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 북극의 빙하처림
총관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아까부터 시종 신경을 건드리는 남궁천…… 아니, 진천랑이다.
총관이 뺨을 부들거리며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어이, 진천랑. 예전부터 느꼈지만 자네는 참 오지랖이 넓어. 그 오래전 빙궁의 무공을 손봐준 것까진 좋았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만 얌전히 기다리시게.”
“싫어, 이 씹새끼야.”
“주둥이가 험하군.”
“너도 알다시피 난 거친 인생을 살아온 남자다. 달콤한 말은 애초에 할 줄을 모르는 몸이지.”
“기어이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어야겠다는 건가?”
“말했다시피 내가 빚지곤 살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리고 네가 날 알아본 이상 이미 내 일이 되었다. 어때? 지금이라도 주둥이를 열든가? 아니면 더 처맞고 열까?”
피식.
총관이 조소를 짓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등짝에 천마상 하나 달았다고 정말 천마라도 된 줄 아는군.”
“뭐, 그 비슷한 수준은 된 것 같은데?”
“그럼 어디 한 번 시험해 보지!”
파앙!
총관이 바닥을 차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쉬이이이잇!
총관이 든 검첨이 남궁천의 심장을 향해 지체 없이 날아들었다.
쫘자자자작!
검첨에서부터 결빙이 맺히면서 강기와 함께 곧게 뻗어간다.
남궁천은 피하는 대신 그대로 바닥을 차면서 앞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쩌저저저정!
남궁천의 검봉이 그대로 상대의 검봉과 정확히 맞부딪쳤다.
콰파파파파파!
결빙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면서 주변 전각을 휩쓸었다. 거기에 기풍까지 더해지니 마기와 함께 눈보라가 휘날리며 깨진 얼음 조각이 마구 날아간다.
따당! 땅! 퍼퍼퍼퍽!
연신 금속성과 함께 결빙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침내 두 사람의 검신이 서로 교차한 순간!
쩌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사방으로 삭풍이 불어갔다.
휘오오오오오!
남궁천과 총관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리는 중에도 서로를 빤히 노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총관은 남궁천 뒤에 나타난 천마상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겉모습만 그럴싸한 건 아니란 거군. 한데 어찌 진천랑이 천마신공을 쓴단 말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그 답을 알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은마령이기에 마공을 일절 익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어떠한 마공도 천마신공을 익힐 수는 없으니까.
‘설마 백묘가 천마신공을……?’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백묘가 남궁천에게 붙잡힌 건 의외지만, 그녀가 천마신공에 대해 알 리가 없다.
어쨌거나 남궁천은 천마신공을 익힌 몸이다. 게다가 빙궁의 무공까지 섭렵하여 천마신공에 녹여내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괴물 같은 녀석이군!’
어금니를 뿌득 간 총관이 일순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횡으로 후려갈 때였다.
“어딜!”
남궁천이 일갈을 터뜨리고는 순식간에 발을 내질렀다. 동시에 뒤에 선 천마상 역시 발을 내지르면서 총관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어어억!
“크억!”
슈우우우욱, 꽈다아앙!
혜성처럼 날아간 총관이 그대로 전각 벽을 부수면서 나뒹굴었다.
쿠르르르릉……!
전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남궁천이 발을 내려다보니 냉기가 맺혔다가 스르르 녹는 게 보인다.
‘확실히 빙백신공은 천마신공과 상성이 좋은 편이라니까.’
천마신공 역시 극음지기에 더 가깝기 때문일까?
보통의 정공보다도 빙백신공이 천마신공과 잘 어울리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전각 안까지 굴러 들어가서 쓰러졌던 총관이 무너진 잔해더미를 헤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쿠르르르!
파편들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총관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남궁천이 그 모습을 보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아직도 네가 총관이라고 생각하나? 역할 놀이는 진작 끝났을 텐데.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그만할 때 됐잖아.”
“네가 뭐라고 한들 나는 빙궁의 총관이…….”
“미친놈. 너야말로 미친놈이구나.”
