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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7화 (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7화

엘은 괴팍했고 뻑 하면 엘리자베스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게다가 낯선 간호 일을 하면서 남부의 빈민구제원을 돌아다니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환자들은 엘리자베스를 못미더워 하고 질병에 지친 나머지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엘을 따라다니는 3개월 정도는 거의 매일이 그만두고 싶은 날이었고 실제로 몇 번은 짐을 싸서 멀리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대로 무시만 당하다가 도망가면 그 전에 있던 조수와 다를 바가 뭔가 싶은 생각에 드는 자존심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돌아오면 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소리를 질렀고 그녀에게 물건을 던졌다.

“멍청한 것! 내가 분명 집기들을 똑바로 소독해놓으라고 했잖냐!”

엘이 수술에 들어가기 전까지 집기를 소독해놓고 환자들의 붕대를 갈고 약을 태우지 않고 끓이는 그 모든 일을 엘의 눈에 차게 할 수 있었던 것은 3개월만의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날 처음으로 엘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고 넘어갔다.

“……흥. 이제야 좀 수술할 맛이 나는군.”

엘리자베스는 그날을 기점으로 조금씩 일에 익숙해졌다.

환자들은 엘리자베스의 노련함에 조금씩 믿음을 주었고 다 나은 어린 환자들은 엘리자베스를 꽤나 따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남부 사투리나 노동자들의 언어에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그들이 만나는 환자들에게는 투박하지만 따뜻한 정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언어에 적응해갈 때마다 케이 하커를 떠올렸다. 늘 공장 노동자들과 험한 말을 주고받던 케이.

케이 하커는 몇 번 엘리자베스를 자신이 자주 가는 펍에 데려가기도 했는데, 엘리자베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놓고 내내 비꼬는 말에 질려 그때마다 중간에 뛰쳐나오곤 했다. 지금의 엘리자베스라면 그들이 하는 말이 투박하지만 나쁜 뜻은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칠 때면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케이의 말도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조작해보려고 해도 재판장에서 아버지를 극형으로 몰고 가던 케이의 눈빛은 그녀의 희망을 꺾어놓았다.

집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함께 켈토에 가자고 해놓고.

엘리자베스는 매일 같이 꿈을 꿨다. 과거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케이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에게 묻는 꿈이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 왜 내가 그렇게 미웠어? 단지 내 아버지와 내가 너를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널 사랑했기 때문에, 내 부모가 나한테 그랬듯 내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한테 집착하고 너를 강요하고 협박했기 때문에?

하지만 꿈속 케이는 언제나 대답하지 않았다.

* * *

그렇게 1년이 지났다.

1년간 엘은 몰록의 코빼기도 찾지 못했지만 꽤나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 남동부의 한 항만 도시로 향했다.

엘리자베스는 그간 때때로 신문을 구해 읽었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하커 사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일단 로버트 하커가 공장 화재로 죽었다. 덕분에 차남이긴 하지만 공장 실무에 장악력이 높았던 케이 하커가 하커 사의 소유주가 되었다.

케이 하커는 제철, 면직 뿐 아니라 증기 자동차와 증기 기관차 산업까지 사업을 확장해 대부호가 되었다. 그리고 귀족원에 엄청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케이 하커는 법을 개정하는 데 성공하고 하커 사를 주식회사로 만들 거라고 발표했다. 소수의 파트너들만 가질 수 있던 공장의 지분을 노동자들과 나눠 갖겠다고 한 것이었다.

덕분에 하커 사는 노동자들의 꿈의 직장이 되었고 심지어 이 시골에서조차 커서 하커 사에 들어가겠다는 꼬맹이들이 심심찮게 보이곤 했다.

케이 하커에게 이런 추진력이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그와 사는 동안 한 번도 꿰뚫어보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그저 독재자처럼 구는 시부 앞에서 순종적인 남자라고 믿었던 것이다.

어쩌면 케이가 이런 열정적인 리더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신과 클레몬트 가문, 그리고 로버트 하커 사이의 유착관계가 정리된 덕이었을 지도 몰랐다.

