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3화
방 안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메리와 이불에 돌돌 말린 채 웅크리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술이 안 깬 거야?”
케이는 의아한 눈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갔다. 메리는 두 부부의 어색한 모습을 더 이상 관망하기 힘든 듯 자리를 떴다.
“……나 자는 중이야.”
웅크린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자는 사람은 말 못 해. 일어나 봐. 시간이 없어.”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홱 이불을 걷고 앉아서 케이를 노려봤다.
“이혼이라면 절대 해줄 수 없어.”
그 말에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혼?”
“그래. 내가 어제 화가 나서 말을 격하게 했기로서니…….”
하지만 말만 격하게 한 게 아니잖아.
엘리자베스는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케이의 뺨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무의식중에 뺨으로 손을 뻗자 케이가 그 손을 쳐냈다.
“아, 그거. 걱정할 것 없어. 네가 이 부부 침실에 윌리엄 경을 데리고 와서 뒹굴었대도 나는 널 놔줄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무뢰배. 양아치 같은 녀석.
수많은 욕설이 엘리자베스의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왜.”
“그야 넌 내 아내니까.”
“나와 결혼하기 싫어했잖아.”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약혼이 성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엘리자베스의 20살 생일날.
모두의 앞에서 그녀가 케이와의 약혼을 허락해달라고 로버트 하커에게 간청한 그날, 케이는 일그러진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저 재수 없는 공녀 아가씨랑?’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랬지만, 이제 늦었어. 돌이킬 수 없어졌잖아. 난 내 손 안에 들어온 건 허투루 버리지 않아.”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말을 해석하는 사이, 케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진 재떨이를 들다가 손을 베였다.
“……케이!”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일어나려고 할 때,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되었다는 듯 손짓을 해보이곤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붉은 실이 수놓아진 손수건.
주워오랬다고 정말 주워온 건가? 아니면 케이의 말대로 케이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건 버리지 않는 습관을 가진 걸까.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케이가 화장대에 기대어 손에 난 상처를 손수건으로 엉망으로 감은 후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케이가 말했다.
“클레몬트 공작이 리오든 경찰청에 잡혀 갔어.”
엘리자베스는 이어지던 상념이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짧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케이는 말을 이었다.
“참고인 조사 겸 지금 당장 가봐야 해.”
클레몬트 공작? 아버지가? 아버지가 경찰청에 잡혀갔다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리바리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냥, 사소한 오해.”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취로 인한 것인지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그걸 본 케이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담배를 깨진 재떨이에 비벼 끄고 침대맡에 그녀를 앉힌 뒤 나란히 그 옆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어린 아이가 어미 품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에 케이의 눈빛이 오랫동안 그녀의 가녀린 손에 머물렀다.
“나는 이 나라에서 사소한 오해로 공작이 경찰청에 잡혀가는 걸 본 적이 없어. 나도 같이 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가서 뭘 할 건데?”
“오해가 있다면 풀도록 돕고 안 되면 왕실에 가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실지도 확실치 않은 국왕 폐하께 뭔가를 청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왕실 얘길 꺼낸 건 그저 아버지가 말버릇처럼 왕실을 들먹이는 버릇을 이어받은 탓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케이가 단숨에 치고 들어왔다.
“것 봐.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하지만…….”
“하커 사에서 클레몬트 공작 명의로 옮긴 공장에서 문제가 좀 생겼어. 별 거 아닌 일이지만 넌 공장이나 기계 따윈 알지도 못하잖아. 그냥 평소처럼 집에서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심심하면 또 이런 거에 수나 놓고 있어. 네 말대로 이 나라에서 공작 전하가 사소한 오해로 무슨 큰 형벌이라도 받게 되는 일은 없으니까.”
케이는 손을 들어 핏물이 스며든 손수건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소매를 잡았던 손에서 힘을 뺐다.
그래. 케이의 말대로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국왕의 사촌이다. 사소한 오해가 아니라 생각보다 큰 일이 얽힌 거라도 아버지만은 안전하게 나올 거다.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업가인 로버트 하커와 사돈이기도 하지 않은가.
장원마저 쫄딱 잃은 망한 공작과 귀족들에게 멸시 받는 사업가의 만남.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의 결혼에 그런 배경이 있는 걸 늘 저주스러워했지만 지금은 그게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리고 케이 하커 역시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물건은 절대 쉽게 내버리는 일이 없는 남자라고 스스로 호언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아마도 그 ‘물건’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아내일 것이다.
“집에 딱 붙어 있으라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잠시 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돌아왔다.
엘리자베스가 그를 의아하게 보자 그가 말했다.
“키스하자.”
케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왜 갑자기?”
“네가 딴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네가 그랬잖아. 나랑 키스하면 다른 생각이 안 난다고.”
케이 하커는 왜인지 거칠어진 숨을 뱉으며 강렬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가슴께가 조여드는 느낌을 받으며 그런 케이의 시선을 피했다.
“좋아.”
엘리자베스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케이의 입술이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덮쳐왔다.
케이의 손가락이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엘리자베스가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케이가 자신의 쪽으로 우악스럽게 끌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밀려오는 케이의 체취를 이기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짧지만 강렬한 키스가 끝나고 번들거리는 입술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떨어졌을 때, 케이는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
“경찰청에서 돌아오면 같이 콧바람이라도 쐬자. 앰버가 그러는데 켈토에 멋진 저택이 많다던데. 삐까번쩍한 번화가 상점도 많다더군.”
앰버 플래스, 그 어여쁜 가수와 나눈 이야기가 켈토에 있는 멋진 저택에 관한 이야기였을까? 케이 하커는 정말 그 저택에 자신과 가고 싶어서 그런 얘기를 한 걸까? 아니면—
그만 생각하자.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 케이가 하는 말이 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엘리자베스는 체념했다.
