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 북극의 빙하처럼
평호수사왕(平湖守蛇王).
빙궁의 무인들은 이곳 호수를 천궁호(天宮湖)라고 불렀고, 그 호수의 주인을 평호수사왕이라 불렀다.
평호수사왕은 호수 가까이만 가지 않으면 없는 듯 조용한 신수(神獸)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평호수사왕과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산군에 대한 예의를 지키듯, 이곳 별천지를 지키는 존재에 대한 예의였다.
오히려 이따금씩 짐승들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치며 제를 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어린 빙설이 뭣도 모른 채 평호수사왕의 영역에 들어가 버린 것.
“꺄아아악!”
뭐를 어떻게 할 겨를도 없었다.
평호수사왕은 순식간에 빙설을 휘어 감더니 그대로 깊은 호수로 돌아갔다.
첨벙!
츄아아아아아!
수면 위로 물줄기가 치솟더니 이내 호수면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아주 잠깐 의식을 잃었던 빙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야 자신이 호수면 깊숙이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신 차려야 해!’
아버지에게서 배운 빙백신공을 떠올린 그녀가 재빨리 운공을 시작하자 전신이 차갑게 식으면서 주변의 물이 얼음처럼 굳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빙설은 얼음알갱이를 뿌리면서도 평호수사왕에 의해 빠른 속도로 끌려가고 있었다.
호흡이 점점 차오르는 시점에, 저만치 뭔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빙설은 다시 공력을 운기해서 안력을 키웠다.
‘아…… 아버지!’
분명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헤엄치며 오는 사람은 아버지 빙하운이었다.
하지만 호수에 사는 평호수사왕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빙하운이 공력을 끌어올리고는 수면 아래에서 일검을 휘둘렀다.
츄아아아아!
반월의 얼음이 날카롭게 뻗어간다.
그제야 평호수사왕이 몸을 뒤틀면서 강하게 꼬리를 쳐올렸다. 그 바람에 온몸이 친친 감겨 있던 빙설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하게 휘둘렸다.
츄아아아아아앙!
수면 아래에서 수압과 얼음이 부딪치면서 산산이 터져 나간다. 그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가니 산정호수의 표면에 소용돌이가 생겼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평호수사왕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호숫가에 빙설을 던져두었다.
“프하!”
가까스로 숨을 토해낸 빙설이 바닥에 엎드려 기침을 하는데, 평호수사왕이 물러나지 않고 돌아서기만 하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츄아아아아!
수면을 뚫고 솟구쳐 오른 빙하운이 사뿐히 수면 위로 착지했다. 조금 전 그가 뿌린 일검 때문에 수면에는 얼음 조각이 둥둥 떠 있었다.
얼음 조각을 밟고 선 빙하운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평호수사왕을 응시했다.
“아이가 아직 어려 철없이 호수에 뛰어들었소.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그르르르……!
하지만 평호수사왕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내 딸이오.”
크르르.
“내 단단히 타이를 테니 그만합시다. 이만하면 그 아이도 많이 놀랐을 거요.”
그르르르.
역시나 평호수사왕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나직한 울음만 흘린다.
스르르르르.
오히려 꼬리를 미끄러뜨리더니 거의 실신한 상태에 있는 빙설의 몸을 휘어 감았다.
빙하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쩌적……! 쩌저적……!
빙하운의 발밑에서 얼음이 점점 넓은 범위로 커져갔다.
호수면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빙하운의 전신에서 한기가 폭사했다.
“평호수사왕. 기어이 그렇게 해야겠소? 아이의 실수라 하지 않소?”
크르르르르.
평호수사왕은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 나직한 울음만 울렸다.
“만약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자리에서 나도 죽고 너의 새끼들도 죽는다!”
꾸구구궁……!
빙하운의 일갈과 함께 호수면이 단단하게 얼어붙으면서 온도차에 의한 소리가 울렸다.
땅. 따앙.
이제 빙하운은 온몸이 얼음 조각이라도 된 것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쿠아아아아앙!
평호수사왕이 입을 쩍 벌리고 괴성을 터뜨렸다.
거친 바람이 빙하운의 전신을 덮치면서 기다란 백발이 사납게 흩날렸다.
하지만 빙하운은 역시나 차갑게 식은 얼굴로 물러나지 않았다.
“네가 물러날 수 없듯이. 나 또한 물러날 수 없다. 선택해라. 평호수사왕. 다 같이 죽을 것인지! 함께 살 것인지!”
쩌저저저저저적!
따당! 땅!
곳곳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빙하운은 스스로도 제어하기 힘든 한기에 결국 각혈을 하고 말았다.
“쿨럭, 쿠웨에에엑!”
한 움큼의 피가 쏟아지면서 그대로 얼음 바닥 위에 얼어붙었다.
그는 지금 빙백신공 중에서도 금기에 해당하는 빙계패주(氷界霸主)의 단계를 시전하고 있었다.
빙계패주란, 본인은 물론 주변의 모든 만물까지 물아일체로 보고 극음의 기운으로 끌어들이는 단계를 말한다.
빙백신공의 대성을 앞두게 되면 이 단계에 이를 수 있는데, 어설프게 운용했다간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본인조차도 빙상이 되어 영원히 잠들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다.
빙하운이 쇳소리 같은 호흡을 흘리며 말을 쥐어짰다.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내게 그 아이는 세상의 전부다. 만약 네가…… 그 아이를 내놓지 않는다면…… 너 또한 내가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을 것이다.”
쩌저저적……!
쿠아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평호수사왕이 거친 포효를 터뜨렸다.
