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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4화 (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4화

통로 밖에서 높다란 경찰모에 검은 케이프를 두른 보비1)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중 경감이 궁전지기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있었다. 궁전지기가 고개를 갸웃하는 모양새를 본 엘리자베스는 직감했다.

여길 나가야 해.

물론, 아버지가 사회주의자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었다.

아버지는 결코 평등한 사회를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금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건 오로지 그가 가진 계급적 우위 덕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아버지가 경찰청에 잡혀간 것은 사실이었으니 아버지의 공장에 문제가 생긴 것은 확실했다.

아버지의 제철 공장.

자신과 케이 하커가 결혼하면서 몰락하던 왕족인 아버지가 하커 사로부터 뜯어낸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수확물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그러나 괜히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촐싹거리지는 않는 걸음으로 통로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차가 있을 정문을 향해 정원을 걸어갔다.

관목들이 자신을 감춰줄 수 있는 길로 걸어갔음에도 두 명의 경사들이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숙이고 걷되 멈추지 않았다. 만약 경사들이 신분증을 요구하면 뛰기 시작할 생각이었다.

정문 근처에 이르자 자신을 에스코트한 근위병이 다가왔다.

“부인. 알현을 거절당하셨습니까?”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근위병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곤경에 빠진 듯한 방문객을 도우려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친절함이 저주스러웠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지만 위급하고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는 병명이 뭐가 있지? 엘리자베스는 단번에 대답을 생각해냈다.

“사실 임신 초기거든요. 어지럽고 속이 좋지 않네요. 더 큰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지금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시늉을 해보였다. 그 모습에 근위병이 그녀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더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하, 그러시군요. 제 아내도 임신 초기에 입덧으로 큰 고생을 했답니다. 곧 나아지실 거예요. 남편 분께 과일을 많이 사다 달라고 하세요, 부인.”

케이 하커가 퇴근길에 과일을?

엘리자베스는 비웃음을 삼키며 재빨리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다행히도 근위병은 쫓아오지 않았다.

마차에 뛰듯이 올라탄 엘리자베스가 마부에게 말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

“벌써 알현을 마치셨어요? 윌리엄 경 댁에 들리시는 계획은요?”

메리가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에게 대답하는 대신 마부에게 소리쳤다.

“올 때보다 빨리 도개교를 통과하면 내년 겨울까지 고용계약을 연장해주마. 사람만 치지 않는다면 마차가 90도로 뒤집힌대도 뭐라고 하지 않겠어. 달려!”

“정말이요, 마님?”

마부는 상기된 얼굴로 묻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창문을 꼭 끌어안았다.

“이랴!”

마부의 세찬 말몰이와 함께 마차는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엘리자베스는 밖이 잘 보이지 않는 블룸 마차를 탔음에도 밖에 보비들이 보일 때마다 얼굴을 숙였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평소보다 보비들이 많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지금 엘리자베스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머니나 자신의 공녀 위치도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케이 하커였다.

그도 경찰청에 가지 않았나. 클레몬트 공작의 공장에 문제가 생겼다면 공장의 원 소유주였던 하커 사 역시 사회주의 사상과 결탁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귀족원과 왕실이 얼마나 하커 사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가. 그들은 분명 케이를 고신해서라도 문제 삼을 만한 일을 발견하고 싶어 할 것이었다.

“경찰청에도 들르지 않으시나요?”

메리가 멀어지는 노스 리오든의 풍경을 바라보곤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가지 않아.”

이럴 때 케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늘 그랬듯 사이 나쁜 부부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신흥 사업가층의 대표격인 하커 사와 몰락한 왕족의 상징인 클레몬트 가의 연합의 상징이 바로 우리 부부가 아닌가. 둘 사이가 나빠 보여야 하커 사와 클레몬트 가의 연관성이 떨어져 보일 것이다.

이 위기는 의외로 큰 일이 아닐지 모른다. 아버지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믿어야 했다.