남궁천이 차갑게 읊조리더니 무심히 벽라검을 들어 사선으로 휘둘렀다.
쒸아아아아아앙!
얼어붙은 강기가 마기와 섞여서 화살처럼 날아갔다.
쉬카아아아앙!
폭음이 울리면서 전각이 다시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쿠르르르르르! 쿠쿠쿵!
하지만 이번에는 총관도 적절히 호신강기를 펼친 것인지, 무너지던 잔해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주변 전각이 또 일부 무너졌고, 순식간에 사방이 무너지고 부서진 잔해들로 인해 폐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푸스스스……!
호신강기로 파편을 튕겨내고 나니 총관 주변이 말끔해지면서 쓰러져 있던 빙하운의 모습도 드러났다.
빙하운이 비척거리면서 일어나서는 숨을 헐떡였다.
“미, 미안하오…… 총관.”
“하아, 궁주. 그게 무슨 꼴입니까?”
총관이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을 척 뻗었다.
그 모습을 본 빙하운이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총, 총관……! 용서해 주시오!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실수라고……?”
“한 번만 더! 부디 기회를!”
“후우, 이 병신 같은 놈이. 기껏 궁주로 만들어놨더니. 고작 그 모양 그 꼴이라니.”
“총, 총관……! 아니, 주군! 제발……!”
“닥쳐라. 네 역할은 여기서 끝났다.”
“아, 안 돼! 으아아악!”
순간 빙하운의 신형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앞으로 점점 떠밀려가기 시작했다.
빙하운이 악착같이 버티기 위해 애를 썼지만, 보이지 않는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빙흡열공술(冰吸熱功術)!
차갑게 식은 얼음이 뜨거운 열을 끌어들이는 원리를 이용하여 상대의 내기를 빨아들이는 신공이다.
워낙 손속이 잔인한 무공이었기에 빙궁 내에서도 오래전 금기된 기술.
하지만 총관은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서 매일같이 남몰래 수련을 거듭해 왔던 터였다.
“끄아아아압!”
결국 버티지 못한 빙하운이 총관의 손아귀로 휙 빨려들어 가더니 이내 목이 잡히면서 온몸이 빠르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흐이익! 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이어지면서 빙하운의 몸이 마른 가죽처럼 축 늘어지더니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면 빙공을 흡수한 총관의 몸에서는 투명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휘오오오오오!
전신에서 빙공이 흘러넘치니 힘이 마구 치솟았다. 주변 공기가 단단하게 얼어붙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선회하는 기운 속에서 총관의 몸이 살짝 떠올랐다.
쉬이이이이이!
주변을 회전하는 얼음 알갱이들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구구구구구구……!
회전이 점점 빨라지자 주변의 사물들도 바닥에서 떠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요란하네, 빌어먹을 새끼.”
마침내 회전하는 얼음 알갱이들이 하나의 고리처럼 보일 정도로 빨라졌을 때,
콰아아아아아!
총관의 몸을 에워싸던 얼음 알갱이들과 파편들이 사방으로 폭약처럼 터져 나갔다.
투타타타타타타타!
“크악!”
“으아악!”
적아를 가리지 않은 얼음 알갱이들과 파편들이 사람들을 마구 덮쳤다.
투타타타탕! 콰차차앙!
전각 벽에도 구멍이 뚫렸고, 창문은 부서지고 지붕은 무너지며 내려앉았다.
슈우우우우.
그제야 사뿐하게 바닥으로 착지한 총관이 양팔을 내려다보았다.
푸른빛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연신 넘실거렸다.
이내 총관의 시선이 비쩍 마른 채 얼어붙은 빙하운의 시신으로 향했다.
“한심한.”
시큰둥하게 말을 뱉은 그가 가볍게 지풍을 날리자, 한 줄기 빙공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콰아아아앙!
고작 지풍을 날렸을 뿐인데 빙하운의 시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후후후후. 크하하하하하하!”
넘쳐나는 기운에 만족한 총관이 허리를 꺾어 들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남궁천이 한 걸음 나섰다.
“개지랄은 다 떨었냐?”
