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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9화 (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9화

1장

리오든의 차가운 뒷골목에서 제 토사물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정신을 차린 엘리자베스는 토사물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를 맡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녕 이게 천국의 냄새란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진절머리를 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오수 웅덩이에 자리를 잡고 오줌을 누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으아악!”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술에 취한 게 분명해 보이는 남자 역시 놀란 듯 비틀거렸다. 그 탓에 제 오줌을 바지에 갈긴 남자는 불쾌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인정해야 했다. 여긴 천국이 아닐지도 몰랐다. 이교도도 아닌 자신이 왜 지옥에 온 걸까?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뒷걸음질 칠 때였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웬 귀족 아가씨가 로킨트 펍엘 다 왔대? 누구랑 왔수?”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버버 하는 사이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자신보다 머리가 훨씬 위에 있는 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그녀 대신 대답했다.

“이 여잔 약혼자랑 왔으니 신경 꺼, 미리엄.”

그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녀를 껴안은 남자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곧 그녀를 놔주곤 미리엄이라는 남자와 낄낄거리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세상에, 케이. 네가 약혼했다는 소식이 진짜였냐? 그것도 저런 귀족 아가씨랑? 놀랄 노자다, 이 자식아!”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제 앞에 선 남자의 이름을 듣고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지옥까지 자신을 쫓아온 걸까? 아니면 자신이 지옥까지 이 남자의 환영을 데리고 온 걸까?

엘리자베스는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 * *

케이는 펍에서 뛰쳐나간 엘리자베스를 쫓아온 참이었다.

케이가 총각파티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온 엘리자베스는 더러운 펍의 환경을 보곤 혼비백산해서는 나가버렸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조금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귀족 아가씨 비위를 맞추는 게 골치 아프다, 단순히 그런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네 약혼녀는 소개해주지 않는 거냐? 귀족 아가씨라 이 더러운 로킨트에 적응을 못 하시나?”

미리엄에게서 엘리자베스를 구해놓자 미리엄이 물었다. 미리엄의 비꼬는 말투에 엘리자베스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케이 하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직접 인사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하긴, 그녀의 주변에 있는 재수 없는 예비 자작, 백작 나리들은 전부 금으로 된 변기에 오줌을 누고 하인의 시중을 받을 텐데, 그녀의 눈에 자신의 친구들이 어때 보일까.

‘건방진 농노 놈들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려는 케이 하커 또한 그의 친구들과 비슷한 인간이었다.

‘건방진 자식.’

그러니 그녀가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케이는 제 품 안에 안긴 인형처럼 작고 귀여운 여자를 보며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냥 내버려둬. 어차피 내 약혼자께서는 귀족 사교 모임이 아니면 입 한 번 뻥끗하는 일이 없다고.”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평소처럼 불쾌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홱 돌아서 마차로 돌아가주길 기대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쌕쌕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케이의 소매 끝을 잡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닫았다했다.

자신이 한 말이 그토록 충격적이란 말인가? 귀족 아가씨는 정말 골치가 아프다.

케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우, 우리가…… 어…… 언제 결혼하기로 해, 했지?”

“뭐?”

“그, 그니까 말이야……. 우, 우리 결혼식이 어, 얼마나 남았느냐고…….”

이건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었다. 벌벌 떨면서 말까지 더듬다니.

오늘 케이의 총각파티에 반드시 와서 보고 싶다더니 케이와 결혼하면 한평생 살아야 할 로킨트 스트리트에 있는 펍의 꼬라지와 제 남편의 친구들이라는 작자들의 하찮음에 놀라 패닉 상태에 빠진 걸지도 몰랐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드디어 이 멍청한 결혼에서 벗어나기로 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렇다면 그건 잘 된 일이었다. 케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결혼식은 열흘 후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그건 곧 당신이 도망칠 수 있는 기일도 열흘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케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두세 걸음을 옮기더니, 놀랍게도 미리엄에게 말을 걸었다.

“미, 미안하지만 오, 오늘자 시, 신문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미리엄 씨?”

“미리엄 씨……?”

미리엄의 뺨이 시뻘게졌다. 그것은 진이 주는 취기 때문은 아니었고, 로킨트에서 찾아보기 힘든 잘 차려입은 아가씨가 그를 그저 이름도 아닌 씨라고 칭해서 불러주었기 때문이었다.

“아, 예, 예! 펍 주인장에게 부탁하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아가씨!”

케이는 미리엄이 엘리자베스에게 보이는 갑작스러운 호의를 눈치채고 황당해졌으나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두고 미리엄에게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곧 펍 안으로 사라졌다.

“고마워요, 미리엄 씨!”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미리엄이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드러내며 말했다.

“들었냐? 미리엄 씨래. 크큭, 게다가 나한테 인사도 했다니까? 귀족들이란 다들 평민만 보면 전염병에라도 걸릴 것처럼 구는데, 저 아가씬 좀 다르네! 하긴 그러니 너를 만났지!”

흥분한 미리엄 앞에서 케이는 그저 굳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것보다는 그냥 취한 것 같은데…….”

