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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화 (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화

조쉬는 책상에 기대어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케이 하커를 믿나? 왜 그렇게까지 그를 구하려 들지?”

조쉬의 물음에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눈은 그의 움직임을 끝까지 쫓는 상태였다.

“멍청한 질문이에요. 케이 하커는 내 남편이에요.”

“내가 건드린 유부녀들은 남편이 경찰청에 잡혀갔다고 해서 당신처럼 열렬히 그를 구하려 들지 않아. 오히려 환호할 걸.”

“그렇다면 다르게 말하죠. 나는 그를 사랑해요.”

“사랑이라…… 그것 참 쓸데없고 과한 단어군. 케이도 당신을 사랑하나?”

조쉬가 창밖을 슬쩍 보며 커튼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케이 하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자명한 사실이므로 고민 따윈 하지 않았다. 그 자명한 사실이 주는 절망감에도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내 아버지가 널 꼬셔서 어떻게든 공작가에 편입되라고 하더군. 그러면 나한테 공장을 주겠다고 말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나와 결혼이 하고 싶어?’

케이 하커가 자신과의 약혼이 결정되던 날, 공식적인 청혼을 하며 하던 말이었다.

개 같은 자식. 네가 윌리엄 조쉬보다 더 나빠.

하지만 그 사실을 이 나쁜 자식한테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쉬가 시선을 돌린 사이 재빨리 책상 위에 있는 잭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쉬는 방문으로 걸어가 문을 잠갔다.

딸깍.

차가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세상에. 엘리자베스. 당신이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인줄 알았다면 당신을 여태껏 그냥 두지 않았을 거야.”

“나도 당신이 이런 양아치인줄 알았다면 진작 신고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잭나이프를 조쉬에게 겨누며 그를 노려보았다. 조쉬는 손을 번쩍 들고는 무섭다는 듯한 얼굴을 해보이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대치하는 상태 그대로 왼쪽으로 이동했다. 조쉬는 문을 뒤에 두고, 엘리자베스는 벽을 뒤에 둔 채였다.

“솔직하게 얘기하지. 방금 나간 내 동지들 중에는 경찰 끄나풀도 있어.”

엘리자베스는 이 와중에도 그 말에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이 케이 하커는 잘 있다던가요?”

조쉬의 표정이 묘해졌다.

“당연하지. 당연해. 폐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보다 케이를 더 극진히 생각하고 계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케이 하커는 무사히 빠져나오겠지만 당신은 아닐 거라는 말이지. 당신은 내일 수배될 거야. 보비들이 당신을 저택에서 끌어내지 못해서 화가 많이 난 상태야.”

수배라고?

현상금이 걸리는 흉악범죄자들의 얼굴이 박힌 수배 전단지를 엘리자베스 역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제 얼굴이 걸리는 꼴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왜…….”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단 거지. 클레몬트의 혐의를 벗겨줄 생각이 없다는 거고.”

조쉬는 피식 웃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돈을 툭툭 찼다.

“그리고 난 당신을 냉큼 잡아가면 공장에서 발행될 어음이나 이런 푼돈 같은 건 굳이 탐내지 않아도 될 테고.”

“그럴 수가…….”

엘리자베스가 경악에 젖은 얼굴로 조쉬를 보았을 때였다. 조쉬가 위험한 맹수를 다루듯 엘리자베스에게 ‘착하지’라고 속삭이며 그녀의 손에 들린 잭나이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일, 당신이 할 일은 정해졌겠지?”

조쉬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손에 들린 잭나이프로 그녀의 앞섶을 가리켰다.

“벗어.”

“쓰레기 자식. 내가 경찰청에 잡혀가면 폭탄 테러에 가담했다고 너와 네 동지들을 밀고할 거야. 아나키스트가 되려면 양심은 팔아먹어야 하나 보지?”

엘리자베스가 핏발이 선 눈으로 조쉬를 노려보았을 때 조쉬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쿡쿡 웃었다.

“엘리자베스. 당신이 자본가의 아내이자 귀족의 딸이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을 나의 동지로 삼았을 거요.”

