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8화
“그는 우리의 엄청난 돈줄이었죠. 우리는 그 대가로 두 사람의 망명을 도우려고 했어요.”
“우리가 대체 누굴 말하는…….”
“참정권 운동을 하는 리오든 노동자협회요.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모두 협회 소속이에요. 케이 덕에 우리 지부가 이렇게 커진 거예요.”
“어, 언제부터…….”
“당신하고 약혼이 결정되고부터 시작된 일이었고 망명준비는 당신과 결혼하고부터 내내였어요. 케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켈토로 가는 배편을 두 개나 준비해놓고 당신이 사라지자 폐기했겠어요?”
켈토에 가자던 케이의 말이 엘리자베스의 뇌리를 스쳤다. 엘리자베스의 심장께에 무거운 돌덩이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대체 자신이 케이에 대해 아는 건 뭐였을까? 그가 매일같이 공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게 전부 참정권 운동 때문이었다고? 자신과 진짜 켈토에 가려고 배편을 두 개 준비해두었다고?
하지만 그때—
비밀 투표. 보통 선거. 아동 노동 금지.
엘리자베스는 그 전단지에 쓰여 있던 단어들을 떠올렸다.
귀족원 세습 금지. 왕정 폐단 철폐.
‘귀족 아가씨는 노동자들과 어울리는 게 재미없나 보지?’
엘리자베스가 펍에서 뛰쳐나올 때마다 케이가 자신을 경멸하며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노동자가 아니라 농노들이랑 어울려 버릇해왔을 테니까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절대로 자신이 고칠 수 없는 이유였다.
자신의 핏줄, 그 안에 내재된 것.
귀족.
몰락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치를 해대는 왕족의 딸.
케이에게 엘리자베스가 어떤 의미였을지 드디어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담담한 눈으로 앰버를 보았다.
“켈토에 함께 가려던 건 내가 아니었을 거예요.”
“설마 그게 나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엘리자베스!”
“당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였을 수도 있고, 만약에 나였다고 해도 내 아버지의 반역 사건 이후 케이의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 그래서 배편을 폐기했을 거구요.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게 설명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리 케이에게 직접 물어봐요. 그가 지금 이곳에 와 있어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동요를 파고들었다.
“내일 새벽에 나와 함께 리오든에 가기로 했어요. 정확히는 그가 내 계획에 동행해주는 거죠. 떠나기 전에 의료원에 사람을 보낼게요. 그를 볼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을 따라오면 돼요. 그게 아니라면…….”
앰버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착 가라앉았다.
“케이에게 당신 얘긴 하지 않을 게요.”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케이를 다시 본다고?
그 단어가 엘리자베스의 심장을 두방망이질 쳤다.
이건 사실 케이 하커와 왕실이 쳐놓은 덫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럼에도 케이 하커를 마지막으로 한 번은 보고 싶다는 마음은 어떻게 하기가 어려웠다.
“머리핀 정말 잘 어울리네요. 케이 하커가 켈토에서 특별 주문한 보람이 있어요.”
그때, 앰버가 엘리자베스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고정하는 머리핀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화닥닥 머리핀을 빼서 주머니에 넣고 말했다.
“내가 직접 가는 건 생각을 해볼게요. 그래도 인편에 당신의 약을 좀 보내줄게요. 꼭 먹어요.”
그녀의 말에 앰버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더니 멈칫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진 몰라도 조쉬의 말대로 혁명엔 피가 들어가니까.
엘리자베스는 굳은 얼굴로 천막을 나설 준비를 하며 말했다.
“난 당신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목숨이 이 거지 같은 세상의 변화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살아 있어요. 나는 한때 당신을 정말 미워했지만 적어도 지금 하는 말은 진심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울렁거림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끼며 앰버의 시선을 피해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 있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당신의 이름을 꼭 기억하도록 하죠. 앰버 플래스.”
앰버가 그 말에 환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기억된다는 건 영광이군요. 엘리자베스. 다시 만나요. 그게 내일 새벽이면 더더욱 좋겠구요.”
이 여자는 자신이 더 아름다운 주제에 이런 식으로 말하니 더 재수가 없는 거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막을 나왔다.
* * *
앰버 플래스의 입김 덕인지 엘리자베스는 정말 순순히 의료원으로 돌려보내졌다.
엘리자베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의료원 앞의 항만 앞에 섰다.
저 항만 어딘가에 케이 하커가 있다고?
어릴 적의 자신을 정신없이 사로잡아놓고 결국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자가?
엘리자베스는 멍하니 앰버의 말을 되짚어봤다.
케이 하커가 켈토로 가기 위한 배편을 준비했다는 말.
