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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화 (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화

마차를 탄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리오든 북부에 있는 세디온 후작의 타운하우스에 도착했다.

귀족들의 타운하우스가 거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 화려하고 귀족스러운 느낌이 살아 있는 리오든 북부. 리오든 북부는 공장지대로 이루어진 남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케이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녀가 이 풍경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로킨트가 아니라.

아니, 어쩌면 그녀는 그저 자신보다 위에 있는 게 언제나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케이가 삐뚤어진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세디온 타운하우스의 집사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도 용해시키지 못한 채 곧 2층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환한 미소를 띠고 귀족들 사이로 금세 스며들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며 딱 붙는 신사용 바지와 재킷을 입고 창가로 갔다.

신사들이 곧 케이 앞으로 모여들었다.

“케이 씨! 오랜만이군요. 좀처럼 클럽에는 오시질 않으시니, 원.”

케이가 볼 때는 우스꽝스럽기만 한 톱햇(Top hat)을 든 신사들이 케이에게 친근한 척 다가왔다.

“공장 일이 생각보다 바쁩니다.”

케이는 제법 신사처럼 바른 자세로 귀족들을 맞이했다.

그러자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귀부인들이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부군이 참 잘생기셨어요. 좋으시겠어요. 왕실에서 시부께 국채를 갚은 업적을 높게 사 ‘경’의 칭호를 내리신다지요? 그럼 자연스럽게 케이 씨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칭찬처럼 들리지만 칭찬이 아니다. 케이 하커가 제대로 된 귀족도 뭣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표정관리를 했다.

왕실과 귀족원이 증기기관으로 광산 채굴을 한다며 외국에 국채를 뿌리기를 수년, 그 어마어마한 빚을 갚은 것이 바로 케이 하커의 아버지, 로버트 하커였다. 귀족들과 왕실은 그에 감사해해야 마땅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신흥 사업가층, 소위 자본가층을 대변하는 로버트 하커를 더 이용하려 들었다. ‘경’ 칭호라든지, 귀족들 사이의 인정이라든지 하는 미묘한 미끼를 사용해서 말이다.

로버트 하커에게 내려지기로 한 ‘경’ 칭호도 벌써 수년 째 귀족원의 승인을 받지 못해 밀려나는 일 중 하나였다.

“감사해요, 부인. 하지만 경 칭호가 아니더라도 아버님께서는 이미 명예로운 분이시고 애국을 위해 하신 일에 대가를 바라신 건 아닐 거랍니다.”

엘리자베스가 의연하게 답하자 귀부인들이 과장된 태도로 응답했다.

“아, 물론이죠. 당연해요.”

“하커 사의 명예야 모두가 모를 리가 있나요.”

엘리자베스는 부채 뒤에 숨겨진 그녀들의 비소를 느끼며 다시 케이를 돌아보았다.

케이가 흘끗 자신을 보았다. 그 눈빛에 감도는 미묘한 냉기를 그녀는 느꼈다. 그 냉기의 이름은 경멸이었다.

자신의 남편은 자신을 경멸한다.

로버트 하커에게 경 칭호니 애국 훈장이니 뭐니 하는 것을 미끼로 돈을 뜯어내던 왕실처럼, 자신도 케이에게 귀족가의 사위가 되는 것을 미끼로 자신과의 결혼을 종용했으니까. 자신과 지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귀부인들이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커 부인!”

그녀가 시름에 잠겨 있을 때 한 남자가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윌리엄 경.”

엘리자베스는 신사 정장에 짧은 재킷을 갖춰 입은 남자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윌리엄 조쉬. 그는 그녀가 처음 수도 사교계에 입문할 때 큰 도움을 주었던 조쉬 자작가의 차남이었다. 그는 수도 귀족 특유의 허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리오든의 정세에 능통했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요? 그렇게 표현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어요, 레이디.”

윌리엄이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 손을 내주었다. 그러자 곧 윌리엄이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수도 신사들의 과도한 몸짓에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때 마침 타운하우스의 안주인이 지나가다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어머, 두 분이 꽤나 친밀해 보이시네요. 그럼 오늘의 페어는 두 분으로 하지요.”

“어, 그게…….”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를 바라보았다.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이왕이면 남편과 페어가 되어 식사을 하고 싶은데—

그러나 그녀가 케이를 보았을 때 케이는 고개를 돌리곤 복도로 나가는 중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귀족들이 또 그 고귀한 자존심을 건드린 것인가?

살짝 엿본 그의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았다.

“잠시만요.”

엘리자베스는 안주인과 윌리엄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케이 하커가 사라진 곳으로 뛰어갔다. 그는 밖으로 가는 게 분명했다. 엘리자베스는 복도에 서서 창문 밖으로 마차가 사라졌는지를 살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마차 앞에 서 있는 빨간 드레스의 여인이 띄었다. 익숙한 실루엣의 여자는 벨벳 장갑을 낀 손으로 기다란 담뱃대를 들고 마차에 기대어 있었고, 그 앞에는…….

“케이 하커!”

케이 하커가 서 있었다.

여자와 꽤나 다정한 모습으로.

곧 두 남녀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 오늘도 아름답군요. 안 그래도 부군과 당신의 미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담배를 든 여자, 앰버는 엘리자베스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앰버 플래스.

켄터베리 홀의 유명한 가수인 앰버는 케이와 종종 왕래가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앰버가 홀에서 가깝지도 않은 여기에 왜 왔을까. 케이를 만나러?

과도한 해석일 것이다. 우연이겠지. 하지만—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진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그랬잖아. 모르는 척하지 마.”

“헛소리.”

케이는 곧 앰버의 모습을 뒤로 하고 타운 하우스 안으로 들어왔다.

