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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0화 (1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화

엘리자베스는 펍에 들어오는 앰버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에 희디 흰 피부, 새빨간 입술과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 리오든의 저명한 가수는 자신의 기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왜일까.

자신이 이미 그녀의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생에서의 자신이 열등감에 빠져 그녀의 미모를 기억 속에서 최대한 격하하려고 했던 걸까.

엘리자베스가 앰버 플래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이, 케이가 앰버에게 말했다.

“총각딱지라니. 우리 숙녀께서 들으시면 기겁을 하실 법한 말이군.”

“세상에. 저분이 네 약혼녀란 말이야? 말도 안 돼!”

앰버는 경악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갔다.

“반가워요, 엘리자베스! 너무나 아름답군요! 산적처럼 생긴 누구랑은 절대 어울리지 않아요!”

앰버 플래스는 제 등장으로 시끌벅적해진 펍 안의 소음 탓에 거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앰버 플래스의 우악스러움에 엘리자베스는 약간 놀란 눈으로 앰버를 가만히 보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 오랜만이에요, 앰버.”

“오랜만이요? 우리가…… 전에도 본 적이 있나요?”

앰버가 묻자 옆에 있던 미리엄이 켈록거리며 대신 대답했다.

“큭, 아마 켄터베리 홀에 갔나보지?”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흠칫 하면서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아요. 앰버의 노래를 들으러…….”

그 말에 미리엄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거긴 결혼 안 한 여자 귀족들끼리 갈 만한 곳이 아닌데?”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교 모임에서 만난 분들과 같이 갔어요. 윌리엄 경이 리오든에 온지 4년이나 됐다면 켄터베리는 꼭 가봐야 한다고 하던데요.”

“윌리엄 조쉬?”

케이 하커가 콧방귀를 뀌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윌리엄 조쉬와 부부 침실에서 뒹굴어도 관계없다는 그 건방지고 무례한 말을 할 때와 똑같은 모습 말이다. 어깨 한쪽은 처지고 한쪽 눈은 찌푸리고 또 코 중간이 살짝 삐뚤어진 케이 하커는 늘 그랬듯 엘리자베스를 상처 줄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앰버 쪽이었다.

“너무 질투하지 마, 케이. 남자의 질투는 여자를 질리게 하는 법이야.”

앰버는 귀엽다는 듯이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 보았다.

“질투? 누가 질투를 해.”

케이가 지겹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엘리자베스가 자신 쪽으로 넘어온 케이의 커다란 어깨에 잡힌 재봉선을 꼬집으며 말했다.

“네가.”

엘리자베스의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는 선명하게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그제야 엘리자베스의 의중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 여자는 자신을 귀족들 앞에서 망신 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제 친구들 앞에서까지 짓밟고 싶은 것이다.

케이가 기억하는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자신을 굴복시키고 싶어 하는 여자였다.

처음 본 날, 로킨트에서는 그 누구도 입지 않는 과도하게 화려한 드레스와 구두, 보닛을 쓰고 나타나 시끄러운 소음과 동냥하는 거지들의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고—

‘뭐라고? 알아듣지 못했어. 다시 말해줄래?’

케이 하커의 노동자 말투를 듣고는 오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지껄일 때부터 말이다.

당시 케이의 나이가 열아홉.

몸만 커버렸던 소년은 수치심으로 인해 온몸에서 열이 났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엘리자베스를 볼 때면 매번 몸은 그 수치심을 기억하고 뜨거워졌다.

그런 케이의 상태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듯 엘리자베스는 그 뒤로도 언제나 그를 무시하려고 들었다. 틈만 나면 인형처럼 입고 공장을 누비는 케이 하커를 쫓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물어댔다.

‘넌 왜 공장에서 일을 해? 아버지가 로버트 하커잖아.’

‘말을 왜 이렇게 빨리 해. 못 알아듣겠잖아!’

‘넌 코가 참 특이하게 생겼다, 왜 코가 그렇게 삐뚤어졌어?’

여덟 살 생일에 공장 출근을 빼먹고 돌아다니다 잡혀서 아버지한테 코뼈가 부러질 때까지 맞다가 뼈를 맞출 새도 없이 다음 날 출근을 해서 그렇다고.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는데, 케이는 하지 못했다.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는 자신의 역사인데. 왜 이 여자는 자신의 인생을 모조리 뒤집어 까서 자신을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잠기게 만들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 자신을 굴복시키지 못하도록 자신을 창피주지 못하도록 그녀에게 더 많은 모욕과 치욕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기어코 자신에게 다가왔다. 굳이 로킨트 펍에 따라와서 인사불성이 되어 자신을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지금처럼 말이다. 심지어 오늘은 진을 잔뜩 마셨다가 밖에서 토하고 돌아오더니 미리엄과 앰버 플래스를 양 옆에 끼고 낄낄거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이것도 늘 그렇듯 엘리자베스가 생각해낸 기발한 방법의 군림일까? 케이는 이를 아드득 갈며 자신의 어깨를 꼬집는 엘리자베스의 작은 손을 덥석 쥐었다.

“작작하라고. 귀족 영애라면 마땅히 조신하게 굴어야 하는 거 아니야? 술 마시고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는 망아지처럼 구는 게 아니라?”

그 말에 펍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미리엄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고 앰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동안 내내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봤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에서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 할 때면 늘 남의 태도를 지적했고 공격을 일삼으면서 방어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사랑을 속삭이면 케이는 그건 거짓말이라고 그녀를 궁지에 몰고 그녀의 태도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게 케이가 자신을 혐오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케이의 천성이 남의 다정한 말을 견디지 못하는 쪽이라는 뜻일까?