케이 하커만 안전하면 다 괜찮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결혼 이후에도 케이 하커를 집안의 일원으로 인정하기 싫어했던 제 아버지 클레몬트 공작. 그리고 둘째 아들의 공장에 주는 돈도 동전 하나까지 일일히 장부에 기입하던 짠돌이 시부 로버트 하커.

그 둘이 케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케이를 제대로 지켜줄까?

“젠장.”

또 욕설이 엘리자베스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 케이 하커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원래 그가 자신에게 말한 대로 말이다.

“도개교가 너무 막히는데요, 마님.”

마부가 고용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을까 두려운 듯 툴툴거렸다.

“메리, 밖에 보비들이 보이는지 보고 와.”

엘리자베스의 말에 메리가 비틀거리며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목을 뺐다.

“보비들이 도개교 앞을 지키고 있는데요? 옴니버스2)를 포함한 모든 마차들을 전부 수색하고 있어요.”

누굴 찾는 걸까? 아니, 무엇을 찾는 걸까?

아버지의 공장에서 나왔다는 폭탄이나 잘 제련된 소총들일까?

어느 쪽이든 그들의 찾는 물건 내지는 인간에 자신도 들어가 있을 거라는 강렬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메리랑 같이 먼저 집으로 가 있어. 고용계약은 연장해주마. 넌 훌륭한 마부야. 그리고 도개교를 건널 때는 하커 사 얘기는 하지 말고 리오든 남부에 있는 귀족의 컨트리하우스로 간다고 말해라. 알겠니?”

엘리자베스는 마부에게 동전을 꺼내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마차 문을 열고 침착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마님!”

메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엘리자베스는 멈추지 않았다.

하일 강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하일 강변의 북쪽에서는 노동자들이 증기선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부품인 듯한 뭔가를 망치질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엘리자베스의 귓가를 괴롭혔다.

엘리자베스는 강 건너편 길의 끝에서 보비들이 검은 케이프 차림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하는 말들 중 몇몇 단어는 시끄러운 공사 소음 속에서도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로킨트 스트리트 저택으로! 하커 사…….”

“공녀의 신병을…….”

엘리자베스는 침착하게 뒷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보비들이 우르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그곳에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약간의 신물과 함께.

“우윽…….”

엘리자베스의 뱃속에서는 공포가 우글거렸다.

* * *

“남편을 도와줘요.”

엘리자베스가 바실리 스트리트 23번가의 문을 두드렸을 때, 윌리엄 조쉬는 풀어헤친 셔츠 차림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세상에, 엘리자베스 양. 아니, 하커 부인.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어요.”

엘리자베스는 무례하기 그지없게도 허락 없이 그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쉬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레이디. 이 시간에 신사의 집에 들어오시는 건 실례입니다.”

“아직 밤손님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엘리자베스는 응접실 문을 거침없이 밀어 열었다. 그러자 곧 한 무더기의 남자들이 조쉬와 비슷하게 땀에 찌든 셔츠 차림에 멜빵바지를 입고 타자기를 치다 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쓴다는 그 책의 불온함 때문인가요? 아나키스트 조나단 씨.”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앞에 조나단이라는 이름이 적힌 불온서적을 들이밀었다. 그 말에 조쉬의 표정이 굳어졌다. 타자를 치던 남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킷과 모자를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조쉬가 엘리자베스에게서 붉은 딱지가 붙은 서적을 빼앗아 들었다.

“제가 책을 쓴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평소 당신이 주필로 있는 신문의 기사와 뒷골목에서 발견한 무정부주의자를 위한 불온서적을 비교하니 몇 가지 단어들의 조합이 똑같더라구요. 그걸 기억해뒀다가, 오늘이 무정부주의자들의 회동이 있는 날이라는 그 불온서적의 내용을 떠올려서 급습한 거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쉬가 키득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웃지 않았다. 입안에서 쓴 내가 올라왔다.