2층으로 올라온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보석이 박힌 머리핀을 내밀었다.

“앰버가 켈토에 갔다가 우연히 사왔다는데.”

“거짓말이에요! 저 남자가 사다달라고 했다구요!”

마차 앞에 서 있던 앰버가 케이의 말이 다 들린다는 듯이 소리쳤다. 말을 마친 앰버는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는 케이를 보더니 총총 달아났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앰버의 뒷모습을 보다가 케이가 내미는 머리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케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가 부탁한 건 아니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난 물건에 화풀이하는 쫌팽이는 아니니까. 네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든 말든 나는 물건은 받는 사람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에 들린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앰버가 여기에 온 이유에 대한 의혹을 풀고 싶었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린 보통 부부들과는 달라.’

케이가 오늘 한 말은 지난 6개월간 그가 했던 어떤 말보다 더 나빴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잠시 뭔가를 참는 듯 거친 숨을 뱉어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쁜 건 좀 풀어. 결국 네 맘대로 안 된 게 뭐야? 여기 와서 네 들러리 노릇도 하잖아.”

“들러리?”

엘리자베스는 이 자리에 케이를 위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케이는 뭘 했는가. 손수건을 찢어서 버리고 다른 여자와 담배를 피우며 시시덕거리고, 심지어 그 여자가 준 선물을 자신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선물은 받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 네가 귀족 신사들이랑 시시덕거리는 동안에도 나는 가만히 있잖아.”

“시시덕이라니? 설마 윌리엄 경을 두고 하는 말이야? 그 사람은—”

윌리엄 ‘경’이라는 말에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고 곧 케이는 특유의 조소를 입에 건 채 말했다.

“소문난 난봉꾼이지. 클럽에 올 때마다 상대가 바뀐다고 하더군. 그 중 하나가 너였을지 누가 알겠어.”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참지 못하고 손을 날렸다. 공기 중에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케이의 턱이 아주 약간 돌아갔다.

“나한테 그따위로 말하지 마. 케이 하커.”

케이가 분노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돌아봤을 때 엘리자베스의 눈 밑은 이미 빨갛게 부어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뺨을 때린 오른손을 놀란 눈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나는…… 나는…….”

그 순간, 종이 울리고 안주인이 맞춘 페어에 맞춰 귀족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약간 맺힌 눈물을 서둘러 소매로 닦아 숨겼다.

* * *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잔뜩 취했다.

그녀의 페어가 된 윌리엄 조쉬는 그녀가 취하는 게 꽤 귀엽다며 술을 계속 권했고, 마침내 케이 하커가 분노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일으켜 마차로 데려갔다.

두 사람은 마차 안에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엘리자베스가 지친 얼굴로 케이에게 이렇게 말한 것 외에는.

“내 마음이 네가 가져다버린 손수건 같았으면 좋겠어. 그 천 쪼가리처럼 네가 갈가리 찢어서 갖다버릴 수 있는 거면 좋겠다고.”

“……내일 얘기해.”

“매일 매일, 내일 얘기하자는 말로 6개월이 지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난 널 사랑하고 넌 날 사랑하지 않지.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고.”

그 말에 케이 하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몸부림치는 엘리자베스를 마차에서 끌어내리듯 어거지로 안아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메리와 집사가 열어주는 방문으로 들어간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를 그녀의 침실에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가 붉어진 얼굴로 케이 하커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

“2시간 후면 공장으로 가야 해.”

엘리자베스는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날 피하는구나.”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안달 내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서 이 저택에 주저앉힐 수 있을까.

케이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넌 날 사랑하지 않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고? 케이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날 사랑한다는 말은 네가 너 자신에게 하는 수많은 거짓말 중 하나야. 속치마로 가짜 엉덩이를 만드는 귀부인들처럼 넌 널 속이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과음으로 인해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그럴 기운조차 남지 않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 그런 거면 좋겠다. 나도…….”

나도 너를 향한 이 마음이 전부 가짜면 좋겠어.

“하지만 아니면, 아니라면…… 난 이제 그만하고 싶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뭐라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이미 몽롱해진 엘리자베스의 정신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 엘리자베스는 극심한 두통 속에서 눈을 떴다. 목은 타는 것 같았고 속은 증기선 위에 타고 있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젠장…….”

“마님, 예쁜 말을 쓰셔야 아기님이 찾아오신답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잔소리를 들으며 겨우 겨우 테이블 앞에 앉아 수프를 떠마셨다.

아기님은 무슨. 끔찍했던 첫날밤 이후 두 사람이 합방한 날은 한 손에 꼽았다.

엘리자베스는 흘끗 복도를 내다보며 말했다.

“케이는?”

“지금이 몇 신줄 아세요? 당연히 출근하셨죠.”

엘리자베스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숙취고 뭐고 입맛이 딱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로 향했다. 거기엔 케이가 주로 쓰던 유리 재떨이가 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난동을 부렸니?”

“네. 새벽에 깨셔서요.”

“세상에.”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유리 재떨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케이가 꽤나 좋아하는 거였는데.”

화해하긴 다 글렀네.

엘리자베스는 절대로 붙일 수 없을 재떨이의 날카로운 표면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자신이 뱉은 모든 말을 후회했다. 그의 뺨을 때린 것도, 헤어짐을 암시하는 말을 했던 것도. 케이 하커라면 분명 이때다 하고 이혼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름다운 앰버 플래스에게 가버리겠지.

“메리—”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철로 된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집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엘리자베스가 당황한 얼굴로 메리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젯밤의 일을 무마시킬 말들을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이혼당하는 걸까?

그때 엘리자베스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술은 다 깼나?”

케이 하커가 침실 안에 들어왔을 땐 엘리자베스는 이미 돌돌 말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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