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6화
판사가 만족스러운 눈으로 장내 정숙을 요구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장내는 조용해졌다.
판사가 케이 하커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내가 반역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소?”
케이 하커는 그 순간 움찔했다.
그는 로버트 하커를 잠시 쳐다보고는 이내 잔뜩 찡그린 얼굴로 군중들을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그 표정이 자신을 찾는 것만 같았다. 군중 속에서 자신을 이 곤경에 처하게 한 엘리자베스를 찾아내서, 그래서…….
케이 하커가 입을 여는 순간, 그녀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애하는 재판장님. 그렇지 않습니까? 감히 나와 내 아버지가 주는 돈을 쓰면서 뒤로는 친정과 다른 짓을 꾸미다니.”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널 혐오한다.
그의 표정은 그런 뜻이었다.
케이 하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문장과 자신이 죽길 바랄 정도로 혐오한다는 문장 사이에는 크나큰 공백이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처음 깨달았다.
케이와 자신의 약혼이 결정되던 순간, 결혼식에서 자신의 베일을 벗기던 순간, 침대 위에서 하이힐을 신은 귀족 아가씨를 올려다보던 순간—
그 모든 순간 케이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고, 경멸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걸 바꿀 수 있다 여겼다. 경멸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지 않나. 자신도 때로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케이 하커를 경멸했으니, 경멸은 사랑과 가까운 단어가 아닌가.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혐오는, 그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너는 나를 그저 이용하고 쓰다버리고 싶을 뿐이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마치 네 아버지가 노동자인 내 아버지에게 너를 빌려주는 척하면서 공장을 빼앗아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러니 나도 널 사랑하지 않겠어.’
자신이 케이 하커의 온 몸에 붉은 손톱자국을 만들었던 첫날밤에 케이가 자신의 위에서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토기를 참으며 성난 군중들 속을 벗어났다.
이 연극의 클라이막스였다.
자신은 몰랐지만 자신의 남편은 이 연극의 주연배우였던 것이다.
"클레몬트 공작의 무기류 생산법 위반 및 국가와 그레이트 레본 왕실 안보법 위반 혐의에 대한 형을 선고한다."
클레몬트 공작에게 극형이 내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준비한 돈으로는 공작을 결코 도망치게 만들어줄 수 없었다. 자신이 도망칠 수 있을지, 도망치고 싶기는 한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엘리자베스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군중들은 우르르 재판소 안으로 들어가느라 바빠,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밀쳤다.
그곳을 어렵게 지나오자 재판소 밖에서는 투표권 운동가들이 그녀에게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보통 선거! 비밀 선거! 아동 노동 금지!]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밀쳐내며 어렵게 소란스러운 재판소 마당을 뛰쳐나왔다. 수많은 보비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젠장.
엘리자베스는 리오든을 떠나라던 윌리엄 조쉬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엘리자베스는 재판소에서 보비들에게 붙잡혀도 여한이 없다고 여겼다. 케이 하커와 나란히 경찰청에 들어가면 그녀는 남편을 볼 수 있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건 개죽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가리고 최대한 빨리 뒷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두통을 일으키는 더러운 냄새가 났고 발에는 쥐들이 채였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걸을 때였다.
웬 집시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저씨, 가진 것 좀 있수? 내가 좋은 약을 좀 추천해주려고 하는데…… 어라? 아저씨가 아니네.”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얼굴에 대고 침을 뱉었다.
그러자 화난 남자가 분노한 얼굴로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말로 소리 질렀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건 분명 저주였다.
엘리자베스는 겁이 나 얼른 골목길을 통과해 달렸다. 앞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남자에게 따라잡히는지 보려고 뒤를 계속 돌아보아야만 했으니까.
히이이잉!
그때였다. 재빠르게 달려오던 옴니버스가 그녀의 몸을 덮친 것은.
말은 달려오는 그녀를 보며 상체를 일으켰고, 그 덕에 옴니버스가 덜컹거리며 건너편에서 오던 마차의 말을 자극했다. 엄청난 기세로 말발굽이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갈비뼈에 격통을 느끼며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입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씨발! 앞을 보고 다니지 못해!”
그녀의 축 늘어진 몸 위로 채찍질이 이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바지춤에 있던 돈주머니가 쏟아졌다. 동전이 쏟아지는 소리에 집시들이 달려들었다.
“돈이다! 돈!”
“비켜, 내 거야!”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라고!”
“으으으…….”
엘리자베스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에조차 한 남자만을 떠올렸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동전과 함께 데구르르 굴러가는 자신의 머리핀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흐흑…… 흑…….”
끔찍한 일이었다.
여전히 케이 하커를 떠올리면 심장이 이렇게 아프다는 것은.
* * *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닮았나?”
눈을 떴을 땐, 검은 실루엣이 무슨 종이를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까지 후드에 깊게 가려진 검은 실루엣 앞으로는 거대한 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게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엘리자베스는 곧 깨달았다.