또 하나 신문을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처형당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여기에 버젓이 살아 있거늘 신문에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비밀처형을 당했고 그 시신을 하일 강 악어에게 던져줬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찾지 못해 후환을 두려워한 경찰청이 불쌍한 한 여인에게 누명을 씌워 사형시킨 모양이었다.

더 이상 보비들에게 쫓길 일이 없다는 것은 반가웠지만 어차피 다시 돌아갈 곳 없는 처지라는 것은 똑같았다.

“이제 케이 하커 사장이 공식적으로 혼자가 되었으니 이 나라의 모든 여자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겠네요. 그간 왜인지 케이 하커가 법원에 이혼 신청서를 내지 않았다잖아요. 법적인 부인이 수배범이라 이혼 사유가 충분한데도요.”

항만 도시에서 의료원을 운영하는 수녀님이 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수녀님으로서는 적당치 않은 언사에 조금 당황했지만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공동 우물에서 깨끗한 물을 더 받아와야겠어요. 더 꾸물거리다간 엘 선생님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들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물을 길으러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텁텁한 항구의 습기가 그녀를 덮쳐 왔다. 그녀는 답답한 감정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지난 1년간 깨달았다. 무거운 걸 옮기거나 방을 정리하거나 환자의 상처를 꿰매거나—

철컥.

그녀가 공동우물로 가는 어두운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둠 속에서 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의료원 일꾼이지? 그렇다면 상처를 꿰매는 정도는 할 줄 알 테지? 순순히 따라오면 순순히 돌려보내주마.”

엘리자베스는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젠장.’

그러고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길드에서는 종종 의사를 필요로 했고 엘을 납치하려는 길드를 만난 것만 3번이었다. 그때는 매번 엘이 진료를 마친 후 품속의 리볼버를 보여주고, 품삯을 잘 챙겨 받아서 나오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엘리자베스에겐 리볼버가 없었다. 있다 해도 그걸 꺼낼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저 순순히 돌려보내주겠다는 말에 기대를 걸고 그들에게 붙잡혀 비틀비틀 걸었다. 산 중턱에 이르자 마을 뒤편 숲 속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을 따라가자 숲 속에 친 작은 천막이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머뭇거리자 뒤에서 총부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천막을 열었다.

천막 안에서는 진한 피 냄새와 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끄으으…….”

간간히 들려오는 신음에 엘리자베스는 지금까지의 고민이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마음으로 뒤에 있던 두 남자에게 명령했다.

“공동 우물에서 깨끗한 물을 길어 와요.”

“그런 건 없어요. 대신에 쓸 만한 독주가 있으니 이걸 쓰세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대답한 것은 두 남자가 아니었다. 신음소리를 내던 이불 속의 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 순간,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눈을 보고 잠시 멈췄다가 얼른 그녀의 어깨에 엉망으로 감겨 있는 붕대 쪽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그렇군요.”

엘리자베스는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내미는 잭나이프로 여자의 어깨에 감긴 붕대를 풀어냈다.

엉망이 된 피부와 선명하게 보이는 공동. 엘리자베스는 이 상처가 뭣 때문에 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와 여자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여자가 거친 목소리로 남자들에게 말했다.

“다들 나가 있어. 내 가슴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 말에 남자들이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곧 천막 안에는 두 여자의 침묵만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다친 여자 쪽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자가 말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피딱지를 매단 여자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앰버 플래스.”

켄터베리 홀에서 노래나 불러야 할 아름다운 가수가, 대체 왜 여기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단 말인가.

“살아 있었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앰버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자신이 수배범 신세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독주의 뚜껑을 열어 앰버에게 먹이고 상처에 뿌렸다.

앰버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부턴 닥치고 입에 천을 물고 있는 게 좋아요. 여긴 클로로포름이 없으니 아마 엄청 고통스러울 테고 괜히 혀라도 깨물어 과다출혈로 죽으면 저 남자들에게 나를 다시 곱게 돌려놓으라고 말할 수도 없을 테죠.”

