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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화 (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화

0장

늘 그랬듯 그날 두 사람의 싸움 역시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싸움의 시발점을 찾자면 그날은 손수건이었다.

그 전날 오후. 엘리자베스는 귀부인들의 사교모임에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사실 그 사교모임을 싫어했다. 귀부인들이 왕정이 건재했던 백 년 전 사람처럼 구시대적인 발상을 늘어놓는 것도 싫었지만 더더욱 싫었던 건 그녀들이 집요하게 떠드는 남편 자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염장이 주목적인데다 대부분 사실이 아닌 그녀들의 자랑을 대체로 흘려들었는데 그날은 한 귀부인의 자랑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우리 여보는 제가 수놓아준 손수건을 언제나 가지고 다녀요.”

아내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며 남들 앞에서 자랑한다고도 했다.

손수건이라니. 겨우 그런 천 쪼가리에 어떻게 마음을 담는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집에 오는 내내 처녀시절 배웠던 손수건에 수를 놓는 법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 하커에게 손수건을 주면, 케이도 그 귀부인의 남편처럼 아내가 준 것이라고 말하며 공장사람들에게 자랑할까? 식사 때마다 그걸로 입을 닦기도 하고?

말도 안 돼.

요 근래, 아니, 결혼하고 내내 케이 하커는 세 끼를 거의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먹었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녀석이 집에서 양고기 스테이크와 신선한 채소를 먹는 대신 노동자들과 빵과 야채가 곤죽이 된 스프를 먹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너랑 매일 이렇게 식사를 하다간 위장병이 생기겠어.’

신혼 첫날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말다툼 끝에 식사자리를 떴다.

그날 이후 케이는 늘 싸우기만 하는 자신과 식사하는 것을 피해왔다.

사교모임이 끝난 후, 엘리자베스는 리오든 북부에서 남부로 돌아오는 도개교 위에서 그때 케이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그 표정을 생각하면 케이 하커와 자신의 사이에 도무지 가까워질 수 없는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거리감을 지우기 위해 엘리자베스는 그날만큼은 케이와 꼭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케이는 그날도 저녁 시간은커녕 엘리자베스가 잠들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바빠.]

엘리자베스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 케이의 공장에 갔던 집사는 간단한 쪽지만 가지고 왔다.

다음 날 엘리자베스가 일어났을 때 케이는 이미 아침을 거르고 출근한 채였다.

평소라면 케이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날은 달랐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거른 채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3층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잘 쓰지 않는 손수건과 붉은 실, 바늘을 서랍에서 꺼내 들고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이 소파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두 사람의 신혼집이 위치한 리오든 남부, 로킨트 스트리트가 끝까지 보였다.

로킨트는 엘리자베스가 나고 자란 쉐필드와도, 왕궁이 있는 리오든 북부와도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곳에는 쉐필드처럼 한적한 들판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는 농노들도 없었고 리오든 북부처럼 잘 차려 입은 채 화려한 거리를 활보하는 신사숙녀들도 없었다.

로킨트에는 판탈롱에 다 해져가는 카르마뇰을 입고 줄담배를 피워대는 노동자들만이 있었다. 하커 공장에서 제공하는 같은 색, 같은 디자인의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

엘리자베스가 로킨트 스트리트에 살게 된 지는 벌써 6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는 공장의 노동자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노동자들은 농노와는 달랐다. 그들은 하커 공장에서 일했으나 하커 가문에 대한 존경심도 하커 사의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나고 자란 쉐필드는 꽤나 큰 장원이었고, 왕실의 직계 사촌인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클레몬트 공작은 그곳의 왕처럼 군림했다. 쉐필드의 농노들은 공작의 딸인 자신을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수그리고 옷깃이라도 스칠까 피해 다녔다.

숲과 초원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쉐필드는 그런 곳이었다. 매연과 안개로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알기 힘든 리오든과는 다르게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장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참으로 아름다우며…… 

지긋지긋한 쉐필드.