케이 하커가 정말로 부부의 새 출발을 위해 배편을 준비했다고 치더라도, 그 말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가 두 사람의 결혼 이후 내내 망명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그는 클레몬트 공작이 이런 일에 휘말려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알았다면 왜 미리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엘리자베스는 비릿한 파도 냄새 속에서 밀려드는 울렁거림을 느꼈다. 케이 하커에 대해 아는 모든 것들이 바위에 부딪혀 사라지는 새하얀 파도처럼 부서져갔다.
이대로 내일 새벽 케이 하커를 만난다고 한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리오든에 돌아갈 수도 없고 두 사람의 경멸의 역사를 담은 이 땅을 떠나 켈토에 가서 아무것도 아닌 척 새 출발을 할 수도 없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케이 하커를 인생에 마지막으로 볼 지도 모를 기회를 내버릴 수 있는 사람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녀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이 마음이 수치스러웠다.
덜컹!
엘리자베스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뭔가가 근처 수풀 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또 망할 놈의 혁명군인가!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앰버의 천막에서 몰래 훔쳐온 잭나이프를 꺼내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겨눴을 때였다.
붉은 눈. 흰 털.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덩치. 두 발로 서 있으면서 인간은 아닌 그 녀석을, 엘리자베스는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몰록.
엘 선생이 자신에게 말해줬음에도 자신은 늘 그 존재를 반신반의했던 괴물. 그 괴물이 붉은 액체가 묻은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며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이상한 소리를 냈다.
“크흐…….”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몰록이 자신을 덮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몰록은 그녀의 반대쪽으로 뛰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다급하게 바닥을 차고 일어났다.
“젠장! 엘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의료원 1층에 있는 종을 치러 달려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의료원 대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팔뚝을 잡아챘다. 까마귀 탈을 쓴 거대한 덩치, 엘 선생은 단숨에 엘리자베스를 문 옆의 벽에 몰아붙였다.
턱!
엘리자베스의 등과 나무판자가 부딪쳤다.
“선생님!”
“네 선생님 여기 계시니까 좀 조용히 해라. 마을 사람들을 모두 깨워 몰록의 먹잇감으로 만들 셈이냐? 그 녹슨 칼은 어디서 났냐? 이것부터 들어.”
엘은 그녀가 든 잭나이프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리볼버를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떨결에 총을 받아들고 엘을 보았다.
“선생님은요?”
그 말에 엘이 어깨에 멘 산탄총을 가리켰다.
“내 건 이거. 둘 다 총알에 몰록의 피부를 뚫을 수 있는 특수 물질을 발라 놨다. 총알은 다섯 발이 들어 있고 예비 분은 여기 있다만 솔직히 그 다섯 발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면 그냥 튀는 걸 권장한다.”
엘리자베스는 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 이상으로 새파랗게 질린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약 나랑 떨어지더라도 넌 몰록이 발견되면 괜히 총 같은 거 쓰지 말고 숨어서 조명탄을 터트려 나에게 알려주면 된다. 내가 그리 멀리 있진 않을 테고 이미 녀석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 넣어뒀으니 녀석도 행동이 조심스러울 게야. 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손가락 세 개 정도쯤은 각오하고 있을게요. 그런 걸로 도망가지도 않을 거구요.”
엘리자베스는 비장하게 끄덕이며 조명탄 총과 리볼버 그리고 여분의 총알 주머니를 받아들고 주머니에 넣고 허리춤에 단단히 묶었다. 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자베스가 온 길을 따라 먼저 달려갔다.
바닥에 몰록의 핏자국이 낸 길이 있었다. 엘리자베스와 엘은 그 길을 따라, 개발을 위해 막 밀어버리는 중이라는 빈민촌 흉가들이 모여 있는 지대로 뛰어갔다. 그나마 현재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으로 몰록이 도망쳤다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그러나 흉가 입구쯤에서 길이 두 갈래로 흩어졌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터였다. 몰록이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거나. 추적을 예상하고 교란을 시키고 있거나.
엘은 망설였지만 엘리자베스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저쪽으로 갈게요.”
말을 마친 엘리자베스는 오른쪽 길로 거침없이 달렸다. 엘 역시 다른 쪽으로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컴컴한 흉가들 사이에 홀로 남겨지자 두려움이 왈칵 몰려들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엘은 몰록이 옮기고 다니는 병이 불치병에 가깝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죽었고 그냥 두면 더 많은 이들이 죽을 거라고도 했다.
주로 구빈원이나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이들. 아파도 제대로 치료 한 번 받기 힘든 이들.
엘리자베스는 손에 든 리볼버를 꽉 쥐었다.
그때, 뒤에서 기척이 났다. 작은 돌멩이가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
엘리자베스는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조명탄이 든 총을 만지작거렸다. 안전한 곳으로 가서 몰록의 위치를 확인하고 얼른 이 총을 쏴야—
“크흐흐!”
“으아악!”