* * *

앰버의 총상은 아슬아슬하게 뼈와 큰 혈관을 빗겨간 것으로 보였다.

“더 확실한 건 엘 선생님께 가서 봐야 해요. 저는 선생님처럼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진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의료원으론 갈 수 없어요. 우린 어떤 증인도 더 남기지 않고 리오든으로 돌아가야 해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뭘 하는 거죠? 저 험악한 남자들과 리오든 최고의 인기 가수가 말이에요.”

“엘리자베스. 인기 여가수도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아요. 이를테면…….”

앰버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쿡쿡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세상을 바꾸는 일 같은 거요.”

“뭐요?”

엘리자베스는 순간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말했다.

“설마 당신도 사회주의자였어요? 아나키스트거나?”

이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아마 그만큼 지금 세상이 엉망이라는 거겠지.

엘리자베스의 동그래진 눈을 본 앰버가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렸다.

“당신이 온 켈토에는 대통령이 있다죠. 왕 대신에요. 하지만 여긴 그레이트 레본이에요. 이 나라에서 케이 하커가 왜 인기를 구가하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전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흠칫 하고 말을 멈추고 앰버를 보았다.

앰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케이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그럴 리 없어요.”

“왜요?”

“그 사람은…….”

날 혐오하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삼키며 이렇게 말했다.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케이도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나면 좋겠어요.”

맘에도 없는 말을 지껄이는 사이 앰버가 어렵게 상체를 일으켰다.

“가만히 누워 있어요.”

“어차피 새벽엔 이곳을 떠나야 해요. 엘리자베스.”

“리오든은 켈토와는 달라요. 리오든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켈토는 이민자들의 도시지만 리오든은 대대로 왕과 귀족들의 도시였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사소하지만 확실한 발걸음이에요. 리오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의회 민주주의를 향한 걸음마죠. 비밀 투표. 보통 선거. 아동 노동 금지.”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그 단어들을 어디에서 봤는지 고심했다. 그리고 이내 기억해냈다.

“참정권 운동을 하는군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정권 운동.

그것은 사회주의나 아나키즘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혁명이었고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

“맞아요. 우린 하원에 우리의 자리를 원해요. 여자,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자리요.”

세상을 바꾸는 일.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굳어졌다.

“헛수고일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피식 웃었다.

“그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가치가 있는 일이죠. 역사가 내 이름을 기억해줄 거니까요.”

“역사는 여자의 이름을 쓰지 않아요.”

엘리자베스는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에서 많은 책을 훔쳐 읽었다.

대양을 건너는 멋진 항해를 적은 책. 한 섬에서 여러 종류의 생명체를 연구하는 학자의 기록을 담은 책. 증기 기관을 발명해 시대의 혁신을 꿈꾸는 사업가의 열망이 담긴 책.

그 많은 책들의 주인공은 전부 남자였다.

엘리자베스의 어두운 얼굴을 본 앰버는 다정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엘리자베스는 바보군요. 케이 하커의 말대로.”

“케이가 내가 바보라고 당신에게 말하던가요?”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날선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손을 쳐냈다. 앰버는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말했다.

“그래요. 그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자신과 결혼한 게 그 증거라고 했어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자신을 혐오하는 남자와 결혼하다니. 엘리자베스도 스스로가 멍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린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자신은 없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만나나 보죠?”

그녀의 말에 앰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미가 담긴 표정일까?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듣기 싫은 진실을 말해줄까 두려워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차라리 케이가 앰버를 사랑해왔다고 하는 게 자신을 덜 괴롭게 하는 말일까? 그래서 자신을 사랑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엘리자베스는 알지 못했다.

“케이는 당신을 찾고 있어요.”

앰버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미친놈처럼 매일 하일 강 다리 아래에 있는 모든 여자 노숙자를 뒤지고 당신의 흔적을 찾아요.”

“날 찾아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요?”

엘리자베스의 냉정한 말에 앰버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니요.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요.”

“됐어요.”

“케이는 지금까지 내내 우리의 운동을 도와왔어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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