이제 이 남자를 협박할 시간이었다.

“난 당신을 지금 신문이 떠들어대는 우리 아버지의 폭탄 테러에 가담한 아나키스트로 신고할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방 안의 책상으로 다가가 남자들이 타자기로 치던 종이를 집어 올렸다. 그러자 따라 들어온 조쉬가 한 발 늦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같은 거라는 생각은 이렇게 현명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순함이로군요. 우리는 서로 조금도 통하는 바가 없습니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요.”

엘리자베스는 남자들이 쓴 종이를 집어 들고는 나지막하게 읽었다.

“신도, 주인도 없다. 물론, 왕도 없다는 뜻이겠죠.”

엘리자베스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을 가리켰다.

그 순간이었다.

윌리엄 조쉬가 단숨에 그녀에게서 종이를 빼앗아들었다. 종이가 구겨지고 엘리자베스가 비명을 질렀다. 조쉬는 비틀거리는 엘리자베스를 그대로 몰아 방의 구석에 넣고 제 몸으로 그녀를 가두었다.

“웃기지 마, 엘리자베스. 겨우 그딴 종이 쪼가리쯤이야 빼앗고 불태우면 그만이지. 당신이 이미 그 종이를 본 게 문제라면, 당신의 눈을 파버리면 그만이고.”

조쉬가 주머니 속에서 날카로운 잭나이프를 꺼내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제 코 앞에서 뜨거운 숨을 내뿜는 조쉬를 노려보았다.

“당신의 비밀이 당신의 은밀한 고결함에서 나왔다는 내 생각은 온전히 틀린 것이었군요.”

“혁명은 고결하지 않아, 공녀님. 혁명은 붉지. 붉은 색은 피를 상징하고.”

짤랑!

엘리자베스는 차오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품 안에서 돈 주머니를 내던졌다. 그러곤 조쉬를 노려보며 말했다.

“혁명에도 돈이 필요하지. 돈의 힘 없이 세상이 바뀌는 꼴을 나는 본 적이 없어.”

이 말을 누가 했던가.

엘리자베스는 말을 다 마치고 나서야 그것이 케이 하커가 했던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돈의 힘 없이는 세상은 바뀌지 않아. 왕과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는 갔어. 이제 이 나라도 돈의 맛을 알아버린 거지.’

그때는 그가 과하게 물질주의적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의 말은 한 톨도 남김없이 사실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흘려들은 그의 말이 또 있을까? 그게 무엇이든 그를 반드시 경찰청에서 끌어내어 지난 세월 자신이 흘려들은 모든 말을 다시 그의 입으로 듣고야 말 것이다.

케이 하커, 그 건방진 자식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물건이었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은 결코 함부로 내버리지 않았다.

조쉬가 굴러다니는 현금과 동전을 보며 피식 웃었다.

“겨우 이 정도로?”

“내 남편은 케이 하커야. 남편 이름으로 하커 사의 어음을 써주지. 만 파운트. 남편이 나오면 그 두 배를 써주겠어.”

“내가 돈 따윈 필요 없다고 하면 어떡할 거지?”

조쉬가 피식 웃으며 잭나이프로 엘리자베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돈 말고 다른 걸 원한다고 하면?”

엘리자베스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조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거래는 할 생각이 없어요.”

“억지로 가질 수도 있지.”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잭나이프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앞섶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했다. 이 남자를 안심시키는 척하고 경찰청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귀족원의 유력 인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해볼까? 애초에 윌리엄 조쉬를, 사교계의 마당발을 만나러 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쓰레기 자식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나의 자존심까지 억지로 가질 순 없어요. 난 케이 하커의 아내고, 그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변하지 않아요.”

그 말에 조쉬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조쉬는 잭나이프를 거두고 제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잠시 웃었다.

그동안 엘리자베스의 고민거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저 쓰레기 자식의 얼굴을 어떻게 곤죽으로 만들어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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