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 북극의 빙하처럼
“이게 무슨…….”
총관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전각 벽에 처박힌 빙하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저 머저리 같은 게…….’
궁주가 되어서도 진천랑에게 얻어터지다니.
엉겁결에 쌍장을 뻗어내는 바람에 요행히 풀려난 빙설은 비틀거리면서 멀어졌다.
“후우. 남궁 단주. 이게 지금 무슨 짓…….”
파앙!
다음 순간 응축된 공기가 터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남궁천의 신형이 순식간에 총관 코앞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후우우웅!
뒤늦게 바람이 불면서 총관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흩날렸다.
너무나 빠른 경신술이었기에 총관은 말을 하다 말고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다.
뺨이 퉁퉁 부은 채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빙설. 그리고 저만치 만신창이가 되어서 숨이 겨우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혈마불.
혈마불은 남궁천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격동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궁천 역시 오묘한 감정으로 그 눈빛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남궁천 주위가 고요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남궁천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저벅저벅.
남궁천이 걸음을 옮겨 총관의 곁을 그대로 지나쳤다.
남궁천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복잡하고도 오묘한 기운 때문에 총관은 바로 곁을 지나칠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총관을 지나친 남궁천이 혈마불에게 다가가더니 입을 꾹 다문 채 내려다보았다.
혈마불 역시 두 눈을 바로 뜨고는 남궁천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격동하는 감정이 한동안 오갔다.
마침내 남궁천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꼴이 이게 뭐야?”
“……!”
순간 혈마불의 눈동자가 눅눅하게 젖어 들어갔다.
이윽고 혈마불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크흐흡. 크흐흐흑! 으아아아아!”
바닥을 짚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 빙설은 남몰래 옷깃을 여며 쥐었다.
‘왜……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어쩌면 이미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끔찍하고도 무서운 사실을 선뜻 받아내기 어려운 건지도 모른다.
빙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엎드려 흐느끼는 혈마불을 보고는 남궁천이 어금니를 꾹 깨물며 돌아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은 표정.
남궁천이 북풍한설보다 싸늘한 음성을 흘렸다.
“이 새끼들, 완전 쓰레기들이네.”
“적랑단주. 괜히…….”
“닥쳐. 역겨운 목소리 듣기도 싫다. 뭐냐? 이혼대법이냐?”
마교의 이혼대법이라면 궁주와 마인의 영혼을 바꿔치기 했을 수도 있으리라.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총관이 특급 은마령이라면 어떻게든 성공했을 수도 있다.
총관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남궁천을 응시했다.
“남궁 단주. 남의 집안일에는 신경 쓰지 맙시다. 피차 피곤하지 않겠소?”
“닥치라고 했지? 확 뒈질라고.”
“…….”
“내가 이 집안에 빚진 게 있어서 말이다. 내가 또 은원 관계는 확실히 청산하는 성격이라서.”
“후후후.”
총관이 서늘한 웃음을 흘리자,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뭐가 웃겨? 이 새끼야.”
“말하지 말라면서.”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야지. 병신아.”
“흐음. 별건 아니고. 전생에 진 은혜는 전생에 갚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
남궁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또 다른 기분이다.
남궁천이 싸늘하게 웃었다.
“하여튼 너희들하고 대화를 해보면 재미있단 말이야. 전율이 일어난달까? 어떻게 안 거냐?”
“뭘? 네가 진천랑이라는 것?”
총관이 빈정거리듯 말한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거군.”
“대답할 이유를 대보시든가?”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었다.
“나는 사실 평화주의자야. 누구도 날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힘을 쓰지 않았지.”
정말 거짓말 같겠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특히 전생에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먼저 때린 적이 없었다.
누구의 주목도 받아서는 안 될 도망자였으니까.
“그런데 가끔 처맞아야 정신 차리는 녀석들이 있긴 하더라고. 지금처럼.”
말을 마친 남궁천이 단전에서부터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뜨끈한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면서 전신으로 퍼진다.
“마기……?”
총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의 전신에 맺혀가는 검붉은 기운을 보았다.
“그래, 마기다. 그런데 네게서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군. 하긴 은마령이라면 마공을 익히지 않을 테니까. 정말 이것들은 감쪽같다니까. 과거에 만났을 때도 아예 눈치채지 못했으니.”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소.”
“칭찬은 개뿔. 남 속이는 게 자랑이다, 이 새끼야.”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움이지. 오래전 당신이 본 궁에 와서 빙공을 개선시켜 준 덕에 더 강해질 수 있었소.”
“그럼 구배지례(九拜之禮)라도 하던가? 엎드려서 아홉 번 절하면 제자로 받아주마.”
파아아아아앙!
다음 순간 남궁천의 등 뒤로 천마상이 다시 나타났다.
“……!”
눈썹을 꿈틀거린 총관이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천마를 모시지 않소. 은마령은 죽을 때까지 가면을 쓰지.”
“그럼 뒈져야지.”
말을 마친 남궁천이 혈마불을 돌아보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미안하게 됐다. 전생에 저놈이 은마령이라는 걸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남궁천이 빙설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모시고 물러나 있어라.”
“아…… 버지……?”
“아직도 모르겠나? 아니면 이제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은 건가?”