“닥쳐요, 조쉬.”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방문을 열었다. 엘리자베스가 조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는 사이 조쉬가 제 집사를 불렀다.

“해미쉬! 저번에 일을 그만둔 마부의 옷을 가져다줘!”

“네, 주인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깨달았다. 이 집에도 집사가 있었구나.

조쉬는 엘리자베스를 다시 돌아보니 턱짓했다.

“옷을 갈아입고 근교로 가시오. 노스웨스트 리오든에 있는 칼몽 여관 주인인 해미쉬의 사촌동생이 나를 잘 알고 있소. 그녀에게 내 이름을 대면 하루 정도는 쉬어가게 해줄 거요. 거기서 쉬었다가 행선지를 정하고 내일 동이 트기 전에 리오든을 떠나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조쉬의 말을 해석하지 못해 가만히 있는 사이, 조쉬가 해미쉬로부터 헐렁한 바지와 낡은 셔츠, 조끼를 받아들고 그녀에게 던졌다. 엘리자베스는 얼떨결에 옷을 받아들고 조쉬를 보았다.

“왜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조쉬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내 경찰 끄나풀 동지가 내일 클레몬트 공작의 공개 재판이 이루어질 거라고 얘기해줬소. 공개 재판이 끝나면 반역자의 딸은 어딜 가나 화제의 중심에 오를 거요.”

공개 재판이라니.

공개 재판은 이미 형을 정해놓고 하는 쇼 같은 것이다. 일부러 귀족원이나 왕실에서 끄나풀을 심어 평민들 사이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극형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엘리자베스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며 조쉬를 노려보았다.

이것도 함정은 아닐까?

“왜 나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야 당신을 보비들에게 넘겨서 괜히 복잡한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지금 클레몬트 공작의 테러 모의는 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요. 거기에 얽히면 골치 아파져요. 그렇지만 당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액수가 장난이 아니에요. 내 경찰 끄나풀 동지도 눈이 돌아 경찰청으로 돌아가는 즉시 당신을 잡으러 이곳으로 올 거요. 어서 옷을 벗고 갈아입어요. 그런 아름다운 차림으로는 거리에 나서기 무섭게 경찰청에 끌려갈 겁니다.”

조쉬는 곧 방바닥에 떨어진 돈 꾸러미와 돈을 주워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가지고 가요. 이런 푼돈으로 괜히 반역자의 딸과 얽히기 싫군.”

조쉬가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열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고마워요.”

조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나가고 혼자 남은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울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쿰쿰한 냄새가 나는 셔츠에 팔을 꿰며 잊지 않아야 할 단어들을 암기했다.

‘칼몽 여관 주인장 해미쉬. 공개재판.’

베레모 안에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을 숨긴 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가 준 머리핀을 빼 돈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그 입구를 동여맸다.

조쉬는 엘리자베스나 클레몬트 공작보다 케이가 안전할 거라고 여겼지만 그건 조쉬가 케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그녀를 내다버릴 남자는 아니었다.

* * *

조쉬가 소개해준 여관 주인장은 윌리엄 조쉬의 이름을 듣자 자세한 건 묻지 않고 괜찮은 방을 내주었다. 이 여관이 윌리엄과 동지들의 아지트일까 하는 추측이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더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방은 쥐가 나온다는 점만 빼면 안락한 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거의 잠들지 못하고 다음 날 새벽을 맞이했다.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말과는 달리 리오든 중심부로 다시 돌아왔다.

공개 재판에서 케이 하커에게도 극형이 내려질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음 수를 생각해야 했다. 간수에게 돈을 내서라도 케이 하커를 빼오거나 비슷하게 생긴 길거리 노숙자를 사서 돈을 주고 바꿔치기를 하거나…….

그리고 아버지인 클레몬트 공작에 대해서는…….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교수형을 당할 거라고는 도무지 믿지 못했으므로 그쪽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리오든 거리에 나섰을 때는 신문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소식이 주를 이뤘다. 반역을 꾀한 클레몬트 공작의 공개 재판 소식, 그리고 클레몬트 공작이 알고 보니 사회주의자였더라는 말도 안 되는 증거물들에 대한 것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하커 사와 관련된 소식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신문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경찰청에 제 발로 들어가 자신을 잡아가 달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절망은 국회 옆에 있는 재판소 앞에 도착해 수많은 인파들에 휩쓸리면서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곧 클레몬트 공작의 공개 재판이 시작됩니다! 사회주의자들을 이 나라에서 몰아냅시다!”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것은 사회주의자가 이 나라를 가난하고 비참하게 만들 거라는 말을 떠들어대는 선동꾼들의 목소리였다.