하지만 빙계패주의 단계로 완전히 얼어붙은 호수는 그대로 땅 덩어리가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호수사왕은 빙하운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한낱 작은 인간이 너른 호수를 통째로 얼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물론, 평소라면 빙하운도 이 정도로 강한 한기를 분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빙설이 위기에 처하자 초인적인 힘이 솟은 셈이다.
대신 대가는 치러야 했다.
지금도 빙하운은 체내의 혈액마저 얼어붙으면서 그 결빙이 체내 구조를 망가뜨리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앞으로 수개월은 병상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하리라.
평호수사왕과 빙하운의 차디찬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뒤엉켰다.
휘이우우우웅!
얼어붙은 수면 위로 삭풍이 불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를 노려보고 버텼을까? 자존심 싸움이 잠시 이어졌다.
아니, 잠시라고 생각했지만 둘의 대치는 생각보다 길었다.
분명 해가 중천에 있었는데, 어느덧 해가 저물고 별이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궁주님!”
마침 호숫가로 달려온 빙궁의 무인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침묵으로 이어진 눈싸움이 그제야 깨졌다.
그르르르르……!
평호수사왕이 나직한 울음을 흘리며 호숫가에 응집한 빙궁의 무인들을 보았다.
빙궁의 무인들은 평호수사왕을 확인하고는 입을 딱 벌렸다.
그들 역시 평호수사왕을 이렇게 제대로 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생각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포악스럽게 생기지 않았나?
온몸을 뒤덮은 은빛 비늘은 칼자국조차 남길 수 없을 듯하다.
빙하운은 조금씩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면 자신이 지고 만다.
빙설이 죽을 수도 있다.
‘그것만은……!’
결국 빙하운이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평호수사왕! 선택하라!”
쫘자자자자작!
수면 위로 빙결이 가시처럼 자라났다.
자신이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면 이 얼음 가시가 호수 어딘가에 있을 평호수사왕의 새끼를 위협하리라.
크르르르르……!
나직한 울음을 토한 평호수사왕이 눈을 한 차례 끔뻑이다가 빙설을 입으로 물었다.
빙하운이 흠칫거리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행히 평호수사왕은 빙설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휙!
평호수사왕이 입에 문 빙설을 집어 던지자, 호숫가에 있던 무인들 중 냉이겸이 냉큼 몸을 날려 받아냈다.
파라라라라락!
탁!
“아가씨! 설아! 괜찮으냐?”
냉이겸이 얼른 맥을 짚고는 빙하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사합니다!”
“후우…….”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빙하운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는 평호수사왕을 향해 말했다.
“고맙소. 이제…… 다시 보지 맙시다.”
쩌저저저저정!
다음 순간 얼어붙은 호수면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더니 물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꽁꽁 얼어붙었던 호수면이 녹는 순간이었다.
“궁주님!”
냉이겸이 빙설을 무인들에게 인계하고는 얼른 경공을 펼쳐 달려왔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던 빙하운이 냉이겸의 어깨에 겨우 기댔다.
“설이는……?”
“저쪽으로!”
냉이겸이 빙하운을 부축하고는 몸을 훌쩍 날렸다.
마침내 다소곳이 누워 있는 빙설에게 다가간 빙하운이 비척거리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설아, 내 딸아.”
빙하운이 안아 들자, 그제야 빙설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빙설은 희뿌연 시야 너머로 조금씩 초점이 맞으며 보이는 아버지를 확인하고는 와앙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흐아아아앙! 아빠, 죄송해요! 나 때문에…… 히끅…… 아빠가…… 피가…….”
빙하운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는 빙설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괜찮다. 우리 딸 울음소리가 씩씩한 걸 보니 이 아비는 다 나았다.”
“흐아아앙. 아빠!”
빙설이 목 놓아 울자, 주위를 둘러 싼 빙궁의 무인들은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먼 산을 돌아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안아준 빙하운이 빙설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고는 싱긋 웃었다.
“아비가 말하지 않았더냐? 무서운 신수가 살고 있다고. 이 호기심쟁이. 사랑하는 설아. 많이 무서웠지? 이젠 괜찮다. 이 아비가 언제나 북해의 빙하처럼 곁에 있어주마.”
온몸이 차갑게 식은 빙하운이 빙설을 뜨겁게 끌어안았다.
* * *
“아버지…….”
“아으아…….”
혈마불, 아니, 빙하운이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빙설의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아버지…… 이게 뭐야…… 이게…….”
“으으으…….”
“북해의 빙하처럼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준다면서요. 언제나…… 그렇게 변함없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아아…….”
“아버지!”
가슴속에서 솟구친 뜨거운 감정에 빙설이 바닥을 차고 혈마불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두 사람이 오래전 그날처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냉이겸 역시 눈을 질끈 감고는 어깨를 떨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와 죄책감이 심장을 옭죄고 있다.
“아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미안해. 이젠 내가 북해의 빙하처럼 아빠 곁을 지킬게. 내게 그럴 기회를 줘.”
“아으아…….”
빙하운이 거칠게 변한 손을 들어 빙설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북받치는 감정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냉이겸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나섰다.
“이제 가야 합니다. 궁주님.”
“아아아…….”
“설아. 가자꾸나. 우선 궁주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한다.”
“네, 장로님.”
눈물을 훔친 빙설이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동작 그마아아아안!”
고막을 찢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가 천지를 격동시켰다.
흠칫거리며 돌아본 곳에는 총관이 무서운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가려고? 아가씨. 그리고 냉 장로. 그놈은 대죄인 혈마불이오. 지금부터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내가 용서치 않을 거요.”
정말이지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막강한 기운이 그들을 덮쳐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 사이로 한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시선을 가로막았다.
어깨에 벽라검을 척 걸친 남궁천이 바닥에 침을 탁 뱉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 뭐 좀 돼? 왜 네가 용서를 하고 말고 지랄이야? 확 뒈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