대체 넌 왜 켈토로 가는 배편을 두 개나 끊어두었을까? 그 중 하나는 내 것이었을까? 아니면 위험한 비밀을 숨긴 이 아름다운 여자의 것이었을까?

곧 그녀는 벌떡 일어나 미리엄을 보고 말했다.

“춤추죠?”

“어, 저…… 그게…….”

미리엄은 케이의 분노한 눈동자를 보며 더듬거렸다. 그러자 앰버가 피식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나랑 춰요!”

앰버가 엘리자베스를 끌고 나갔다. 그러자 미리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불쾌한 얼굴로 주인장에게 진을 달라고 했다.

“오늘은 안 마신다며? 저 여자 에스코트해야 돼서 그러는 거 아니었어?”

주인장의 말에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표정은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제 손을 잡은 앰버의 뒷모습을 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자신이 케이의 총각파티에 와서 홀짝거렸을 제 주량에 맞지도 않는 진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망할 놈의 시간여행의 후유증인지, 또는 몰록이 옮긴 ‘바이러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엘의 말대로 자신은 과거에 돌아왔고 이제 미래를 바꿔야 했다. 치료제를 찾아 요상한 바이러스를 없애고, 또…….

할 일이 또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위태로운 눈으로 앰버를 보았다.

앰버는 귀족 신사처럼 그녀를 에스코트해 댄스 플로어 위에서 주정을 부리는 남자들을 가로질렀다.

“이봐, 조! 이 아름다운 숙녀를 위해 왈츠를 연주해줘!”

앰버가 뒤편에 있는 밴드를 향해 동전을 튕겨주었다. 그러자 조라 칭해진 연주자가 불쾌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훑었다.

“여긴 오페라 하우스가 아닌뎁쇼!”

일부러 마부들이 주인 나리를 모실 때 같은 말투를 가장해서 비꼬기까지 했다.

“왜 이래. 이 분은 무려 케이 하커의 약혼녀라고. 하커의 이름을 갖게 될 분이야!”

앰버의 말에 조가 콧방귀를 뀌었다. 엘리자베스는 밴드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속닥거리는 것을 보곤 앰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뇨. 괜찮아요. 저는…….”

엘리자베스는 지나간 과거에 늘 그랬듯이 소극적인 자세로 플로어를 내려오려다가 문득 자신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보고 있는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 플로어에서 내려가면 케이가 뭐라고 할지 알 것 같았다. 귀족 아가씨는 펍에 어울리지 않으니 다신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할 것이다. 예전에 케이를 따라 펍에 왔다가 처음 먹는 맥주가 속에 받지 않아 뛰쳐나갔을 때 그가 했던 말이다.

과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맥주가 속에 받지 않듯 그녀에게는 케이의 친구들이, 로킨트의 노동자들이, 그의 세계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엘리자베스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은 펍에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라 케이의 말에 지레 겁먹어 포기했던 것이다.

그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이었을까?

케이는 그녀에게 겁을 주고 겁을 먹은 그녀가 도망치면 케이는 그럴 줄 알았다며 더 멀리 달아나고 그렇게 지레 서로에게서 멀어진 걸까?

엘리자베스는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뒤를 돌아 밴드에게 소리쳤다.

“그럼 좀 빠른 포크를 부탁해요! 돈을 받았으니 열정적인 연주를 해줄 거라 기대할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놀란 눈을 했다.

앰버 역시 엘리자베스에 대해 어느 정도는 들은 바가 있었다. 철저히 귀족 사회에서 살아온 아리따운 아가씨. 그녀가 포크를 춘다고?

앰버는 엘리자베스가 창피라도 당할까봐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때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앰버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손을 내밀어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나와 거울처럼 정반대로 스텝을 밟으면 돼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골 펍에서 이런 춤을 자주 춰봤다. 그녀는 춤 솜씨가 있는 편은 아니지만 움직임이 단순한 포크 춤을 못 외울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그녀가 춤을 시작했고 주변에 있던 노동자들 모두가 낄낄거리며 그녀를 주시했다. 펍 플로어에 서 있는, 귀족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신기함과 경멸, 약간의 조롱을 담은 시선을 느끼며 꿋꿋하게 춤을 이어갔다. 곧 앰버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에, 대체 어디서 춤을 배웠어요?”

“배운 게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외쳤다.

배운 게 아니다. 그저 따라하다 보니 알게 된 거다. 펍에서 음악만 나오면 다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서민들을.

순식간에 두 여자의 주변에는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곧 그들과 발을 맞추어 춤을 추었다. 1년 동안 이런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았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의 사람이 될 수 없으리라 믿었던 사람들과 살을 맞부딪치며 말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지금 앰버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저 남자를 떠올렸다.

케이 하커.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사람이 되지 않았던 저 남자를.

* * *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와 앰버 주변으로 몰려드는 냄새나는 남자들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움직였던 것은 주인장이었다.

“이봐! 네 약혼녀 정말 물건이군! 아까 귀족이니 뭐니 했던 말은 취소야! 킥킥, 진정한 로킨트의 춤꾼이잖아! 저 여자가 너랑 결혼해준다는 건 확실한가!”

주인장은 그대로 앞치마를 내팽개치고 그대로 플로어로 걸어가 신나게 뚱뚱한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걸 본 미리엄 역시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플로어로 올라갔다.

케이는 혼자 바에 남겨져서 잔뜩 찡그린 눈으로 자신의 약혼녀를 올려다보았다.

춤추며 환하게 웃는 엘리자베스를 보는 순간 케이 하커는 함정에 걸린 쥐가 된 기분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를 처음 봤을 때 느껴지던 열기가 그를 사로잡았고 그는 사춘기 소년처럼 심장이,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고 펍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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