그 순간, 뒤에서 몰록이 그녀를 덮쳐왔다. 몰록의 발톱은 순식간에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등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몰록은 그녀가 고통에 신음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소 같은 덩치와 흰 털,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 눈.
‘그것들도 한때는 인간과 같은 지성체였지.’
엘리자베스는 엘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과 같은 지성체였다고? 이 끔찍한 괴물이? 엘리자베스는 공포심에 심장이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몰록이 포효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펑!
그녀는 리볼버가 아니라 조명탄을 골랐다. 하늘로 치솟는 조명탄에 순식간에 주위가 밝아졌고 몰록이 움찔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뒤로 물러나며 사정거리를 쟀다. 어디를 쏴야 할까?
엘리자베스는 몰록의 약점은 모르지만 하나는 알았다. 시각을 잃어버린 동물은 공격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엘리자베스는 리볼버의 방아쇠에 댄 검지에 힘을 줬다.
탕!
총알의 궤적이 초록색으로 기이하게 빛나며 허공을 갈랐다.
‘저게 바로 엘 선생이 말한 특수 물질일까?’
엘리자베스가 아름답기까지 한 총알의 궤적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이!”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신음소리가 녀석의 아가리에서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멈추지 않고 녀석의 다리를 노렸다.
탕!
이번에는 불발이었다. 눈을 맞아 비틀거리던 녀석이 다리를 빗맞자 이번에는 날뛰기 시작했다. 녀석은 뒷걸음질 치는 엘리자베스를 붙잡기 위해 털북숭이에 기다란 팔을 휘둘렀다.
잡힌다! 잡히면 죽는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진한 화약의 냄새가 났다.
펑!
그리고 녀석이 다시 비틀거리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몸에 열이 오르고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닐 것이다. 아까 몰록의 발톱에 당할 때부터 예상했으니까.
이건 불치의 병, 그 전조 증상이리라. 걸리면 시름시름 앓다가 6개월 안에 죽게 된다는 병.
엘리자베스가 털썩 쓰러지는 순간,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옆에 있는 흉가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엘이 산탄총을 두 발 더 쐈다. 괴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엘은 산탄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황급히 엘리자베스에게 달려왔다.
“엘리즈! 이 자식! 내가 분명 조심하라고 했는데!”
“……조심했는데요…….”
“이 와중에도 말대꾸냐!”
엘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등에 있는 상처를 살폈다. 등이 축축한 것으로 보아 피도 많이 난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운명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하필 오늘 밤에 몰록에게 물린다고? 엘리자베스는 피식 웃으며 엘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엘은 분주하게 엘리자베스의 등의 상처에 소독약을 뿌리며 콧방귀를 꼈다.
“흥. 역시 네놈에게도 질펀하게 놀아난 애인이 있었던 게지!”
“……애인은 아닌데요…….”
“사랑하는 놈이었냐?”
엘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를, 그의 삐뚜름한 얼굴과 늘 그녀를 비꼬던 말투, 그리고 충격적이었던 그의 배신을 떠올렸다.
“아뇨. 아니에요. 그냥 얼굴에 시원하게 침을 한 번 뱉어주고 싶은 놈이에요.”
“돈이라도 떼먹혔나 보지!”
엘의 성난 목소리에는 떨림이 들어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엘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붉어진 눈으로 엘을 올려다보았다.
“그 자식을 꼭 만나서 말해줘야 하는데…… 해줄 말이 있는데…….”
네가 날 혐오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 나도 널 사랑하지 않기로 했어.
어쩌면 나와 약혼하던 날부터 내내 네가 지껄이던 그 말이 맞았을지도 모르지.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나는 그저 널 굴복시키고 이용하고 싶었던 걸지도. 너만큼 건방진 자식을 나는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흐느끼는 사이에 엘이 후드를 벗고 까마귀 탈을 벗어서 옆에 놓았다.
“그럼 만나서 말해줘라.”
“네?”
엘리자베스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처음 본 엘의 맨 얼굴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엘프 같다!
“너 내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이 주머니 속에 뭐가 있는지 늘 궁금해했었지? 알려주마. 여기엔 나와 몰록을 이곳으로 오게 만들어준 교통수단이 들어 있다. 팔찌처럼 차면…….”
엘은 늘 차고 다니던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내 엘리자베스의 팔목에 채웠다.
“설정한 시간으로 데려가주는 신통한 발명품이지. 이게 널 내가 그 멍청한 조수한테 치료제를 써버리기 전으로 보내줄 게다. 이걸 나는 ‘시간여행기’라고 부른다. 엘리자베스. 이걸 쓰면 미래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갈 수 있어. 나는 실수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몰록을 같이 데려왔었지.”
“젠장. 선생님은 역시 이상한 사람이었군요!”
그 말에 엘이 피식 웃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차가운 뒷골목에서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