죽음의 사신, 까마귀.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깨달은 순간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자신의 몸이 단단하게 무언가로 고정되어 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셔츠는 어디론가 사라진 자신의 가슴에는 거대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끔찍한 둔통이 흉부로부터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으윽. 아프지도 않나? 갈비뼈가 골절된 주제에 푸드덕거리기나 하고. 아서라. 그러다 갈비뼈에 장기 꿰뚫리고 싶냐? 가뜩이나 수술기구도 잔뜩 잃어버려서 곤란한데 말이야. 괜히 장기 출혈 같은 거 일으켜서 사람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사람…… 이에요?”
엘리자베스는 끔찍한 고통에 꼼짝 않고 누워서 눈알만 또르르 굴려 까마귀 마스크를 보았다. 그 말에 까마귀 마스크가 왜인지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너는 내가 사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냐?”
“……아니에요?”
이제 보니 이 남자는 사람의 말을 한다. 그렇다면 까마귀 마스크에 후드가 가리키는 것으로 남은 것은—
‘역병 의사’다.
어느 날 이 대륙에 홀연히 나타났다는 흑마법사들. 이제는 전설이나 동화처럼 여겨지는 이야기였지만 흑마법사들이 동네에 나타나면 그 동네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살아남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얘기를 엘리자베스 역시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 역병 의사인지 뭔지 그 흑사병을 옮기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 흑사병에 걸렸다고 하면 소독도 안 된 메스를 가지고 다니면서 째고 베서 기어코 패혈증을 만들고 다니던 걸어 다니는 재앙들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아까부터 이 작자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패혈증이니 흑사병이니 메스니 하는 소리는 엘리자베스가 한 평생 듣지도 못한 단어들이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이 사람이 케이가 그렇듯이 노동자의 어휘와 어조를 구사하고 있든가 아니면 집시의 말을 쓴다고 여겼다.
“……그래서 당신은 사신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 내 이름은 엘이다. 나는 그 돌팔이들과는 다르게 아픈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죽이는 게 아니라 고치고 있지! 그리고 넌 하필 그런 내 앞에서 마차 사고를 당했어! 그 덕에 꼬박 5일이나 누워 있었다. 마취약을 좀 세게 준 건지 정신을 못 차리더구나.”
스스로를 엘이라 칭한 이 남자는 사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신이 이렇게 말이 많을 수가!
엘리자베스는 엘이 투덜투덜하며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를 넋 놓고 보다가 엘이 들고 다니는 종이에 시선을 빼앗겼다.
[현상금 수배 중.]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이불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엘이 코웃음을 쳤다.
“설마 이제 와서 얼굴을 가리는 거냐?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화가가 누군지 몰라도 너랑 무척이나 닮았다.”
엘이 내미는 종이 속에는 제 얼굴이 있었다. 약간 어색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똑같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보며 격정적이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씌워진 혐의와 공개 재판, 그리고 결국—
엘리자베스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엘에게 물었다. 어차피 엘이 자신을 경찰청에 넘긴다 해도 이젠 꼼짝없이 잡혀갈 처지였다. 그렇다면 정확한 앞뒤나 알고 잡혀가고 싶었다.
“……아버지는요?”
“아버지? 아, 클레몬트 공작? 그 작자야 이미 시가지에서 우스운 꼴로 죽었지. 그 아내도.”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 차라리 시시각각 닥쳐오는 부모의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 안도했다. 엘리자베스는 부모에 대한 큰 애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죽음을 기다리며 떠돌았다면 끔찍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두고 도망쳤다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주는 부채감이 그녀의 심장을 아프게 찌르고 들어왔다. 그게 그녀가 인생에 단 한 번도 애정을 가져본 적 없는 아버지라 해도.
엘리자베스가 허탈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옆에 있던 베레모로 얼굴을 가렸다.
“엘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도저히 선생님과 같이 일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조수를 구하세요!”
“겨우 손가락 하나 잘린 것 가지고 큰 상심을 한 게냐?”
“손가락 세 개거든요……! 흐흑…… 흑…….”
“그래, 세 개. 그러길래 호들갑 떨지 말고 손가락을 잘 주워왔으면 내가 잘 붙여줬을 건데…… 이봐 조! 너 어디가! 진짜 가냐?!”
“저는 그런 괴물들과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구요!”
멀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났을 때서야 엘리자베스는 베레모를 치우고 텅 빈 방 안을 보았다.
옆에 있는 나무 창틀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근교로 추정되는 시골길을 재빠르게 내달리다가 잽싸게 웬 짐마차에 올라타는 남자와 거기에 대고 온갖 욕설을 하는 역병 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역병 의사는 방금 막 조수를 잃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로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 막 돌아갈 부모도 남편도 집도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병 의사가 투덜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은 엘리자베스는 어렵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역병 의사가 들어오자 엘리자베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엘 선생님!”
“……아, 깜짝이야! 너 언제 일어나 있었냐? 혼자 일어나기 힘들었을 텐데……?”