미리엄 씨?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 * *

엘리자베스는 온통 취한 남자들의 고함과 담배냄새로 가득한 펍 안에서 어렵지 않게 주인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건 엘리자베스가 엘을 따라다니는 1년 간 동네 펍에 몇 번 놀러가본 덕이었다. 그때마다 주인장이라는 작자들은 언제나 앞치마를 두르고 친한 동네 친구들과 잡담을 떨며 술 대신 담배를 말아 피우곤 했다.

“주인장!”

엘리자베스는 주인장으로 보이는 작자에게 소리쳤다. 그녀의 경험상 펍에서는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 법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주인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귀족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 탓일 것이었다.

그런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기엔 너무 상황이 다급했다. 지금 이곳이 제가 만든 지옥인지 아니면 제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사기꾼 엘 선생이 무슨 놀라운 술수를 써 보낸 과거인지 알아내야 했다.

무엇보다도 과거라면 날짜가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등허리는 여전히 욱신거렸고 눈은 화끈거렸다. 엘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증상은 3일 후면 가라앉고 그 이후론 조금씩 살이 빠지고 몸이 안에서부터 썩어가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리고 6개월 후면 그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오늘자 신문을 읽고 싶어요! 당장요! 그리고 토닉워터와 생선튀김도 주문하죠!”

그녀의 말에 테이블에 있던 남자들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주인장이 특히나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토닉워터?”

“네.”

“흥,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이런 싸구려 펍에서 그딴 거 구하지 마! 여긴 샴페인을 파는 오페라하우스가 아니라고.”

엘리자베스는 주인장의 반응에 미간을 찌푸렸다. 토닉워터가 뭔지 모른다고? 탄산수에 퀴닌을 탄 달달한 음료 토닉워터는 엘리자베스가 엘과 리오든이 아닌 남부 시골 마을에 가도 종종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음료였는데…….

그때 엘리자베스의 뇌리에 뭔가가 스쳐갔다.

‘바보 같긴! 지금이 1년 반 전이라면!’

토닉워터는 1년 전쯤에서야 폭발적으로 대중화된 음료였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주인장의 불쾌한 얼굴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 사람들은 정말 토닉워터가 뭔지 모르는 거다. 그 말은…… 여기가 진짜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띠링!

그때 뒤에서 종소리와 함께 케이 하커가 펍에 들어왔다. 케이는 어쩐지 화가 난 얼굴이었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미리엄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케이는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이느라고 얼이 다 빠진 엘리자베스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단숨에 안았다. 그러곤 엘리자베스 앞에서 불쾌한 얼굴로 행주를 탁탁 쳐내는 주인장에게 무서운 눈으로 물었다.

“내 피앙세한테 무례하게 군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주인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 아무리 천하의 케이 하커가 여자에 미쳤다지만 저딴 말을! 무례하게 군 건 네 여자 쪽이야! 내가 이 로킨트에서 너 같은 동네 양아치 놈들한테 술을 판지가 벌써 8년이고, 난 내 펍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귀족 아가씨가 쳐들어와서는 내 가게에서 토닉 뭐시긴지 그런 걸 내놓으라고 할 권리는 없어!”

“토닉……?”

케이는 주인장의 불호령에 미간을 찌푸리며 더듬거릴 때였다. 케이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엘리자베스가 주인장의 말에 벌컥 소리를 질렀다.

“토닉워터였구요, 내놓으라고 한 적은 없거든요! 그냥 주문하겠다고 한 거예요.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지 무례라고 할 것까지 있나요? 내가 무전취식을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신문이나 줘요! 생선튀김엔 맥주를 주고요!”

엘리자베스의 호령에 잠시 주인장이 있던 테이블과 바에 있던 남자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남자들이 모두 그녀를 돌아보았음에도 엘리자베스는 조금도 꿀리는 기색이 없이 남자들을 보며 말했다.

“왜요?”

그러자 남자들의 고개가 이번에는 케이 하커에게로 돌아갔다. 케이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술은 그……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

“그럼 튀김을 뭐랑 먹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아연해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바 끄트머리 자리에 가서 앉아 주인장을 쳐다봤다. 그러자 주인장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케이의 뒤에 있던 미리엄이 쿡쿡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귀족들이랑은 영 다르다고, 네 여자.”

미리엄은 그렇게 말하더니 얼른 엘리자베스의 옆에 가서 앉아 말을 걸었다. 미리엄은 아까부터 취기 탓인지 내내 기침을 해댔는데도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에게 조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케이 하커는 지금까지 알던 엘리자베스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자리에 서서 엘리자베스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한 여자가 펍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에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든 파격적인 실루엣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붉게 칠한 입술을 열었다.

“케이! 총각 딱지 뗀다며?”

앰버 플래스. 케이에게 질펀한 농담을 던진 여자의 이름이었다.

순식간에 펍 안의 이목이 케이와 앰버에게로 주목되었다. 바에 앉아 있던 미리엄과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엘리자베스는 넋을 놓고 앰버를 보고 있었다.

케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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