제 피부에 와닿는 것을 느끼며 얌전히 마차로 돌아가버릴까 고민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조금 더 걸었다.

그때였다.

“왜 춤은 더 안 추고?”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매달렸다. 그녀는 뒤를 돌았다. 그러자 펍 바로 건너편에 있는 여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케이 하커가 보였다.

사실 보였다기보단 느껴졌다.

저 정도 키에, 저 정도 덩치에 저런 바르지 못한 자세를 하고 서 있는 실루엣은 제 남편, 아니, 남편이었던 작자뿐이리라.

엘리자베스가 다가가자 케이 하커는 벽에 기댄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입으로는 기관차처럼 연기를 뿜으면서.

엘리자베스는 그가 자신에게 화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가 원하는 대로 상처받고 토라져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앰버와 자신을 비교하고 자신이 그의 약혼녀라는 사실에 좌절했기 때문에? 그도 아니면…… 설마…….

엘리자베스는 차분한 눈으로 그가 든 담배를 가리켰다.

“……나도 한 대 줘.”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곧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깔보듯 웃으며 순순히 담배 한 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허세가 우습다는 얼굴로 그녀에게 성냥으로 불을 붙여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맵고 독한 케이의 담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으며 케이가 등을 대고 있는 벽에 같이 등을 기댔다. 그러자 케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곧잘 피우네.”

“그래.”

“누구한테 배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들어 있는 날카로움을 느끼며 케이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케이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배웠다기보단 그냥 보고 따라한 거야. 몇 번.”

“누굴?”

누구냐고?

엘리자베스는 그의 질문이 얄궂게 느껴졌다. 그녀가 따라한 건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 케이 하커였으니까.

엘리자베스가 지난 1년간 내내 하층민들의 얼굴과 말투, 춤과 노래를 따라하며 그들 안에서 찾아온 것은 케이 하커의 얼굴, 말투, 춤, 노래였다. 그렇게라도 케이 하커를 이해하려고. 이해함으로써 케이 하커를 진정으로 미워하려고.

아니, 대체 뭘 하려고 했든. 그녀가 그 시절 내내 진정으로 모사해온 사람은 단 한 명, 제 눈앞에 있는 이 남자밖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시절이 얄미워져서 케이의 껄렁거리는 말투를, 그간 흉내내왔던 대로 훔쳐 말했다.

“넌 왜 내가 윌리엄 조쉬 같은 남자랑 놀아날까 봐 두려워하지?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야 넌 내 약혼녀니까. 내 약혼녀가 방탕하게 돌아다니는 건 내 명예를 깎아먹는 짓이야.”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소유물은 아니지만 우린 서로 소속되어 있어. 네가 그 빌어먹을 생일 파티에서 나와의 약혼을 소원으로 빈 그날부터 말이야.”

“넌 지금 내가 네 소유물인 것처럼 굴고 있어. 내가 너의 손 안에 들어간 물건이고 그래서 놓아주기 싫은 것처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약간 커지자 주변에 있던 노동자들이 전부 그들을 주시했다. 케이는 그것을 느끼며 엘리자베스를 숨기듯 벽 쪽으로 밀어붙이고 자신의 등으로 가렸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말투로, 그러나 분노가 스며든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웠고, 엘리자베스는 그의 몸에서 미리엄에게서 나던 것과 비슷하지만 종류가 약간 다른 열이 느껴지는 것을 알았다. 전생에서 그는 이런 상황에 언제나 화가 나 있었고, 화가 난 상태로 그녀를 안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착각했다. 그의 경멸은 사랑과 아주 가까운 것이라고. 다만 사랑이 되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다고.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고 그녀는 반드시 그의 마음을 알아야만 했다.

“그건 네가 날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난 물론 너와 키스하는 꿈을 꿔. 널 갖고 다시는 안 놔주는 꿈을 꾸지. 하지만 그건 사춘기 소년들이 몽정할 때 인생에서 만나본 가장 재수 없는 여자를 떠올리는 거랑 비슷한 거야.”

“인생에서 만나본 가장 재수 없는 여자를 보며 흥분할 수 있다면 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

엘리자베스가 생각하는 미래를 바꿀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대로 치료제를 구해 약혼을 파기하고 도망치는 것.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아버지의 누명에 대한 진상을 알 수 없으니 위험 요소가 남아 있었다.

또 하나는 치료제를 구하고 케이와 협조해 모든 운명을 뒤흔드는 것. 그건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역시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케이가 자신의 편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했으니까.

그의 배편이 자신의 것이었다는 전제를.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전제를.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다 그의 셔츠 깃을 구깃하게 잡았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왔다. 이즈음의 그녀는 케이에게 미쳐 있었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자신의 남편이 되어 자신의 것이 되면 그 무엇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케이 하커. 그게 내 계획이야.

엘리자베스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숨을 삼켰다.

언제나 그가 그랬듯이 성급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그의 살점을 탐하고 그의 마음이 아니라 육체에 매달렸다. 케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얄궂기만 했던 남자가 첫날밤에 했던 대로, 그의 입술을 훔쳤던 것이다. 목석같던 케이의 손을 잡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허리춤에 그의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가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내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탓에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눈을 올려다보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흘을 줄게, 케이 하커. 네가 날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시간 말이야. 넌 앞으로 매일매일 나와 저녁에 데이트를 할 거고, 우린 지금 같은 키스를 매일매일 나눌 거야.”

케이 하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아까에 비해 훨씬 원래대로, 건방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키스 정도론 알아볼 수 없을 걸.”

“그럼 키스 말고 다른 것도 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말문이 막혔다.

케이는 눈앞의 여자가 자신 위에 군림하기 위해 아주 신박한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여자는 자신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쥐덫이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고 나서도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엘리자베스는 수많은 감정이 가슴 속에서 우글거리는 것을 외면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파혼해줄게, 케이 하커.”

케이 하커의 눈이 험악하게 빛났다.

“우리 공녀님이 드디어 미쳤군…….”

그때 펍의 문이 벌컥 열렸다. 펍 주인장이 두 사람이 있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케이! 미리엄이 쓰러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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