농노들은 어린 엘리자베스를 피해 다니고 가족들은 초상화 속 왕족처럼 굴며 아무리 달려도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는 가까워지지 않는 지긋지긋한 아버지의 땅.

어린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부턴가 잠에서 깨면 늘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동이 다 트기 전에 저 끝에서 무언가 대단하고 소란스러운 것이 나타나 이 지긋지긋한 쉐필드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주길 기대하며.

그러다 4년여 전 공작부부를 따라 수도로 왔다.

더럽고 번잡스러운 수도의 풍경은 쉐필드와는 전혀 달랐다. 시골 귀족 영애였던 엘리자베스는 쉐필드를 벗어나자 두려움을 느꼈고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마차에서 내리려다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때, 한 소년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귀족 아가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것도 혼자 못하는군.”

갈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볼에는 기계에 바르는 유제가 묻은 소년. 리오든의 하일 강처럼 더럽고 지저분하지만 눈빛에는 생기가 살아 있는 소년. 농노들은 옷깃하나 스치지 못한 자신의 손을 감히 잡아채는 건방진 자식.

그 소년을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녀의 입안에서는 수많은 단어가 오고갔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건 오로지 이 말뿐이었다.

“뭐라고? 알아듣지 못했어. 다시 말해줄래?”

멍청하게도.

그 순간, 케이 하커가 코웃음 치는 것을, 촌뜨기 공녀를 비웃는 표정을 보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미 그에게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내가 어린 날 지평선 너머를 끝없이 바라보며 기다리던 녀석이 바로 너구나.

대단하고 소란스러운, 나의 구원자.

케이 하커.

그 어린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귀족 아가씨는 같은 나라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나?”

* * *

케이가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엘리자베스는 무려 6시간 동안 케이의 이름을 손수건에 수를 놓는 중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손수건 끄트머리에는 피가 살짝 물들어 있었다.

“자해행위를 하는 중인 거야?”

퇴근하자마자 그걸 본 케이 하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녀석은 오늘도 통이 넓은 판탈롱 차림이었다. 로킨트 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작업복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아침마다 챙겨 놓는 딱 붙는 신사용 바지는 쳐다 보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그 꼴이 보기 싫어 잔소리를 했겠지만 오늘 그녀는 기대감 넘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한테 줄 손수건에 수를 놓는 중이야.”

그 말에 퇴근하자마자 위스키 병을 집어든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케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한테 손수건이 왜 필요하지?”

“신사들에겐 모두 손수건이 필요해. 더러운 걸 만지면 손을 닦아야 하잖아.”

“아, 이를테면 기계의 녹 같은 거?”

케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 것을 느낀 엘리자베스가 손수건에서 시선을 옮겨 그를 보았다. 벽난로에 몸을 기댄 채 위스키를 병째 마시는 케이의 눈에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또 뭔가 케이의 자존심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

“식사를 하다가 잼이 묻어서 닦아야 할 수도 있지. 끈적거리는 손으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엘리자베스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6시간 동안이나 남편에게 줄 손수건에 수를 놓은 지금은 더더욱.

“그렇겠지. 귀족 나리들께서는 노동자들처럼 숯 검댕을 묻히거나 음식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니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어지는 케이의 말에도 엘리자베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에 수를 놓는 일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다음 순간, 바늘에 찔려 피가 나기 전까지는.

“아!”

엘리자베스의 비명소리가 들리자마자 케이는 벽난로에서 소파까지 단숨에 건너왔다. 그러곤 어렵사리 수를 놓은 손수건을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뺏어서 던지곤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챘다.

“잘 하는 짓이야. 안 하던 짓을 하니까 탈이 나지.”