무서울 정도로 선량한 눈동자들이 그 말에 상기된 얼굴로 재판소로 향하고 있었다. 저들은 그저 다가올 누군가의 비극에 흥분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제 안에서 부글거리는 감정들을 어찌할 새도 없이 재빨리 재판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빨리 움직인다고 애썼는데도 그녀가 재판소 안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참고인의 증언을 허락해주십시오, 재판장님!”

엘리자베스는 시야조차 트이지 않은 기둥 뒤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능한 보비들이 없는 곳으로 자리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케이 하커는 신성한 재판장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을 신 앞에 맹세합니다.”

겨우 하루 만에 듣는 목소리인데도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정신을 잃을 것처럼 아찔해졌다. 엘리자베스는 이성을 잃고 과감하게 보비들의 뒤로 가 시야가 트이는 곳에 자리했다.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케이 하커의 얼굴이 보였다. 삐뚜름한 자세, 늘 조소가 걸려 있는 입술,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눈.

모든 것이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 그대로라는 사실에 엘리자베스는 악몽 같았던 이틀을 약간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의 눈에 엉망진창이 된 꼴로 피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을 맞은 듯 눈이 부어 있었고 입술은 피딱지가 앉았다. 경찰이 감히 왕의 사촌을 저렇게 만들었다니. 사태의 심각성이 전해져 왔다.

“클레몬트 공작의 꼴이 우습군. 반역자니까 당연한 거야.”

“그의 딸도 하커 사의 재산으로 엄청난 사치를 누렸다던데, 그런 주제에 사회주의는 무슨!”

“공작? 웃기고 있군. 언제 적 귀족이야!”

뒤에서 날선 목소리들이 그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재판장의 분위기는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무서웠다. 구경꾼들은 클레몬트 공작에게 야유를 보내고 계란을 던졌고 보비들은 그들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완벽하게 짜인 한 편의 연극. 엘리자베스는 이 연극의 끝을 알 것만 같았다.

그때, 판사가 케이에게 물었다.

“클레몬트 공작이 공장에서 폭탄 테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커 사는 정말 몰랐습니까? 지금 면직공장의 소유주로 아는데, 옆 공장에서 탄약을 만드는 것을 전혀 몰랐다구요?”

“전혀 몰랐습니다.”

케이 하커는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불안해졌다. 케이 하커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의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클레몬트 백작의 혐의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듯한 뉘앙스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을 거야. 당연한 일이지.

엘리자베스가 엇나가는 마음을 다잡는 사이, 케이가 입을 열었다. 삐뚤고 어긋난 미소를 지으며.

“만약 알았다면 장인어른과 제 아내를 당연히 말렸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주의 사상은 하커 사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멍청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고 이제 조금이나마 빛을 보았죠. 리오든을 이렇게 부유한 도시로 만든 게 우리입니다. 사회주의자가 세상을 장악하면 우리의 노고가 전부 헛수고로 돌아갑니다.”

케이 하커의 말에 장내가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맞소!”

“옳지! 하커 사가 그럴 이유가 없다!”

클레몬트 공작은 노기 어린 눈으로 케이 하커에게 삿대질을 했다.

“감히! 천한 평민의 아들에게 내 딸을 줬거늘!”

그러나 공작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더 많은 계란이 그에게 날아들었고 장내에는 공작을 당장 시가지에 매달라는 요구가 빗발쳤기 때문이었다.

“공녀인지 뭔지도 데려와! 공작의 아내도 데려오고! 당장!”

분노한 선동꾼의 목소리는 이내 뒤따라 흥분한 민중의 목소리와 합쳐졌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부모와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거대한 목소리 속에서 목이 졸리는 눈으로 케이 하커의 얼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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