* * *
엘은 현상금 수배범인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조교가 되고 싶다는 말을 단번에 받아들였다. 너무 쉬워서 황당할 정도였다.
“맘대로 해! 다만 손가락 세 개쯤 잘렸다고 징징거리면 너도 확 두고 간다!”
“방금은 두고 간 게 아니라 버려지신 거 아닌가요?”
“시끄럽다!”
그 이후로 몇 주, 엘리자베스는 몸 회복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그녀가 묵는 이곳이 빈민구제원의 위층이라는 것이었다. 엘은 그 아랫층 빈민구제원에서 다친 도시 빈민들을 진료하고 있었다.
갈비뼈에 붕대를 꽉 묶고 틈틈이 아래층을 구경 갈 때마다 그는 그녀를 귀찮다는 듯이 보면서도 여러 가지를 설명해주었다. 엘리자베스로선 알아듣기 어려운 말뿐이긴 했다.
“마취를 위해 폭발 가능성이 높은 에테르 가스를 마시는 건 쓸데없는 짓이야. 고통을 줄이는 데에는 클로로포름만한 게 없어!”
그럴수록 엘리자베스는 엘과 함께 있으면서 점차 제 안에 꽁꽁 봉인시켜뒀던 지식에 대한 욕구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너는 귀족으로 태어났어! 대체 뭐가 문제냐. 이 쉐필드에는 너를 부러워하는 수많은 농노들이 있는데, 왜 자수를 놓는 대신 책이나 보고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는 게야!’
쉐필드에서 지내던 시절. 어린 엘리자베스에게는 책을 읽고 배운 것을 탐구하는 시간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엘리자베스 역시 미술, 음악, 조각 등 사교 모임에서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는 가정교사가 있었지만,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읽은 생물학이나 화학에 대해서 물어보면 불쾌한 기색을 비쳤다. 교사는 엘리자베스가 지치지 않고 질문하자 공작부부에게 공녀가 이상한 것 같다고 일렀다.
그날 밤부터 엘리자베스는…….
쾅!
그 이상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중세 시대에 머무른 교육을 받고 보수적인 생각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남부럽지 않게 키웠는데 대체 왜 이렇게 모자라게 구는 거냐! 너는 왕족이란 말이다!’
그래. 기억은 과거를 더 극적으로 편집하기 마련이다. 엘리자베스는 분명 그들의 강요와 협박, 집착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끼면서 커왔다. 원래 부모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커 자제하기 힘들어하지 않나.
어쨌든 어린 엘리자베스는 그런 부모 밑에서 바싹 말린 장미처럼 커왔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속으로는 자신 안의 모든 욕구를 거세당한 채 바싹 말라붙은 꽃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엘은 그런 그녀의 화병에 물을 붓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4주 후.
엘리자베스의 몸이 낫기가 무섭게 엘과 엘리자베스는 근교에 있던 빈민구제원을 떠났다.
엘은 엘리자베스가 다치던 날, 엘리자베스를 끌고 이 빈민구제원에 도착해 갈비뼈가 다섯 조각이 나 매우 위독한 상태의 그녀를 놀랍고 신속한 의술로 고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그놈들을 만났지.”
“그놈들이요?”
엘은 비장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그놈들’에 대해 설명했다.
몰록.
엘은 그 괴물들의 이름은 성서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말해주었다.
“그 괴물들은 나의 업보다, 엘리즈.”
엘은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엘리즈라고 바꿔 불렀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너무 귀족적이라는 이유였다.
“그 괴물들에게 물리거나 발톱에 당하면 6개월을 못 채우고 죽게 되지. 몰록이 옮기고 다니는 병의 치료제는 딱 하나 남았었지……. 그런데 마지막 남은 한 놈을 해치우기 전에 조교 놈이 몰록에게 당했고 그 마지막 치료제를 그 멍청한 조교한테 써버렸지 뭐냐. 그러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엘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툭 하면 넘어지고 자빠지는 엘이 그런 폭력적인 도구를 들고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엘은 몰록이 털북숭이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 눈을 가졌으며 덩치는 황소와 같다고 말했다.
정말 그런 괴물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괴물을 저런 총으로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엘의 표정은 진지했다.
“목숨을 걸고 마지막 한 놈을 죽이는 것.”
엘리자베스 같은 약골은 단숨에 괴물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런 놈을 죽인다고?
“놈이 얼마 전 남부에서 발견됐다. 놈이 남부 사람들을 공격해 전염병을 옮길 게야. 나는 그 전에 녀석을 찾아 죽여야 해. 정말 같이 가겠느냐? 몰록에게 물리면 이젠 너를 구해줄 치료제 따윈 없다, 엘리즈.”
엘은 그녀를 겁주려는 듯 쳐다봤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괴물이 주는 공포와 함께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지금 자신은 분기점에 서 있다. 내내 쫓기던 신세에서 무언가를 쫓는 신세로 변하게 될 분기점.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같이 가겠어요. 선생님.”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금방 후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