케이가 빈정거리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거침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엘리자베스는 땅바닥에 떨어져 케이의 구둣발에 짓밟히는 손수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소리를 질렀다

“당장 돌려줘. 이제 묶기만 하면 됐단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원망스럽게 보며 소리쳤다. 케이 하커는 그 말에 불쾌한 얼굴로 그녀의 손에서 입술을 떼며 손수건을 집어 올렸다.

“대체 이딴 걸 왜 하는 건데?”

“그야…….”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를 올려다보았다.

뭐부터 얘기해야 하나. 어젯밤, 사교모임에서 또 귀부인들의 남편 자랑을 듣고 왔다는 얘기? 그녀들의 자랑을 들으면 늘 싸우기만 하는 우리 부부 생각이 난다는 얘기? 그래서 이렇게 손수건에 수를 놓아 선물하면, 그리고 그걸 네가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 조금이나마 우리도 다른 부부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 같아 안도가 될 것 같았다는 얘기?

엘리자베스는 그 모든 얘기를 이렇게 축약했다.

“널 좋아하니까. 내 마음을 담아서 주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평소의 삐뚜름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선물을 주느라 식사도 안 하고 자해행위를 하는 게 네 마음이야?”

케이 하커는 테이블에 그대로 놓여있는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메리가 두고 갔나? 인기척을 못 느꼈는데.

“그런 거라면 필요 없어.”

케이 하커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표정을 보며 기분이 씁쓸해졌다. 케이는 왜 이런 얼굴을 할까?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케이는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을 했다. 마치 그녀의 사랑이 창피하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는 황망해진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도 보통 부부들처럼…….”

그러나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케이가 말했다.

“우린 보통 부부들과는 달라. 알고 있잖아.”

“뭐가 다른데? 너는 하고 싶지도 않은 결혼을 내가 공작가의 힘으로 억지로 강요했으니까?”

케이는 대답 대신 그녀를 똑바로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눈에 선 핏발이 슬픔이 아니라 분노에 의한 것이라고 케이가 생각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덧붙였다.

“건방진 자식.”

그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삐뚜름한 얼굴이 더 삐뚤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이럴 때 녀석의 머릿속엔 대체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궁금했다. 상처 받았을까? 이 자식도 나에게 상처라는 걸 받기는 하는 걸까?

“그래. 우린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는 부부니까. 그러니까 이런 건 필요 없지.”

케이가 들고 있던 손수건을 찢어버렸다. 공장에서 직접 거대한 면포를 옮기는 거구의 남자의 손에 손수건은 단숨에 휴지조각이 되었다. 케이는 그 휴지조각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너……!”

엘리자베스는 시뻘게진 눈으로 창가로 달려갔다. 손을 뻗었지만 이미 손수건은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케이 하커를 기다리며 행복하고 설레었던 시간이 손수건과 함께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자다가 찬 물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새파래진 얼굴로 케이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케이의 거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주워 와! 당장!”

엘리자베스가 더 표독스러운 말을, 케이에게 더 상처가 될 법한 말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메리였다.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주인 나리. 마님.”

아마도 부부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끝나길 기다리다 못해 노크한 것이리라.

엘리자베스는 눈이 시뻘게진 채 케이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세디온 후작의 디너파티에 초대받은 날이었다. 가지 않으면 또 케이 하커의 건방지고 무례한 성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돌 것이다. 귀족들의 매너를 모르는 저급한 노동자라서 파티 매너를 모르니 오지 않은 거라고들 하겠지.

케이는 그런 귀족들의 뒷담화에 좀처럼 신경 쓰는 법이 없었으나 엘리자베스는 케이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자꾸만 퍼져나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 거지 같은 귀부인들의 모임에도 계속 가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문 밖의 메리에게 말했다.

“1분만 있다가 들어와줄래?”

“네, 마님.”

메리의 대답을 들은 엘리자베스는 매서운 눈으로 케이의 판탈롱을 가리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갈아입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비꼬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 예. 귀부인께 어울리는 신사가 되어야죠.”

엘리자베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케이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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