“거기에 가면 그 우스꽝스러운 페티코트를 열 벌쯤은 사줄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의 눈빛에서 아주 짧게 내비친 애정 같은 것이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쥐를 잡기 위한 틀에 집어넣은 치즈처럼, 케이의 눈빛에 담긴 애정도 그녀를 궁지로 내몰 덫인 것만 같아서.
* * *
케이 하커가 대문을 나선 후, 엘리자베스는 얼른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메리를 불러 케이 하커가 우습게 생각하는 속치마와 페티코트를 입고 화려한 치장을 했다. 케이가 주었던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머리핀도 달았다.
“나리께서 집에 계시라고 하셨잖아요.”
“그냥 잠깐 답답해서 바람만 쐬고 왔다고 하면 돼.”
엘리자베스는 보닛을 매며 메리에게 머리 리본을 다시 봐달라고 말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까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일단 마차를 최대한 빨리 몰아 컬로든 궁에 갔다가 폐하의 알현을 신청하고 실패한다면 그 근처에서 윌리엄 조쉬를 만나 소식을 듣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수도의 신문에 클레몬트 공작과 관련된 짤막한 기사라도 실렸는지 확인도 할 수 있다면 일석이조다.
물론 로킨트 스트리트 저택에도 신문이 배달되곤 했지만 오늘자 신문은 이미 케이가 들고 갔는지 없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그의 말은 틀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보다 귀족들의 사교모임 인맥이 많았고 그들이 경찰청 내부 소식은 몰라도 국왕 폐하의 심중 정도는 꿰뚫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케이는 사소한 오해라고 했지만 케이 하커가 경찰청까지 참고인 조사를 가야 할 만한 일이라면 간단한 문제가 아닐 성 싶었다.
집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마부를 불러 주며 말했다.
“나리께서 오늘은 마님이 가능한 밖으로 다니지 마시게 해달라고 하셨는데—”
“당연히 내가 그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겠지, 집사?”
엘리자베스의 말에 집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빨리 갔다가 돌아오는 게 나아. 메리도 같이 가잖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 넣어둔 돈주머니를 확인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스스로 수중에 품고 다녀본 액수 중엔 가장 많았다.
귀족들이 돈보다 명예를 중시한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돈을 갈망했다. 스스로 돈을 벌기엔 너무 나태할 뿐이었다.
어린 마부가 제법 힘차게 말을 몰았다.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다른 마차와 마주치거든 이 안에 공녀가 타고 있다고 하고 비켜줄 것을 요구해. 콧대 높아 보이는 신사의 마차라면 이 안에 케이 하커가 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도 좋다. 내 말 알겠니?”
“알겠어요, 마님!”
공녀로서의 명예를 내세우는 것도 하커 사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결혼 이후 한 번도 한 일이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엘리자베스야말로 집사와 메리보다 훨씬 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다시 로킨트 스트리트의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덜그덕! 덜그덕! 광란의 질주를 시작한 마차 안에서 메리는 비명을 질러댔고 엘리자베스 역시 엉덩이를 자극하는 둔통에 얼굴을 거의 펴지 못했다.
그 사이 마차 창 너머로는 도개교가 빠르게 지나갔다. 삽시간에 더러운 매연을 뿜어내는 로킨트 스트리트의 공장지대가 멀어졌고 번잡스럽고 화려한 노스 리오든 가까워졌다. 그 증거로 몇몇 노숙자들이 마차에 들러붙어 구걸을 했지만 어린 마부는 제법 훌륭하게 하커 사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들을 쳐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차의 속도는 느려졌고 마차끼리 양보를 놓고 시비가 붙은 대치 상황 앞에서는 우회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막힌 길을 섰다 갔다 하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두 개 정도의 신문을 어린 소년에게 샀고 후하게 값을 치렀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섰다.
“다 왔어요, 마님. 컬로든 궁입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마차 문이 열리자 근위병이 걸어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폐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레이디의 존함이……?”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하커. 그게 제 이름입니다.”
평소라면 엘리자베스 하커라고 스스로를 칭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녀 스스로 자신을 클레몬트라고 칭했다.
레본에서 여자의 처녀 시절 성은 남편 성을 따르며 없어지기 마련이지만, 아버지는 엘리자베스가 자본가에게 시집을 가더라도 그녀가 나을 아들은 반드시 클레몬트의 성을 따르게 하고 싶어서 귀족원에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게 한심한 일이라고 늘 생각해왔지만 오늘은 클레몬트의 이름을 이용해야 했다.
“알현실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기다리시면 궁전지기가 곧 공녀님의 알현이 가능한지를 알려드릴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와 어린 마부를 마차에 둔 그녀는 안내를 받아 혼자 알현실로 갔다.
거대한 정원과 분수대를 통과하는 시간이 엘리자베스에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국왕 폐하가 자신을 정말로 만나주실까?
혼자 이렇게 알현을 청해보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왕의 조카라곤 하나 폐하의 생신연에 종종 줄을 길게 서서 아버지가 준비해둔 선물을 벌벌 떨며 내밀어나 본 게 전부였던 그녀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거대한 궁전의 한 귀퉁이에 있는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난롯가에 있는 소파에 앉은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자신이 손 안에 바스락거리는 신문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신문을 펴보았다. 신문을 몇 자 읽어 내리던 그녀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거기엔 엘리자베스에게는 낯선 단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클레몬트 공작 소유의 공장에서 제조된 불법 폭탄, 사회주의 사상의 결과물?]
[클레몬트 공작, 왕실과 귀족원을 향한 폭탄 테러 모의 혐의로 체포!]
폭탄, 사회주의, 테러, ……처형.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떨어뜨렸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