순간 빙설이 혈마불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할 때,
“설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냉이겸이 온통 피 칠갑을 한 몸으로 서 있었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동안 사투를 겪은 게 분명해 보였다.
“장로님……!”
냉이겸은 딱딱한 표정으로 빙설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남궁천에게 시선을 옮겼다.
남궁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대략의 사정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어서 데려 가시오.”
남궁천이 턱짓으로 혈마불을 가리켰다.
“……고맙네.”
냉이겸이 잔뜩 젖은 목소리로 쥐어짜듯 대답을 하고는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가 떨리는 손을 뻗어 혈마불을 부축해 일으켰다. 어느새 냉이겸의 주름진 눈가에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궁주님. 이 늙은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혈마불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냉이겸은 혈마불의 어깨를 콱 움켜쥐고는 빙설에게 말했다.
“설아, 가자꾸나.”
“장로님…… 이게 어떻게…….”
“정신 차려라! 설아! 모든 사정은 나중에…… 나중에 정리하자꾸나.”
빙설이 가늘게 떨면서도 혈마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으…….”
혈마불이 천천히 손을 들어 빙설을 가리켰다. 이윽고 손이 닿을 만큼 빙설이 가까워졌을 때, 혈마불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빙설의 코끝을 검지로 살짝 건드렸다.
“……!”
순간 빙설의 눈이 커졌다.
* * *
어린 빙설은 눈앞에 펼쳐진 황홀경에 넋을 놓고 말았다.
“우아아아아!”
언제 봐도 진풍경이지 않은가?
온통 얼음과 눈으로 덮인 이곳에 이런 별천지가 있다니!
몇 개월 전 아버지가 빙설을 처음으로 이곳에 데려왔을 때, 그녀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기다란 동혈을 지나서 나타난 이 분지에는 북해의 여느 땅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처럼 움푹 파인 분지였는데, 빙궁 인근의 여느 땅과는 달리 여기만큼은 햇살이 따사롭고 가지각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광활한 꽃밭 한가운데에는 산정호수가 있었는데, 이따금씩 찰랑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벌과 나비가 곳곳에서 날아다니고, 꽃잎이 산들바람에 춤을 추는 곳.
“아아, 정말 아름다워!”
어린 빙설은 방긋 웃으면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고 나니 그녀의 기쁨에 동조하듯 주변으로 풀벌레들이 바람과 함께 화사하게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문득 저만치 산정호수로 향했다.
‘저곳에는 뭐가 살고 있을까?’
문득 아버지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저 호수만큼은 가까이 가면 안 된단다.”
“왜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지. 전설의 신수가 살고 있단다. 성정이 매우 포악하니 절대 가까이 가지 말거라.”
그렇게 당부한 아버지는 바위 하나를 옮겨두고 경계로 삼으라고 했다.
폴짝!
빙설은 그 바위에 올라서서 먼발치의 호수를 보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는 마치 은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들이 수면에서 마구 몸을 뒤집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찰랑이는 호수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여 있는 물은 원래 얼어 있는 게 정상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마치 살아 움직이는 거대 생명체 같지 않은가?
그것도 너무나 아름다운!
‘정말 저 호수에 무시무시한 신수가 사는 걸까?’
그렇게 보기에는 호수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쩌면 아버지가 자신을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북해의 빙산에는 설인(雪人)이 산다고 거짓말을 하던 아버지가 아닌가?
밥을 안 먹고 떼를 쓰면 설인이 내려와서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고.
하지만 설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에도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만 보고 오면 괜찮지 않을까? 후다닥 보고 오면?’
이제 어느 정도 제 한 몸은 지킬 정도의 무공도 익히지 않았던가?
‘그래, 잠깐만 보자.’
분명 저렇게 투명하고 맑은 호수에 사는 생물체라면 몹시 아름다울 게 분명했다.
사뿐!
빙설은 공력은 운기해서 몸을 가볍게 띄웠다. 설풍보법을 이용해서 눈밭을 스치며 날아가는 눈보라처럼 가볍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사사사삿!
그녀가 지나가는 길마다 꽃들이 사라락 얼어붙었다.
탁.
마침내 호숫가에 다다른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수면을 살펴보았다.
“아…….”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호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물이 녹으면 이렇게 아름답구나!”
얼어붙은 호수가 아니라니.
투명한 물 아래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며 지나다니는 것도 보인다.
참방. 참방.
시원한 감촉이 기분 좋게 발목을 적신다.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떼를 지어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확 흩어졌다가 모이곤 한다.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물속에 또 하나의 세상이 있는 것만 같다.
‘아버지도 참. 이걸 나중에 보여주면서 또 놀라게 해주려고. 그래도 그땐 처음 본 것처럼 놀라는 척해야지.’
빙설이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호숫가를 느긋하게 거닐고 있을 때였다.
“어……?”
갑자기 주변으로 물고기들이 빠르게 흩어지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츄아아아아아아아!
세찬 물줄기가 솟구치는가 싶더니 하늘에서 비처럼 물이 쏟아져 내렸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수면 위로 몸을 빼낸 거대한 생물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는 노란 눈알로 빙설을 노려보고 있었다.
“뱀……?”
뱀이라기에는 명백하게 큰 생명체였다.
다음 순간 거대한 뱀이 빙설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츄아아아아아!