“진천랑. 네가 아무리 초견파공안의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이젠 나를 이길 수 없을 거다. 오래전 네가 다녀간 후로 빙공은 한 단계 더 발전했으니. 그걸 지금부터 보여주지.”
“어디 한번 검수해 주지. 만약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면 혼나는 거야. 카아아악, 퉷!”
남궁천이 벽라검을 들고 서서히 기수식을 취했다.
* * *
빙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두터운 무복을 껴입은 무인들이 마구잡이로 뒤엉켜선 칼부림을 하니 적아를 구분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광풍사에게 신호를 보냈던 적랑대주들은 사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연신 살육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팽수혁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불만을 터뜨렸다.
“제기랄, 우린 누구하고 싸워야 하는 거야? 누가 적이지?”
“어음…… 그래도 우리가 광풍사에게 신호를 보냈으니까…… 광풍사 무인들하고 한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빙파위사단도 같은 편인 거지?”
“그럴…… 걸?”
“그럴…… 거다.”
당우기도 손가락 사이마다 암기를 꺼내 쥐고는 긴장한 채 대꾸했다.
적이 정확히 누군지 모르니 괜히 더 긴장이 된다.
그때였다.
칼부림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문득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돌진해 오더니 팽수혁을 향해 날아들며 일갈을 터뜨렸다.
“뒈져라! 이 빙궁의 하수인들아!”
쒸에에에엑!
쌍도가 달빛을 튕겨내며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칫!”
팽수혁이 혀를 차고는 어기신풍을 펼쳐 보법을 밟았다.
파바바밧!
갈지자로 물러서다가 쌍도가 허공을 베어낼 때쯤, 그대로 바닥을 차며 튕기듯 날아갔다.
동시에 손에 든 태도를 도집째로 휘둘러 상대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빠아아아악!
“크억!”
그대로 눈이 뒤집힌 상대는 입에 거품을 물고는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팽수혁이 쓰러진 상대를 발로 뻥 차버리고는 씨근거렸다.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방금 팽수혁을 공격한 자는 바로 빙파위사단원이었다.
윤종승도 헷갈린다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어음…… 그럼 빙궁과 한편이 되어야 하는 건가? 광풍사랑 빙파위사단이 서로 소통이 잘 안 된 모양인데…….”
그때였다.
우르르르르!
지객당 정문으로 갑자기 수많은 무인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오는 게 아닌가?
“전부 정리해!”
“존명!”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무인이 날카롭게 명령을 내리자, 지객당 안까지 들어와서 칼부림을 하던 자들이 빠른 속도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머릿수에서 밀린 빙파위사단과 광풍사 무인들이 전부 지객당 밖으로 달아난 것이다.
그제야 주변이 조용해지자 팽수혁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한 걸음 나서서 포권했다.
“배려에 감사드리오! 그러잖아도 갑자기 난리가 나서 꽤나 곤란해하던 중이었소. 귀한 도움을 받았소!”
그러자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훑어보다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두터운 피풍의에 ‘북풍(北風)’이라는 글자가 하얗게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북풍단주인 듯했다.
구성원이 어찌나 많은지 지객당 밖에도 북풍단원이 빼곡하게 도열해 있을 정도였다.
팽수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이렇게까지 우리를 지켜주지 않아도 충분히 잘 헤쳐 나갈 수 있는데…….”
“흥! 이것들을 전부 포박해라!”
“에이, 또 뭘 그렇게 포박…… 응? 포박이라니? 우리를 지켜준 거 아니었소?”
“닥쳐라!”
“아니, 이게 뭔 개 같은 경우야? 방금 풀어줘 놓고 다시 또 포박이라니!”
“시끄럽다! 적랑단주가 지금 궁주님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네놈들이 시치미를 뗀다고 통할 줄 아느냐!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들을 포박하라!”
“존명!”
다음 순간 대답과 동시에 무인들이 날아올랐다.
“에이, 썅! 이건 아니지!”
차차차차앙!
유현과 팽수혁, 그리고 윤종승과 당우기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저마다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